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독식 (151)
몸을 옆으로 트니 화살을 날린 궁수 한 명이 보였다. 곧 다섯 명으로 불어난 궁수들이 서둘러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도통달은 궁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귀찮은 녀석들부터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허공에 떴을 때 손 빠른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두 번 휘두른 도통달의 칼에 화살은 쓸모없는 막대기로 변했다.
궁수들에게 다음 화살을 날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도통달의 칼이 두 번 휘둘러지자 궁수 다섯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도통달은 곧장 황보길의 거처가 면한 마당으로 향했다. 거기에 황보길이 있었다.
대청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커다란 공간에 뒷짐을 진 황보길이 보였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황보길의 얼굴에 놀람은 있을지언정 두려움은 없었다.
곧 보강된 사병 열 명이 도통달과 황보길 사이에 담을 쌓았다. 그리고 황보길 한 발 뒤에는 두 명의 호위가 붙어 있었다. 딱 봐도 사병들 중 가장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보길이 입을 열었다.
“금의위 복장을 했는데 못 보던 얼굴이군.”
“금의위 위사를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도통달의 짧은 말에 황보길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난입했을 텐데 겁이 없는 친구로군.”
“겁은 당신이 내야지. 높은 자리에 너무 오래 있더니 현실감각을 상실한 모양이네.”
“네가 아무리 금의위라고 하지만 나 황보길이야! 이 나라의 병부상서 황보길! 감히 날 이리 대하고 무사할 것 같으냐!”
“당신이 황보길이니 내가 잡으러 온 거지. 순순히 무릎을 꿇으면 주변에 있는 허수아비들 목은 붙여 둘 수 있을 거야.”
도통달을 노려보던 황보길이 물었다.
“널 죽이는 건 잠시 미루고 한 가지만 묻자. 금의위에서 날 잡으러 온 이유가 뭐냐?”
“삼황자 전하의 암살 시도.”
황보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암살? 아! 며칠 전 저잣거리에서 있었던 그 소동? 동네 왈패 싸움에 삼황자 전하가 말려든 그 사건 말이로군.”
이황자 측에서는 그 방향으로 열심히 연막을 치는 중이었다. 금의위 위사를 포함한 시체가 여덟 구나 생겼는데, 사건을 그리 몰고 갈 수 있다는 건 아직 이황자의 힘이 창창하다는 증거였다.
도통달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자백하면 삼족이 멸하는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솔직히 잘못은 당신이 했는데 친인척까지 죽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안 그래?”
“넌 그 주둥이로 네 삼족이 멸하는 거다. 너 같은 놈을 친인척으로 둔 게 그자들의 죄겠지.”
“말이 안 통할 줄 알았어.”
황보길이 사병들에게 말했다.
“죽이지는 마라. 저 주둥이 안에 있는 혓바닥은 내 친히 뽑을 테니.”
병장기를 든 사병들이 도통달을 포위했다. 합공의 기본이었으나 여우들이 포위한다고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도통달의 뒤에 선 자가 먼저 움직였고 그것을 신호로 열 명이 동시에 공격을 들어왔다.
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믿겠지만 도통달에게는 공격의 선과 후가 확연하게 보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공격을 피하고 두 번째를 쳐낸 후 세 번째 공격이 닿기 전에 칼을 휘둘렀다.
“크윽―!”
도통달은 두 명의 배가 갈라진 그 빈틈을 비집고 나갔다. 그렇게 간단하게 풀린 포위는 다시 이뤄지지 못했다.
칼이 춤출 때마다 사병들은 짚더미처럼 쓰러졌다. 운 좋게 칼을 막으면 병장기와 함께 목숨이 부서졌다.
숨 몇 번 내쉬기 전에 황보길이 그토록 믿었던 사병들은 핏물 속의 고깃덩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주위를 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황보길은 무인끼리의 싸움이 이처럼 빨리 끝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열 명을 대적하는 도통달이 죽었다면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 주먹이 열 주먹을 이길 수 없다는 건 고래의 진리이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가 열을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죽여 버렸다. 그것도 일당백이라고 믿었던 사병들이 그렇게 시체로 변했다.
“이…… 이게 대체……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라!”
