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독식 (184)
도통달이 연주양을 보며 물었다.
“그건 연전장문인께 물어보시죠.”
지목을 당한 연주양이 펄쩍 뛰었다.
“영약이라니! 내가 그런 걸 어찌 안단 말이냐!”
“화산과 종남 제자가 원씨상단 장주 부인을 강간한 사건은요?”
순간 연주양의 말문이 막혔다. 연주양의 그 표정은 독심술법을 익히지 않았고 해도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주양, 자네 아는 게 있나?”
방시보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연주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내가 어찌 알겠나?”
백소구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무리 은거를 하셨더라도 요즘 무림을 흔들고 있는 암중세력에 대해서는 들어 봤을 거요.”
시체가 아니니 당연히 들어봤다.
“그들의 이름은 복수회고 원씨상단이 그들의 전신이오.”
“뭐…… 뭐라고?”
“십팔 년 전 화산과 종남이 뿌린 악의 씨가 지금 무림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그 말이오.”
“우린 정당한 응징을 했을 뿐이네!”
“방선배가 알고 있는 사실이 거짓이라면요!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저지른 죄를 덮기 위해! 영약이 탐나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화산과 종남은 구대문파다! 정과 협을 목숨처럼 여기는 구대문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더 이상 우릴 모욕하지 마라!”
백소구는 연주양을 봤다.
“연선배께서도 똑같이 말해 보시죠.”
하지만 연주양은 인상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양, 뭐라고 얘길 해 보게. 저 헛소리를 듣고만 있을 텐가?”
“난…… 난…….”
“그때 화산과 종남이 저지른 일 때문에 지금까지 수십, 수백 명의 무고한 무림인이 고통을 받았고 어쩌면 앞으로 수백, 수천 명이 죽어 나갈 수도 있소이다.”
분노에 갇혀 있던 방시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며들었다.
“지금…… 백방주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 정말 그러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연주양은 가까이 있는 의자를 끌어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영약은 정말 몰랐네. 그런 게 있다는 얘기는 듣지도 못했어. 난…… 난…….”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원씨상단 장주의 부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사실을 알고 계셨군요.”
푹 숙여진 연주양의 뒤통수로 방시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저 말이 사실인가? 원씨상단의 장남이 우리 제자를 강간한 게 아니라, 화산과 종남의 제자들이 원씨상단 장주의 부인을 강간 살인한 게 사실이야? 주양! 말해 보게! 대답하라고!”
“어쩔 수 없었네. 그 사실이 알려지면 화산과 종남을 무림에서 뭐라고 하겠나? 구대문파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정파의 정기까지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네. 우리가 협을 행해도 사파들은 위선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 어쩔 수 없었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비난이 두려워서 무고한 한 집안을 멸문시키다니! 악귀나 할 짓을 어찌…… 어찌 화산과 종남이 했단 말인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외침을 토한 방시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의 어깨는 한없이 처져서 땅속을 파고들 것 같았다.
“난 그저 응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응징이 과했다고 그런 자책만 하며 살았는데…… 화산파의 영령들을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갑자기 방시보가 주먹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방시보의 행동에 예기치 못한 백소구와 연주양은 몸만 움찔 떨었다.
재빨리 움직인 사람은 도통달이었다. 방시보의 온몸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에 혹시 몰라 준비하고 있었다.
관자놀이와 주먹 사이에 도통달의 손바닥이 파고들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났지만 도통달의 손바닥이 때린 것으로 충격은 크지 않았다.
“선배! 이게 무슨 짓이오!”
“방해하지 말게! 내가 무슨 낯으로 살아! 무고한 사람들을 그리 많이 죽였는데 부끄러워서 어찌 숨을 쉰단 말인가!”
“부끄럽다고요! 그래서 무책임하게 죽으면 또 살아남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텐데요!”
백소구는 고개를 푹 숙인 방시보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한동안 이어진 무거운 침묵이 방시보를 다소 진정시켰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난 죽음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네.”
“결자해지라고 했잖소.”
“그래야지.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수습해야지. 하지만 이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방시보는 그 잠깐 사이에 백 살 노인처럼 변해 버렸다.
“사실 이 모든 걸 밝힌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친구요.”
방시보와 연주양의 시선이 도통달에게 모아졌다.
“복수회의 음모로 인해 일어날 뻔한 정사대전을 막은 것도 도당주고.”
도통달이 말했다.
“두 분께서는 복수회와의 일을 해결할 의지가 있으십니까?”
“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지.”
치욕 때문에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려고 했으니 방시보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도통달의 시선을 받은 연주양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동안 마음이 편했던 날이 하루도 없었네.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이었지.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리해야지. 하지만 시보 말대로 우린 이제 힘이 없어. 전대장문인에게 무슨 힘이 있겠나?”
장문인 직에서 물러나고 다음 대 장문인의 장악력이 뛰어나다면, 전대 장문인은 명예밖에 남지 않는다.
“두 분은 그저 원씨상단의 멸문에 대한 진실만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우리 입으로 사문에 먹칠을 하라는 건가? 그건…… 그건…….”
종남파의 체면 때문에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데, 지금에 와서 스스로 그걸 밝히라는 건 죽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도통달이 연주양의 결정을 도와주었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비밀은 잘 지켜졌으니…….”
“그건 영감님 생각이고요.”
도통달의 ‘영감님’이라는 호칭에 방시보와 연주양이 ‘응?’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도통달의 말이 이어졌다.
