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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저택에 취직했습니다-60화 (60/150)

60화

“그렇군요. 저도 곧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하이엔 양은 루이션의 황제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십니까?”

“아뇨. 잘 몰라요. 그냥……. 좀 짓궂으신 분이란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하.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정치적 수완은 좋으시지만 조금 특이한 면이 있으시다죠.”

그가 둥글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는 길에 황실의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것을 봤습니다. 한데 어째서 장미꽃이 한가득 심어져 있는 겁니까? 루이션 황가를 상징하는 꽃이 장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 그건 황후께서 장미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황제께서 국혼 때 황후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멋진 이야기로군요.”

그는 그렇게 대꾸하며 곧바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단정하게 꾸며진 표정이 그대로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익숙한 영웅의 모습이 비쳐 보일 것도 같았다.

“로라.”

그때,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아보니 어느새 소후작이 내 뒤로 성큼 다가서 있었다.

“크렌타리온 후작 아닙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내 앞으로 한 걸음 앞서 나가더니 다일런 경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다일런 경의 시선 또한 그에게로 옮겨 갔다.

“예. 오랜만입니다. 카르센 경.”

“재작년에 제가 크렌티스로 갔을 때 이후 처음인 것 같군요……. 그런데 하이엔 양과는 아는 사이입니까?”

“예. 그래서 인사를 좀 나눴습니다. 그 전에 상황극도 했고 말입니다.”

다일런 경이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앞뒤 설명 없는 ‘상황극’이란 말에 소후작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설명을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다일런 경은 그저 입꼬리를 깊게 패며 웃더니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제 일행도 오셨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다일런 경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소후작이 그가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내게 물었다.

“공작님을 따라 크렌티스에 갔을 때, 연회장에서 처음 만났었어요.”

“그럼 상황극은 뭔가요?”

“사실 조금 전, 몇몇 영애들에게 시비가 걸렸었거든요. 그런데 크렌타리온 후작님이 상황극 비슷한 거로…… 저를 좀 도와주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괜찮아요? 로라?”

“네. 별일 아니었어요. 정말로요.”

“……그럼. 다행이군요.”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네요. 크렌타리온 경은. 좀 영악하기도 하고…….”

“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짧은 의문을 내뱉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소후작 또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크든 작든 상대에게 빚을 만들어 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

“그래서 로라를 도와줬다는 언급을 해 둔 것 같네요. 제가 로라의 일이라면 고마워할 걸 눈치챘나 보죠.”

가벼운 농담처럼 소후작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그가 별스럽지도 않다는 듯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참. 일리아제는 좀 늦을 듯해요. 황제 폐하께 붙잡혀 있거든요. 할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그렇구나. 그럼 많이 늦으시려나요?”

“아마도요. 폐하께 붙잡히면 확실히 늘어지긴 하거든요.”

“꽤 기다려야겠네요.”

“음……. 아뇨. 로라. 그보단 차라리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우리끼리라도 황실의 계보를 찾으러 가는 게 어때요? 황실 도서관은 황가를 제외하곤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그래서 빨리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이용 시간이 제한 된다라. 그건 좀 곤란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꼭 얻어 가고 싶었다.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우리는 연회장을 나와 복도 길을 따라 걸었다. 황성이 크고 넓은 만큼 복도 또한 크고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의 한 모퉁이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루이션을 상징하는 금빛 드래곤을 조형으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모양이었다.

근사하네…….

나는 그것을 흘깃 쳐다보다 다시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한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는 소후작의 모습이 시야에 걸렸다.

문득 공작이 마차에서 했던 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루이션의 건국 신화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했던가…….

그럼 소후작님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으려나?

“소후작님.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를 믿으세요?”

나는 소후작의 옆으로 성큼 붙어서며 그에게 물었다.

“뭐……. 신화는 신화죠. 거짓이나 과장이 없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가 대답했다.

“그럼 드래곤의 핏줄이 황가에 이어지고 있다는 건요? 그건 거짓일까요?”

“어릴 적 일리아제가 했던 이야기네요. 황가와 드래곤에 대한 거요. 하지만 저는 그게 아주 거짓일 거 같진 않아요.”

