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독식 (113)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일황자님의 곁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입속의 혀처럼 움직이는 환관 태진이 있습니다. 이황자님께도 그런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대학사 장춘만.”
“황궁에 고작 나흘 있었던 저에게조차 그분들의 인품에 대해 말이 들어오는데 이판대인께서는 훨씬 잘 알고 계시겠죠.”
권력이고 재물이고 여자고,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탐욕스러운 자들이다. 태진과 장춘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도통달의 말이 이어졌다.
“이인자의 간교한 혀와 폭군의 살기가 만나면 가장 먼저 내쳐지는 사람이 삼인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죠. 죄송하지만 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어차피 결정은 두 분이 하시는 거니까요.”
도통달은 양수판이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양수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저처럼 뭔가를 단호하게 말하는 친구가 아닌데…… 허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조수방이 양수판에게 물었다.
“자넨 도통달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건가?”
“저 친구의 말에 가치가 없다면 북경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럼 고민을 해 보겠다는 거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자리까지 온 건 대인의 은혜도 있지만 상당 부분 도통달 저 친구 덕분입니다. 최악의 경우 어디 산중에 버려져 짐승 밥이 되었거나 아직도 항주에서 현령 노릇을 하고 있겠죠.”
“어째 마음을 정한 것처럼 들리는군.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이야.”
“고민은 해야지요. 할 겁니다.”
“어떤 고민 말인가?”
“물론 제 진퇴에 대해서…….”
전수방이 양수판의 말을 잘랐다.
“세 분 황자님 중 누구를 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아니고?”
“세 분이요? 대인께서는 삼황자님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잖나? 도통달의 말에 의하면 황제의 기운도 가장 강하고 말이야.”
“하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외척의 힘도 약하고 지지기반은 대부분 지방에 있고. 하지만 흩어져 있어서 그렇지 모이면 제법 되지 않나?”
“그 제법이 충분하지 않으니 문제죠. 그리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힘을 어떻게 모은단 말입니까? 삼황자님께 황제의 위에 오르실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게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는 강력한 아군입니다.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흩어진 힘은 절대 모이지 않을 겁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어도 어려울 건 마찬가지고요.”
“자네 말이 맞아. 그냥 가능성이 있는지 가늠해보는 거지. 흠…… 삼황자라…….”
“대인,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전수방의 대답은 잠시의 사이를 두고 나왔다.
“우린 과연 무엇을 위해 나라의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성현의 말씀을 줄줄이 읊을 수도 있고 좋은 말로 포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낯 뜨거운 말만 하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와 권력이죠.”
“자넨 정말 그것뿐인가?”
양수판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폈다. 마음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몸짓이었다.
“저라고 어찌 이십 대 때의 웅심이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관리가 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어 보지 않았다면 시정잡배보다 못한 인간이겠죠.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은, 어쩔 때는 바다보다 넓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 상황처럼 말입니다.”
“나로 인해 그 간극이 좁혀진다면 자넨 날 따라올 텐가?”
“대인…….”
“지금처럼 그냥저냥 살 만한 세상이면 우리 같은 관리도 나쁘지 않지. 부패했지만 일은 잘하잖아?”
“일은 잘하죠.”
“하지만 암군의 시대라면 우리 같은 관리들은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들지. 지금처럼 자리를 보존하는 것만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야. 자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나름 충신이라고 생각하네. 황상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 하지만 만약 일황자님이나 이황자님이 황제의 위에 오르신다면 그분들께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전수방은 고개를 저었다.
“난 자신할 수 없네. 충신이 될 수 없는 신하는 군주에게도 불행이지. 그리고 충이라는 게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일까? 관리라면 응당 백성에게도 충성을 다해야지.”
“저기…… 뇌물은……?”
“고위 관리로서 품위유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마음속에 삼황자님을 담고 계신 겁니까?”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
“황제폐하의 상태를 감안하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 * *
“거의 넘어왔어.”
“정말요?”
