기연독식 (90)
도통달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 아직 결혼 생각이…….”
백하련은 어렵게 꺼낸 도통달의 말을 쉽게 가로챘다.
“형식이 뭐 중요해. 중요한 건 당사자들 마음이지. 자넨 설린이가 싫은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네. 자네도 좋고 설린이도 좋고, 우리 집안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
백하련은 말 중간에 남궁백중과 남궁상연을 봤다. 그녀의 눈에서 ‘반대하기만 해 봐요!’라는 엄포가 살기처럼 뿌려졌다.
그래서 설사 반대할 생각이 있더라도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넨 이미 남궁세가의 사위나 마찬가지야.”
여기서 도통달이 ‘난 설린이와 결혼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남궁세가와 일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괜한 말로 분란을 만드는 것보다 침묵이 낫다는 걸 알만큼 도통달은 현명했다.
남궁설린이 고맙게도 도통달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아버지, 오라버니 중독시킨 범인은 아직 못 잡았죠?”
“면밀히 주시하고는 있지만, 범인을 단정할 단서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럼 통달이한테 맡겨 보세요.”
새로운 위기로 밀어 넣었다.
“응? 도서방…… 아니, 도소협에게?”
남궁백중의 ‘도서방’이라는 호칭에 풉! 웃은 남궁설린이 말했다.
“전 중원을 통틀어 통달이보다 유능한 수사관은 찾을 수 없을 거예요.”
모두의 시선을 받은 도통달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용의자는 추려 놓으셨겠죠?”
“청살 독의 특성을 감안해서 여덟 명을 특정했네. 언제든 철현이에게 청살 독을 먹일 수 있는 사람들이지.”
“음식을 담당하거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겠군요.”
“맞네.”
“일단 그들을 만나 봐야겠군요.”
“확실한 증거 수집이 먼저 아니겠나?”
“범인만 알아내면 증거 찾는 게 더 쉽겠죠.”
“괜한 경각심을 주면 증거를 인멸할 수도 있어.”
“저를 만난 후라면 증거 인멸할 시간도 없을 겁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남궁백중과 남궁상연은 따로 만났다.
“도통달과 설린이의 장담을 믿어도 될까요?”
“나도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자칫하다가는 범인의 경각심만 높여서 증거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서워서 멀리서만 지켜봤을 뿐 취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만약 도통달이 범인을 잡아내지 못하면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습니다.”
여덟 명 모두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가 없는 자는 억울하겠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
“네 생각은 어떠냐? 설린이의 장담에 신빙성이 있어 보이느냐?”
남궁백중의 물음에 남궁상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몇 마디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요? 세상에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생각도 그렇다. 설린이가 도통달을 과신하는 거지.”
“도통달도 자신을 너무 믿는 거고요. 도통달이 그동안 보여 준 능력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는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는 수 없군. 넌 다음 계획을 준비해라.”
* * *
주방에서 일하는 여섯 명과 남궁철현에게 차와 음식을 가져다 주는 시비가 둘이었다.
다섯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 도통달은 의자에 앉은 그들을 쭉 훑어봤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그들은 더없이 불안한 표정이었다.
남궁백중과 남궁상연, 남궁설린에 도통달까지 있으니 불안한 건 당연했다.
도통달이 입을 열었다.
“여덟 분은 왜 여기 모여 있는지 짐작하고 있죠?”
누구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더라도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다.
“거기 두 분은 짐작조차 못 하고 있군요.”
시비 한 명과 주방에서 일하는 사내 한 명이었다.
“저…… 저희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주방 사내의 물음에 도통달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봤다. 그러다가 손짓을 했다.
“두 분은 나가도 좋습니다.”
도통달의 말에 두 사람은 가주인 남궁백중의 눈치를 봤다. 남궁백중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둘은 자리를 떠났다.
잠시의 침묵 뒤로 도통달이 말했다.
“여기 계신 여섯 분 중에 범인이 있을 것 같은데…….”
“저…… 저는 정말 모릅니다!”
“저도요! 저희가 왜 소가주님을 중독시키겠습니까?”
조금만 똑똑해도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과 시비가 남궁철현의 중독에 의심받을 것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중에 의심 가는 사람은 있을 텐데요?”
여섯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그들의 눈길을 쫓던 도통달은 한 명을 지목했다.
“왜 다들 당신을 의심할까요?”
이십 대 초반의 시비였다.
“네? 그…… 그럴 리가요! 전 정말 몰라요!”
“하지만 의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도통달이 주방에서 일하는 서른 초반의 여인에게 물었다.
“저 시비를 의심하는 이유가 뭐죠?”
“그…… 그게…… 갑자기 비싼 장신구를 사고…… 요즘 들어 돈도 제법 쓰는 것 같아서…….”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여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 그건 그냥 생긴 돈이에요! 소가주님의 중독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어디서 생긴 돈이죠?”
“그…… 그게…….”
도통달이 시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할지도 몰라요.”
‘고문’이라는 단어가 시비의 어깨를 움찔 떨게 만들었다.
“사…… 사실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님 패물에 손을 댔습니다!”
시비는 자백 뒤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기대 가득했던 남궁백중과 남궁상연의 눈에 실망이 스쳤다.
사실 도통달은 시비가 남궁철현을 중독시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 남궁철현을 중독시킨 자는 없었다.
“모두 가도 좋습니다.”
남궁상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들은 범인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간단히 그걸 알 수 있다고?”
“어려울 게 없죠. 그들의 온몸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데요. 패물 훔친 시비를 잡았으니 전혀 성과가 없는 건 아니네요.”
“지금 패물이 문젠가? 저 중에 범인이 있을 텐데 그걸 못 잡은 게 문제지!”
“그래서 저들을 고문이라도 할 겁니까? 오호! 하실 생각이군요.”
