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연독식-196화 (196/200)

기연독식 (196)

글자를 더듬던 도통달은 손바닥으로 벽을 때렸다. ‘줘! 달란 말이야!’라고 외친 목소리는 어눌한 음성으로만 튀어나왔다.

아마 바위의 날카로운 부분에 손바닥이 찢겼을 것이다. 날카로운 고통은 아주 찰나지만 도통달을 미로의 담 너머로 살짝 들어 올려 주었다.

‘내가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 뒤로 다시 글자를 갈구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도통달은 순간적으로 그 감정을 밀어내고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당장 벽으로 달려가 글자를 달라고 두드리고 싶었으나, 그 비이성적인 감정을 억지로 쳐내며 벽에서 멀어졌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물웅덩이로 빠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도통달의 정신을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꼬르륵…… 꼬르륵…….

몇 모금의 물이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도통달은 억지로 팔다리를 움직여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단순한 동작인데도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겨우 물 밖으로 나온 도통달은 바닥에 엎드려 거친 숨을 뿜어냈다. 이미 한 번 죽었고 환생한 후에도 몇 번 생사를 넘나들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깝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해괴한…… 후아―! 후아―!”

숨은 가쁘고 힘은 하나도 없었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을 때 몸 상태가 이랬던 것 같다.

“이거…… 배고픈 거 맞지?”

허기가 너무 심하면 오히려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도통달은 앉아 있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온기를 뿜어내는 그 자리에는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저건 대체 뭘까?’

세상에 아무리 신기한 일이 많다지만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이름은 우화등선동이지만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는 괴이한 공간이었다.

억지로 일어서는 도통달의 다리는 후들거려서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어도 헤엄칠 기운이 없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일단 요기부터 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린 도통달은 왼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분명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힘겹게 네 걸음째를 옮겼을 때 도통달은 쌓여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 식량이었다. 하루에 한 번 천두봉이 던져 놓은 식량이 저리 높게 쌓인 것이다.

도통달은 주변에 모여든 벌레를 쫓으며 보자기의 개수를 헤아렸다.

“열다섯 개?”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보자기의 숫자는 그가 보름이나 우화등선동에 있었다는 걸 말한다.

보름이라니! 길어야 반 시진. 누군가 박박 우기면 거기서 반 시진 정도는 더 늘려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도통달의 생체 시간은 길어야 한 시진인데 증거는 보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린 옷을 벗은 도통달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말랐다. 나름 살도 있고 근육도 튼실했던 도통달의 몸은, 십 년 병상에 누운 노인의 그것처럼 말라 있었다.

“내가 정말 보름이나 앉아 있었다고?”

도통달은 앉아 있던 곳과 글자가 있는 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왜 한무 아버지가 이곳을 나가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통달도 벽을 때리다가 상처를 얻지 않았다면, 그래서 찰나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쌓여 있던 그 뼈다귀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씨X, 있을 곳이 못 되네.”

도통달은 일단 이 허기부터 면하기로 했다. 맨 위쪽의 보자기를 펴자 닭고기의 기름 냄새가 확 달려들었다.

그 자리에서 밥과 나물, 닭 한 마리를 다 먹었고, 그런 보자기 네 개를 더 비웠다. 나흘 치 식사를 한 번에 해치운 것이다.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닷새 전 것은 상했을 수도 있으니까. 꺼억―!”

거하게 트림까지 토해 내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차가운 물까지 마셔서 허기를 완전히 면한 도통달은 일단 운기조식부터 했다.

물론 저 끔찍한 열좌대(그렇게 이름붙이기로 했다.)는 피해서 앉았다.

단전에서 공력을 일으키자마자 알았다. 내공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응?’

원래 내공을 일으키면 은은한 열기가 수반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기운은 은은한 정도가 아니라, 기름을 부은 집채만 한 장작에 불을 당긴 것 같았다.

도통달은 폭주하는 열기를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조금이라도 놓치면 사지경맥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 것처럼 뜨겁고 사나웠다.

‘소운진원 백석이영, 설지만후 나원장령…….’

도통달은 필사적으로 원형무상공의 구결을 되뇌며 진기를 정해진 길로 보내려고 애를 썼다.

열기를 품은 진기가 너무 폭주해서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천을 하고 이주천을 하고 삼주천을 마치자 비로소 진기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열기는 그대로였지만 그렇다고 몸에 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도통달을 보호하는 느낌이었다.

“후우―!”

긴 숨을 뿜은 도통달은 눈을 뜨자마자 물로 뛰어들었다. 나른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사지백해로 퍼졌다.

도통달은 물속에서 열화대와 글자 벽을 한눈에 뒀다. 저 둘은 분명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도통달의 내공은 이전보다 훨씬 정순해졌다. 내공이 높아진 게 아니라 깨끗해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은 내공과 도통달처럼 갑작스럽게 얻은 내공은 기초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일 갑자의 내공이라도 돌덩이를 우르르 부어 넣은 것보다,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아 올린 내공이 튼튼한 건 당연했다.

그래서 영약을 먹은 후 육 갑자가 넘는 내공을 가졌지만 그걸 온전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열기가 임독양맥과 세맥의 나쁜 기운을 모두 태워 버리고 내공의 빈틈을 꽉 채워 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화섭자를 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화섭자를 켰을 때보다 주변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름은 괜히 붙여지는 게 아니다. 여기가 우화등선동이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목숨 걸고 이걸 알아볼 이유가 있느냐는 것인데.”