“그래. 그런데 왜 표정이 그런가? 기뻐해야지.”
“가만 있으면 굵고 길게 살겠다는 내 계획이 완전히 이뤄지는 건데, 자칫하다가는 내 인생이 쥐꼬리만큼 짧아질 수도 있잖아요.”
“난 오히려 가슴이 뛰는군. 내 손으로 누군가를 황제 자리에 올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양도어사님께 그런 웅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나도 몰랐네. 삼황자님을 만나고 나니 그런 게 생기더군.”
“돈만 밝히던 현령이 너무 변한 거 아니에요?”
“내가 변한 건 변한 거고 삼황자님을 황제로 만들 자네 계획을 밝혀 보지.”
“기본은 천하삼분지계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양분을 해야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유력한 한 명을 제거하는 게 첫걸음입니다.”
양수판은 얼굴이 하얗게 되도록 놀랐다.
“일황자님을 제거하겠다는 건가?”
* * *
결국 주서인의 손에 이끌려 황궁비고까지 왔다. 같이 안 가면 소리 지르겠다는데 방법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험한 첩첩산중처럼 경비가 깔려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황궁비고까지 가는 동안 기척이 느껴진 금의위 위사는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제법 거리가 떨어져서 들킬 염려가 전혀 없는 매우 안전한 길이었다.
“보물이 가득한 황궁비고의 경비가 의외로 허술하군요.”
도통달의 말에 주서인이 피식 웃었다.
“황궁에서 무공을 익히려는 사람이 있겠어? 그들에게야 황궁비고의 비급은 사서오경만도 못하고, 무기는 바늘만큼의 가치도 없어.”
하긴 금의위에 둘러싸인 황족에게 무공은 하등 필요가 없었고, 황궁비고에 출입이 가능한 관리들이야 일하기 바쁘니 익힐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황궁비고를 지키는 위사는 있어서 그들은 뒤쪽의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황궁의 다른 건물들처럼 황궁비고 또한 꽤나 큰 규모로 자리해 있었다.
삼층 면적을 다 합치면 능히 천 평은 되어 보였다. 일 층에 발을 들여놓자 책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청나군.”
일 장 높이의 책장이 벽을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수만 권의 책이 그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책을 둘러보는 도통달을 따라오며 주서인이 말했다.
“모두 무공서적은 아니야. 별 잡스러운 책들도 다 섞여 있더라고.”
도통달은 가슴 높이에 있는 책을 한 권 끄집어냈다. 여심춘몽이라는 책 제목이 특이해서였다.
‘만약 무공서적이면 어떤 내용일까?’라는 궁금증이었는데 책장을 펴자마자 살색이 가득 펼쳐졌다.
“무…… 무공서적 아닌 것도 많다니까!”
주서인은 휙 돌아서서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피식 웃은 도통달은 책을 원래 자리에 꽂은 후 주서인을 따라갔다.
이 층의 책장은 일 층보다 훨씬 적었고 당연히 권수도 삼 분의 일쯤밖에 되지 않았다.
“여긴 그래도 쓸 만한 책이 좀 있어.”
도통달은 대충 스윽 훑어보았다. 일반 무림인이 황궁비고를 들어왔다면 눈이 돌아가겠지만 도통달은 별 감흥이 없었다.
“익히고 싶은 무공 있으면 말해. 내가 특별히 허락해 줄게.”
주서인이 큰 인심 쓰는 것처럼 말했지만 도통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요. 딱히…….”
“딱히라니! 여기 있는 무공비급들은 무림인이 목숨을 걸고 얻으려고 하는 건데!”
“그건 어떻게 알아요?”
“처음 내게 여길 알려 준 황태감이 그랬어. 오 년 전에 죽었지만.”
“무림인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전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그래. 항주 건달이라고 했지.”
주서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 묻지 않겠지만 마냥 믿지는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주서인이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지금은 관심 없는 표정이지만 이 위로 올라가면 생각이 달라질걸?”