남궁상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한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니 새로울 것도 없죠. 분명히 말하지만 저들은 철현이의 중독과 무관합니다. 만약 저들을 고문한다면 저와 남궁세가는 상당히 심각해질 겁니다.”
“지금 남궁세가를 협박하는 것인가?”
“제 말이 무서운가요?”
“전혀.”
“그럼 협박이 아닙니다. 제가 협박을 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남궁설린이 황급히 나섰다.
“숙부님, 통달이가 범인이 없다고 하면 없는 거예요.”
“넌 그걸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누구보다 통달이를 잘 아니까요. 괜히 저들 붙잡고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저들을 고문하지도 말고요. 만약 저들을 고문하면 저와 세가는 상당히 심각해질 거예요.”
남궁상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협박이냐?”
“제 말이 무서운가요?”
“응.”
“그럼 협박이…… 무서웠어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형님도 무서울 거다.”
남궁백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저들 말고 다른 용의자를 찾아야 해요.”
결국 불러 왔던 주방 사람들과 시비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하련의 패물을 훔친 시비만 빼고.
남궁세가에서 자체적으로 해 왔던 수사(그래 봤자 감시뿐이었지만)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철현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
도통달의 말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중독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살펴봤다.
그런데 없다면 남궁철현의 주관적인 관점밖에 남지 않는다. 그 기다림은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사흘의 시간은 그랬다.
도통달은 남궁철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뛰어갔다. 이번에는 혈색이 많이 돌아왔다는 흑의의 말을 인정했다.
남궁백중과 남궁설린은 이미 와 있었고 도통달이 도착하고 얼마 후 남궁상연도 합석했다.
그동안 남궁철현은 자신이 어떤 독에 중독됐고 어떻게 낫게 됐는지에 대한 서사를 들었다.
“너한테 또 목숨의 구함을 받았구나.”
“이번에는 진짜 목숨을 구한 거지.”
도통달과 남궁철현은 가볍게 안는 것으로 서로의 진심을 전했다. 다들 남궁철현이 나아서 얼마나 다행인지를 얘기했고, 그 사이에 흑의는 자신의 공이 크다는 걸 홍보했다.
“절 중독시킨 자는 누구였습니까?”
남궁백중에게 물었지만 도통달이 대답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범인을 잡았다면 도통달이 잡았을 테니 말이다.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여기 도소협이 범인이 아니라고 풀어 줘서 꽉 막힌 상황이다.”
“통달이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겠죠.”
남궁백중과 남궁상연은 두 남매의 도통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에 빠진 광신도라도 저들보다는 믿음이 약할 것이다.
도통달이 말했다.
“청사 독은 조금씩 꾸준히 먹일 수밖에 없는 독이야. 즉 네가 먹는 음식을 만들 때 독을 넣거나 가져다줄 때 하독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 그런 사람이 여덟 명이었는데 범인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너만이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이지.”
남궁철현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아!’하는 소리를 뱉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구나?”
“있기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사람이 누군데?”
“정운당 당주 한석영. 내가 연공을 마치고 나면 종종 차를 가져다줬어. 끝에 약간 쓴맛이 났지만, 향이 좋아서 계속 마셨지.”
남궁상연이 말했다.
“한당주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열여섯 살에 남궁세가에 들어와 이십오 년 동안 충성을 다한 사람이야.”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방 사람들과 시비를 제외하면 제게 뭔가를 꾸준히 먹인 사람은 한당주 뿐입니다.”
“한당주를 불러와 보면 알겠죠.”
남궁설린의 말에 남궁백중이 물었다.
“한당주를 불러오는 것만으로 사실을 밝힐 수 있다고?”
“통달이라면 가능해요.”
저 믿음은 불치병이다.
“정말 도소협 자네가 알아낼 수 있나?”
“불러올 수 있다면요.”
“당연히 부르면 오겠지.”
“제가 한석영이라면 이미 도망쳤을 겁니다.”
“뭐라고?”
“혐의를 받았던 주방 사람들과 시비는 죄가 없다고 풀려났습니다. 그 와중에 철현이는 깨어났고요. 의심의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올 거라는 건 짐작 할 수 있으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가 없죠.”
“그거야 한당주가 범인이었을 때 얘기지.”
“그럼 가서 찾아보시죠.”
남궁상연이 황급히 나왔다. 이각이 지났을 때 도통달은 한상연이 사라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이각이 흐른 후 그 짐작은 사실로 드러났다.
“뭐야? 한당주를 찾을 수가 없어?”
“한 시진 전에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세가를 나갔다고 합니다.”
“그럼 기다려 봐야겠군.”
도통달이 말했다.
“기다릴 게 아니라 추적대를 보내는 게 어떨까요? 한 시진 전이면 이미 멀리 도망쳤겠지만.”
“한당주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추적대라니?”
“한석영이 세가로 다시 돌아온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게 되겠지만, 만약 범인이라면 철현이를 죽이려 한 자를 놓치는 결과가 되겠죠. 어떤 게 더 타격이 클까요?”
굳이 저울에 달아 볼 필요도 없었다. 남궁백중이 남궁상연에게 말했다.
“당장 추적대를 편성해서 한당주의 흔적을 쫓아라.”
“알겠습니다.”
도통달은 그렇게 남궁세가를 떠난 추적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 시진이면 어디로든 도망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 놨을 테니 흔적을 찾기에도 쉽지 않을 터였다.
역시 날이 저물 때쯤 추적대는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 시간까지 세가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한석영이 범인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결국 도통달의 말이 모두 들어맞았군.”
남궁백중의 허탈한 말에 남궁상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 오늘 아침까지도 처음 의심했던 여덟 명 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도통달과 설린이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죠.”
“도통달은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