“왜요?”

“역사적 기록 때문이죠. 루이션은 건국 초에 어마어마한 발전을 했어요. 아주 단기간에 말이에요. 그게 무언가 거대한 개입이 없었다면 말이 안 되거든요. 드래곤이든, 아님 드래곤으로 상징되는 무엇이든 뭔가 있긴 했을 거라 생각해요.”

“드래곤으로 상징되는 뭔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네. 일단 저는 그렇게 믿어요. 하지만 사실 그 당시를 살아 본 것도 아니니 명확히 알 순 없죠. 과거를 훔쳐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다 왔어요. 바로 여기.”

그가 곧 걸음을 멈추더니 복도 벽에 붙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내 도서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소후작의 안내에 따라 그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하게 빠진 공간이 펼쳐졌다. 예상은 했었지만, 황실 도서관의 규모는 절로 감탄할 만큼 어마어마해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책을 죄다 모아 놓은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대로 황실 계보가 꽂혀 있을 책장을 찾아갔다. 그러곤 드래곤 문양이 찍혀 있는 묵직한 책을 끄집어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두껍네요.”

“황가의 역사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도 정리가 잘되어 있으니 금방 찾을 순 있을 거예요.”

그의 말대로 황녀의 후보를 찾아내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션처럼 금발에 금안을 가졌다고 기록된 황녀가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총 스무 명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너무 어릴 때 죽은 이와 이름에 션이 들어가지 않은 이들까지 제외하자 다섯 명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나머지는 황실 초상화를 통해 추려 내면 되겠어요. 초상화를 모아 두는 방은 황궁의 가장 안쪽에 있어요. 관리하는 사용인을 제외하고 황가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일전에 제가 말했듯 둘째 황자에게 부탁만 하면 아마 들여보내 줄 겁니다.”

“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겠네요. 사실 연회가 이뤄지는 내내 바쁘게 움직여야만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러게요. 금발 금안을 동시에 가진 황녀가 적어서 다행이군요.”

소후작이 다섯 명의 황녀의 이름을 종이 위로 써 내리며 대답했다. 그러곤 그것을 두어 번 접어 자신의 제복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만 갈까요? 연회가 한창이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연회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홀의 가장자리를 따라 연회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그러다 곧 멀찌감치에서 덩그러니 서 있는 공작의 모습을 발견했다. 키가 큰 덕분인지 그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어 보였다.

“공작님.”

나는 그를 부르며 그에게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런데 겨우 두어 걸음 앞두고 멈칫 멈춰 서고 말았다. 그의 옆에 조금 특이한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장무도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그 가면이 화려하고 예쁘기까지 했다.

“자네가 공작의 비서인가 보군!”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러곤 그대로 가면을 벗어 버렸다.

엇. 엄청 잘생겼어!

가면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또렷한 이목구비가 특징적이었고, 또 아름다웠다. 화려한 가면보다 차라리 더 눈부실 정도였다.

그나저나 누구지?

돌이켜 보면 그는 공작에게 존칭을 붙이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이 나라에 그리 많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로라,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때, 소후작이 내 뒤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그렇다면 황족밖엔 없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됐네. 됐어. 내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을 쓰고 있는 거라서.”

그가 한 손으론 손사래를 치며 다른 쪽 손으론 다시금 가면을 썼다.

그 모습에 나는 순간 ‘정체를 숨기고 있다기엔 너무 눈에 띄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황제께선 특이하다는 평을 많이 받으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직접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했다.

“폐하. 제이션 황자님께선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인사드리고 싶은데 보이질 않아서 말입니다.”

소후작이 불쑥 끼어들어 그에게 물었다.

“글쎄. 그 애는 워낙 활달한 아이지 않나. 아마 제 친우들이랑 어울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테지.”

황제가 대답했다.

“한데 자네는 어쩌다 공작가에 들어가게 됐나?”

그러더니 곧 나를 돌아봤다.

“작년 겨울쯤에 공작가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공작은 좋은 상관이던가? 그리고 저 친구는 대체 하루 몇 시간을 일 하나?”

“아. 그것이…….”

갑작스러운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대답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황제 폐하가 아닌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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