당장 두세 달 안에 엄청나게 강해지는 무공이 아니라면 도통달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 것이다.
삼 층은 일, 이 층보다 좁았을뿐더러 자리한 책장의 숫자도 훨씬 적었다. 책의 권수 또한 일 층의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게 내가 익힌 무공이야.”
주서인은 얼굴 높이에서 책 한 권을 뺐다.
밀영무흔.
제목만 봐도 살수가 익힐 수밖에 없는 무공이었다.
“왜 이 무공을 익힌 거예요?”
“눈높이에 있어서 뽑기 좋았어.”
그냥 얻어걸린 것이다.
“여기 있는 무공은 전부 무림에서 실전됐거나 무가지보의 가치를 지닌다고 했어.”
“황태감이요?”
“응. 황태감이.”
심심한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책장 앞을 지나던 도통달의 걸음이 멈췄다.
도통달의 머리 위쪽에 익숙한 제목의 책이 한 권 꽂혀 있었다.
‘응? 삼절도법도 여기 있네?’
도통달은 주서인에게 허락을 구한 후에 삼절도법을 책장에서 뽑았다. 책이 책장에서 반쯤 나올 때부터 그가 항상 봐오던 비급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남궁철현에게 받은 비급보다 이 비급의 두께가 훨씬 두꺼웠다.
‘종이 재질 때문인가?’라는 생각은 첫 장을 펼칠 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라락―. 사라락―.
책장을 넘기던 도통달의 손길이 멎었다. 분명 여기서 삼절도법의 베기 편은 끝났어야 했다. 그가 가진 비급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황궁무고의 삼절도법은 그 후에도 한참이나 초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오호! 이렇게 하면 훨씬 빠르게 휘두를 수 있구나! 응? 삼십육방의 네 방향을 점하는 것으로 쾌는 더 빠르게, 변은 더 현란하게 할 수 있단 말이지?”
도통달은 입으로 중얼거리며 손으로는 허공에 삼절도법을 펼쳤다.
그가 남궁철현에게 받은 삼절도법은 오백 자밖에 없는 천자문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원본이었군.”
중얼거리면서 삼절도법을 보고 있는 도통달에게 주서인이 물었다.
“그 무공 알아?”
도통달은 비급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제가 익힌 무공입니다.”
“그럼 그거 너 줄게.”
도통달의 시선을 받은 주서인이 말을 이었다.
“대신 한 가지만 해 줘.”
“뭘요?”
“네게 관상을 봐 달라고 했던 사람에게 형선 오라버니가 황제의 상이라고 얘기해 줘.”
“네?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라고요?”
“무…… 물론 엄청난 거짓말이기는 하지. 하지만 무림인이라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게 무공비급이잖아!”
“저 무림인 아니라니까요.”
“건달에게도 중요하잖아! 무공비급.”
“이 이상 강해 봤자 쓸모도 없어요. 어차피 중원에 나보다 강한 건달은 다 내 편이니까요.”
당황하던 주서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약속하지 않으면 소리 지를 거야.”
도통달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협박은 두 번 써먹는 게 아니에요.”
“안 통하나?”
“안 통하죠.”
“그럼 비급 두 개 줄게. 아니, 세 개.”
도통달이 넘어오는 기색이 없자 주서인이 갑자기 손을 덥석 잡았다.
“이리 와 봐. 무공비급 말고 줄 게 더 있어!”
일, 이 층과 다르게 삼 층은 공간이 세 군데로 분리되어 있었다. 주서인은 그중 왼쪽 공간의 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 도통달의 뇌리에 일 층에서 봤던 여심춘몽이 떠올랐다. 특별히 그가 음흉해서가 아니다. 여자가 방으로 끌고 가면 남자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떠올릴 그림이다.
“아…… 아니, 이러시면 곤란한데…….”
“뭐가 곤란해?”
주서인의 물음과 함께 방문이 열렸고 도통달은 곧 벽 가득 걸려 있는 무기들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