황보길은 좌우에 선 두 사병에게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삼십대 중반의 왼쪽 더벅머리와 우측의 대머리 중년인은 황보길이 가장 믿는 호위였다.
그리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개인 호위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더벅머리와 대머리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내 도통달에게 향했다.
더벅머리가 말했다.
“우린 이 집의 식객으로 있었던 죄밖에 없습니다.”
대머리가 더벅머리의 말을 받았다.
“삼황자 전하의 암살 시도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줄 알았다면 이 집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그리고 고수는 자기보다 훨씬 고수를 훨씬 잘 알아본다.
궁수를 처치했을 때와 방금 사병 열 명을 죽인 도통달의 무공은 그들 둘이 감당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병들보다야 몇 초 더 버틸 수는 있겠으나, 죽음이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놈들! 지금 와서 날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너희들한테 먹인 돈이 얼만데!”
두 사내는 황보길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대인께서 그런 무도한 일을 하는 걸 알았다면 여기 머물지 않았을 겁니다.”
“협객이 어찌 삼황자 전하 시해 같은 일에 휘말리겠습니까?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들이 막 몸을 날리려 할 때 도통달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동작 그만.”
음성은 낮았으나 말에 힘이 있는 것처럼 두 사내가 움찔 멈췄다.
“그동안 받은 돈이 있으면 그 돈값은 해야지.”
“그 말씀은…….”
“일단 그 대역무도한 놈부터 꿇려.”
도통달에게 덤비는 것도 아니고 황보길 무릎 꿇리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 이놈들! 정말 너희들이……. 어이쿠!”
오금을 차인 황보길은 앞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대머리가 그런 황보길의 머리칼을 잡아서 무릎을 꿇렸다.
가장 든든했던 호위가 단숨에 황보길의 무릎을 꺾는 몽둥이로 변해 버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세상인심과 비슷한 게 돈으로 부리는 사병이다.
“이 천하의 개만도 못한 놈들! 내 너희들을 반드시 잡아서 그 목을 잘라 버릴 것이야!”
최소한 지금은 도통달을 향한 분노보다 두 사내를 향한 그것이 더 컸다.
“황대인의 그 소원, 제가 들어드리지요.”
도통달의 그 말뜻을 새기기도 전에 칼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두 사내는 ‘어?’ 하는 표정으로 동시에 목이 잘렸다.
쭉 뿜어져 나온 그들의 피가 황보길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뜨끈한 피는 불처럼 치솟은 황보길의 분노를 단숨에 꺼뜨리고 그 자리에 공포를 심어 놓았다.
“어어…….”
선혈의 선명한 감촉과 왈칵 달려든 피 냄새에 겁먹은 황보길은 엉덩이를 바닥에 댄 체 발길질을 해댔다.
대청을 미끄러지던 황보길은 복도 벽에 부딪치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서두르지 않은 걸음을 옮긴 도통달이 아래턱을 덜덜 떨고 있는 황보길 바로 앞에서 멈췄다.
황보길은 얼굴에 묻은 피를 훔쳤다. 얼굴을 훑은 손이 턱을 통과하고 감았던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도통달의 얼굴이 보였다.
“허억!”
빙긋 웃는 저 하얀 얼굴이 저승사자의 면상보다 무서웠다. 도통달이 바란 것도 황보길의 공포였다.
두려움에 지배당한 자의 표정을 읽는 게 훨씬 쉽기 때문이다.
“황대인. 이쯤 되면 현실을 직시하셔야지. 황대인이 보낸 자객이 입을 열지 않았는데 금의위가 여기까지 왔겠소?”
“그…… 그럴 리가 없다! 소철음은 고문 따위에 입을 열……. 헙!”
엉겁결에 말을 하고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도통달이 들어야 할 말은 다 들었다.
“흠. 그자 이름이 소철음이었군요. 입이 무겁긴 무겁더군요. 하지만 못 듣는다고 알아낼 수 없는 건 아니라서.”
도통달은 품에서 황보길 집 구조를 그린 그림을 꺼냈다. 그림에는 스물두 개의 건물이 그려져 있었다.
“이 중에 소철음의 숙소가 어디요?”