다시 한 번 열화대 위에서 글자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걸 견뎌 낼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으니 선뜻 열화대 위에 앉을 수도 없었다.

“X발, 뭐 하는 거냐? 건달이 이 정도 배짱도 없으면 뭐에 써!”

목숨이 아까워 덜덜 떨다가 도망치듯 동굴을 나가면 궁금해서 죽거나 쪽팔려서 뒈질 것 같았다.

기력을 회복한 도통달은 큰 숨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열화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단 가장 먼저 할 건 벽의 글자를 안 보는 것이다. 몸을 관통한 이상한 느낌 때문에 엉겁결에 눈을 뜨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예 천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진기를 끌어 올려 원형무상공을 운용하자 또 그 느낌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건 도통달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눈이 떠졌다. 다행히 눈을 가려 놨기 때문에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글자가 아예 영향을 안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벽의 글자들이 눈이 아니라 뇌로 바로 파고드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눈을 가렸고 도통달이 마음을 단단히 먹어서 의지를 다진 덕분이었다. 어쩌면 내공의 기초가 탄탄해져서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모든 조화가 도통달로 하여금 정신줄을 붙잡도록 도와주었다.

도통달의 입에서는 의지와 관계없이 서른여섯 글자가 쉼 없이 튀어나왔다. 멈추고 싶지 않은 청량함도 그대로였다.

도통달은 그 상태에서 원형무상공을 운용했다. 입으로는 다른 글자를 뱉으면서 머리로는 원형무상공의 구결을 뇌까리는데 이상하게 엉키지가 않았다.

벽의 글자 서른여섯 개가 원형무상공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도통달은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상관하지 않았다.

육체는 청량함을 품은 쾌감이 계속되었기에 운공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파고들던 글자가 사라졌던 것처럼 뇌로 들어오던 글자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안 돼!”

도통달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벽을 향해 뛰어갔다. 눈을 가렸는데도 벽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벽을 열 번은 치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친 도통달은 쓰고 있는 안대를 벗었다.

글자가 쏟아져 들어올까 봐 잔뜩 긴장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통달은 식량이 쌓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제법 수북했다. 식량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려던 도통달은 다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너무 굶어서 허기가 졌고 목구멍이 갈라진 것 같은 갈증이 찾아왔다. 도통달은 갈증부터 해결하기 위해 물웅덩이로 가다가 뒤늦게 악취를 느꼈다.

“이게 뭐야?”

그의 피부에 노란 진물 같은 게 아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아마 땀구멍을 통해 빠져나온 신체의 불순물일 것이다.

옷을 벗은 도통달은 그대로 물로 뛰어들었다. 갈증을 해결하고 몸까지 깨끗하게 씻은 도통달은 쌓인 식량으로 또 보름이 지났다는 걸 알았다.

보름 동안 곡기를 끊는 건 가능하다. 몸이 축나기는 하겠지만 할 수 있다. 하지만 물까지 마시지 않는다면 탈수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통달은 보름을 견뎠다. 도통달이 가진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환생도 했는데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거지.”

풀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끙끙거리는 건 도통달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으면 그만이다.

열화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운기를 해 봤다. 내공이 늘지는 않았다. 그런데 더 단단해졌다.

이 전에는 차곡차곡 쌓인 벽돌 같았다면 이번에는 그 벽돌을 압축해서 다져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경혈에 느껴지는 화기도 좀 더 뜨거웠다. 분명 뜨거웠는데 처음보다 견디기는 쉬웠다. 그의 몸이 적응한 모양이다.

다시 하루를 정양한 도통달은 열화대에 앉았다. 언제까지 이런 현상이 지속될지, 그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 * *

쇠로 만든 젓가락은 촛불 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는 예기 정향의 얼굴은 점점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지금이라도 벗는 게 어떠냐?”

관복을 입은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정향은 두려움 가득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예기지 창기가 아닙니다.”

“미친년. 기루에 있으면 다 기녀지, 예기니 창기니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관복 사내는 정향의 볼을 잡고 뜨겁게 달아오른 젓가락을 그녀 눈으로 가져갔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삼십 대 초반의 관복 사내는 초면이었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다.

“지금은 각사원외랑에 불과해서 잘 모르겠지만 몇 달 안에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관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도 있어. 그러니 선택해라. 옷을 벗겠느냐, 봉사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겠느냐?”

젓가락이 점점 눈으로 가까워지자 정향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로 밀려드는 뜨거움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옷을 벗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올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연향정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루…… 루주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울음 멈춰라. 연향정의 예기가 고작 이따위 협박에 눈물을 흘리다니.”

연자연의 말에 정향은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연자연이 관복 사내에게 물었다.

“각사원외랑이라고 하셨는데 함자를 물어도 될까요?”

“오! 연향정에는 미인이 길거리의 돌멩이보다 흔하다고 하더니, 루주부터 남다르군. 내 이름을 물었느냐? 각사원외랑 벽창우다. 내 아버님은…….”

연자연이 벽창우의 말을 끊었다.

“각사원외랑님의 가문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을 텐데?”

“고관대작 중에 벽씨라면 어디 보자…… 예부상서 벽우방 대인과 어떤 사이신지요?”

“오호! 내 아버님의 함자를 아는구나? 연향정이 북경제일기루라고 하더니 역시.”

“연향정이 북경제일기루라는 소문만 들었고 다른 소문은 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이년과는 흥이 떨어졌으니 루주 네가 오늘 내 시중을 들어라.”

벽창우가 정향을 밀쳐 넘어뜨린 후 연자연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누가 행패를 부린다면서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