“당사자인 복수회, 우리 정협문, 개방에 북사도련까지. 영감님들이 아무리 입을 다물어도 그날의 만행은 시체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조금 있으면 무림 전체로 악취가 번지겠죠.”
만약 이 일이 무림에 알려지면 화산파와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 밀려날 게 분명하다.
구대문파는 고정된 게 아니었다. 종남파만 해도 팔십 년 전 아미파를 밀어내고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반면 화산파는 단 한 번도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소림, 무당과 함께 구대문파를 떠받치는 세 기둥 중 하나가 화산이었다.
“그건 안 되네. 절대 안 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화산파가 그런 치욕을 겪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진실은 죽음으로도 막을 수 없죠. 하지만 가끔 진실이 진실을 덮어 줄 수는 있습니다.”
방시보의 떨리는 시선이 도통달에게 향했다.
“바…… 방법이 있는가? 이 늙은 목숨은 백 번 거둬 가도 좋으니 제발 화산의 치욕만은…… 그건 안 되네.”
도통달은 종이와 먹, 붓을 식탁에 놓았다.
“그날 혈사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여기 적으세요. 아무리 총기가 떨어졌어도 그걸 잊지는 않았겠죠.”
“내게 제자들을 배신하라는 말인가?”
“자파의 명예를 위해, 공청석유와 삼엽구지초가 탐이 나서 무고한 사람들 수십 명을 죽인 자들이오. 내막을 알았든 몰랐든 영감님은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고. 거기에 이름을 적지 않으면 장담하건대 화산과 종남은 원씨상단의 길을 걸을 겁니다.”
종남과 화산의 만행이 알려진다면 누가 두 문파의 제자가 되려 하겠는가? 현재 있는 제자들은 문을 떠날 테고, 새로운 제자는 들어오지 않을 테니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에 방시보와 연주양은 붓을 들었다. 개방과 북사도련이 밝혀낸 이름도 있었고, 새로운 이름도 하얀 종이에 채워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진실을 적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린 도통달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두 분이 마지막으로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 * *
“응? 통달이 이 친구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주형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받은 서신은 도통달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서신의 내용이 이상했다.
“태자전하 납시오!”
하얗게 상복을 입은 열두 명의 사람들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양수판은 황급히 한쪽으로 비켜서 허리를 숙였다.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올랐지만 그런 때일수록 매사에 몸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양수판은 현명했다.
“어? 양도사 아니오.”
“태자전하를 뵈옵니다.”
“우리 사이에 과례는 관둡시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시오?”
“마침 태자전하를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통달이에게 이상한 서신을 받았습니다.”
“통달이 그 친구한테?”
이제 곧 황제가 될 주형선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친구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무슨 내용인지 내가 알아도 되겠소?”
“그게…… 보름 후에 모처로 금의위 열 명만 데리고 와 달라고 하는데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양도어사와 금의위라면 황궁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함 같은데.”
“통달이가 흑사회 건달일 때 이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싸움의 증인 같은 것이었죠.”
“싸움 구경이로군요. 재밌겠군요.”
삼황자 신분이기만 해도 당장 따라갔을 것이다.
“다녀오시오. 통달이 부탁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 금의위도 열 명이 아니라 오십…… 아니, 한 백 명쯤 데려가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기회에 통달이 체면 좀 살려 줘야죠. 그동안 우리가 받은 게 얼만데.”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 * *
백소구와 방시보, 연주양은 화산과 종남으로 갔고 도통달은 복수회로 향했다.
회주가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원중방이 나타나서 계획이 간결하게 변했다.
도통달은 먼저 원씨상단 멸문에 책임이 있는 자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회주님의 원수들입니다.”
원중방이 이름을 쭉 봤다.
“처음 보는 이름도 있군.”
“화산과 종남의 전대 장문인이 작성한 거니 틀림없을 겁니다.”
원중방이 놀랐다.
“그자들이 제자들을 넘겼단 말인가?”
“죄가 있는 제자들과 문파의 존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으니까요.”
“자넨 협박에도 재주가 있는 모양이군.”
“건달인데 당연하죠.”
“그런데 이 이름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이자들이 현재의 화산이고 종남인데.”
장문인에서부터 장로까지 양파 합쳐서 스물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중 다섯 명은 문을 떠나서 현재 두 문파에 남은 사람은 합이 스무 명이었다.
“이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겠습니다. 복수회도 그에 상응하는 인물을 추려 주시죠.”
“그게 무슨 말인가?”
“생사결이죠. 일대일도 좋고 단체로 붙어도 좋고 원한 있는 사람들끼리 싸울 기회를 마련해드리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야! 그동안 쌓인 원한이 얼마고 죽은 사람이 몇인데!”
“그렇죠. 실타래가 너무 엉켜서 풀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죠. 이렇게 되었으니 단칼에 끊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이자들에게 우리가 그동안 느꼈던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지. 이처럼 간단하게는 안 돼.”
“원수는 갚게 하겠다. 단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저와의 내기에서 졌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드리죠. 만약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건 회주님의 자유입니다. 그 후과도 회주님이 감당해야 하고요.”
원중방은 종이에 쓰인 이름 하나, 하나를 곱씹었다. 이자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상상을 하며 지샌 밤이 천 일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끝낸다고? 그리고 자칫하다가는 원수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이런 방식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도통달이 적이 되면 어떤 식으로든 원수를 갚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번 싸움에서 복수회가 이기면 화산과 종남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