도통달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비명은 끊임없이 들렸다. 황보길은 간절한 기대를 품고 도통달의 어깨 너머를 봤지만 그를 구하러 오는 사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망한 꿈을 꾸고 있구려.”
도통달은 그림을 황보길의 얼굴 앞에 놓았다.
“소철음의 거처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도통달은 그림의 한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요? 아니로군. 여기? 흠, 그도 아니면 여기?”
반응이 왔다.
“여기로군.”
황보길의 놀란 시선이 도통달에게 머물렀다. 도통달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지.”
그때 도통달의 뒤쪽 마당으로 여섯 명이 나타났다. 태준서를 비롯한 금의위 넷과 양수판, 사병들을 모두 처리한 황미달이었다.
“태조장님.”
주변의 시체를 둘러보던 태준서가 흠칫 놀라서 대답했다.
“네……!”
뭔가 적당한 호칭을 붙여야 하는데 옷만 금빛일 뿐 도통달은 금의위가 아니다. 그렇다고 관원도 아니다.
태준서가 아는 건 주형선의 총애와 양수판의 신뢰를 받는 귀한 몸이라는 것이다.
“하명하시지요. 대인.”
출세를 위해서라도 도통달 같은 사람에게는 잘 보여 두는 게 좋다.
도통달이 보여 준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가 삼황자 전하를 암살하려고 했던 자객의 거처요. 샅샅이 뒤지시오.”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이황자 친서의 존재는 아직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양수판이 말했다.
“내가 따라가지.”
양수판이 태준서를 데리고 마당에서 나가자 도통달의 시선은 다시 황보길에게 옮겨졌다.
“소철음이 가진 서신은 거처 어딘가에 있을 테고, 대인의 서신은 어디 있을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황자의 친서.”
황보길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친서의 존재까지 알았다면 모든 게 까발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철음 이놈이 전부 불었구나!’
도통달은 소철음이 얘길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소철음이 아니고서야 도통달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난 그런 거 모른다.”
무조건 우겨야 한다. 이황자의 친서만 발견되지 않으면 그의 권력과 돈, 인맥을 총동원해서 빠져나갈 수 있다. 최소한 가능성은 있었다.
도통달이 주저앉은 황보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백을 하는 데 당신의 입은 필요 없소. 난 그냥 보면 알거든. 당신 방이나 서재 어딘가에 있겠지.”
도통달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갔다.
‘없어?’
분명 손만 뻗으면 닿을 자리에 숨겨 뒀을 줄 알았는데. 그러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집에 없나? 그렇군. 있었는데 없군. 금의위가 쳐들어올 때 가지고 도망갔다는 거네. 누가? 당신이 가장 믿는 사람에게 맡겼을 테니 가족일 테고…… 딸? 아들? 부인? 부인이로군. 하긴 당신도 바보가 아니니 이럴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겠지.”
“나……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런 사실도 없고! 이황자 전하의 서신 같은 건 정말 모른다!”
마당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황미달이 말했다.
“부인이 도망쳤다면 잡으러 가야 하지 않나?”
“영감님, 아직 절 모르세요?”
“이미 대비를 해 놨나?”
“토끼는 굴을 두 개만 파지만 전 경우에 따라서 백 개도 파죠.”
다시 황보길과 얘기하는 도통달의 등을 보며 황미달은 소름이 이는 것을 느꼈다.
무공이 강한 자는 두렵지 않다. 그자보다 더 강하면 되니까. 더 강할 자신도 있으니까.
하지만 도통달 같은 녀석이 적이 되면 두려울 것 같았다.
‘다행히 머리 좋은 수란이가 있으니까.’
하수란을 떠올리고 안도하려다가 ‘젠장!’ 욕설을 뱉었다. 하수란까지 도통달 편이다.
도통달에게 검을 겨누라고 그녀에게 시키면, 북사도련 군사 관두고 가출해 버릴 게 분명하다.
황미달이 ‘저놈 패는 건 좀 생각해 봐야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셋.’
하나같이 경공이 빠르고 가볍다. 그 움직임만으로 다가오는 세 명이 황미달을 긴장시킬 정도의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 사람이 담을 넘어 나타났다.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 황미련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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