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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저택에 취직했습니다-75화 (75/150)

75화

“고마워. 유용할 것 같네.”

공작이 물통을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저기, 공작님!”

어디선가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목소리의 주인이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우리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귀여운 인상이 특징적인 어린 아가씨였다.

“무슨 일이지요?”

공작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이거…… 공작님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그녀는 공작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푸른 장미가 수놓아진 깨끗한 손수건이었다. 보아하니 직접 만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정성과 시간을 쏟은 물건을 선물하는 의도야 뻔했다. 눈앞의 여자는 공작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수줍게 얼굴까지 붉히고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공작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미안한 감정조차 묻어나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꽤나 매몰차게 느껴지는 거절이기도 했다.

“저는…… 커버스할덴 공작님이 받아 주셨으면 하는걸요.”

“제 안전은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다른 분께 드리세요.”

“제,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뭘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받아 주시기만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그러나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돌아봤을 뿐이다.

“그만 가지, 로라. 사냥제도 곧 시작할 거야.”

“아…… 네……!”

그는 곧 내가 들고 있던 짐 꾸러미를 뺏어 말 안장 위로 올렸다. 덕분에 내 손은 한순간에 텅 비어 버렸다.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양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문득, 여자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는 잔뜩 날이 선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뭐야? 내가 뭘 했다고 날 노려봐? 공작님을 탓할 순 없으니 만만한 나한테 저러나 보네.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보다 높은 신분일 그녀에게 무어라 시비를 걸 순 없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냐는 듯, 눈만 동그랗게 떠 보였다.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곧바로 사납게 구겨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내 행동이 오히려 화를 돋운 것 같았다.

“빨리 와.”

그러는 사이, 먼저 앞서나간 공작이 나를 불렀다. 나는 후다닥 그에게로 다가섰다. 물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뒤통수가 뚫릴 듯한 시선이 오롯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성문으로 향했다. 나는 공작과 나란히 걸으며 슬쩍 그를 곁눈질해 봤다. 그의 옆얼굴이 유려한 선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정말이지 한눈에 보기에도 잘생겼다. 누구든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아마 조금 전에 본 아가씨도 마찬가지일 테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녀를 경쟁자처럼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나 또한 공작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당연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굳이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 혼란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애써 머릿속을 비워 내며 발걸음을 재촉해 나갔다.

그렇게 공터를 완전히 빠져나와 정원 가장자리를 지나자 곧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엔 이미 대회 참여자들이 몰려든 채였다. 총과 활을 점검하는 그들의 얼굴에선 진중한 표정이 묻어 나왔다. 동물 한 마리만 잡을 거라고 말했던 공작과는 달리 그들은 꽤나 열심히 사냥에 임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공작님.”

그때, 누군가가 공작을 부르며 다가왔다. 이번엔 또 다른 아가씨였다. 그녀는 수줍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손수건을 건넸다. 그렇다.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손수건이었다.

어라? 원래 고백하는 데엔 직접 만든 손수건을 주는 게 이 나라의 관례였던가?

나는 아가씨들의 통일된 고백법이 내심 의아해졌다. 심지어 그녀의 등 뒤론 몇몇 여성이 손수건을 손에 쥐고선 줄줄이 서성대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이게 고위 귀족들의 문화인 건가……? 난 그런 거 모르는데…….

어쨌든 그런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다소 난감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조용히 말 위에 올라가 있던 내 짐을 내리곤 자리에서 물러 나갔다. 그러곤 열과 행을 맞춰 서 있는 기사들을 지나 정원 쪽으로 되돌아 가려고 했다.

“로라.”

그런데 일순,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고개를 돌아보자 하얀 말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소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소후작님.”

“안녕, 로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일리아제를 따라왔나 봐요?”

“네. 맞아요. 소후작님도 사냥제에 참석하셨네요.”

“그렇죠. 뭐. 황제께서 저와 사냥하는 걸 워낙 좋아하시거든요. 그래서 웬만하면 매해 참석하고 있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러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로라. 혹시 나한텐 뭐 줄 거 없어요? 안전한 귀환을 기원하는 물건이라든가?”

그러더니 턱을 쓸며 말을 이어 갔다. 안전을 기원한다라……. 그러고 보니 하얀 피부의 어린 아가씨도 공작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굳이 손수건을 선물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으음……. 혹시 손수건 말인가요?”

“네. 제 것도 있어요?”

역시나……! 그러니까 손수건을 건네는 행동 자체는 고백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모르는 사냥제의 문화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몰랐다. 아니, 애초에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 그게요……. 저는 지금 알았어요. 사냥제에 나가는 분들에게 손수건 주는 관습 같은 게 있다는 걸 말이에요. 알았으면 미리 준비했을 텐데…….”

“음…… 그래요? 그럼…… 엘리제도 못 받았겠네.”

“네. 저, 대신 다른 건 있어요. 얼음을 꽉 채운 물통 가져가세요. 수건도 있고, 아! ……말한테 각설탕 좀 줄까요?”

“하하. 그래요. 그런데 이 녀석은 사나워서 제가 줄게요. 이리 줘 봐요.”

소후작이 날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 위로 각설탕 몇 개를 올려 주자 그는 그것을 하나하나 말에게 먹여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수건이 어째서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들어선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으음. 사실 저도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진 잘 몰라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이런 관습이 있었거든요. 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들었어요. 옛날부터 손수건을 받지 못한 기사는 꼭 다쳐서 돌아오곤 했대요.”

“정말요? 그거 엄청 불길한 우연인데요.”

“그렇죠? 그래서 사냥제가 시작되면 고급 면 손수건이 엄청 잘 팔린대요. 거기에 수를 놓아서 참가자들에게 전해 줘야 할 테니까요.”

“그렇구나……. 그럼, 소후작님은 손수건 많이 받으셨어요?”

“저요? 저는……”

당연히 많이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물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를 고민하듯, 느리게 말끝을 끌었을 뿐이다.

“……저는 하나도 못 받았네요. 이러다 다쳐서 돌아오면 어쩌죠?”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이야기가 그러했다. 거짓말일 게 뻔한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후작은 누가 봐도 인기가 많을 사람이지 않은가?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됐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잔뜩 의심스럽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소후작은 그런 날 향해 빙긋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자신의 거짓말이 관통된 상황 속에서도 달리 동요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많이 다치진 마세요. 오늘 더울 것 같던데, 시원한 물도 가져가시고요.”

그에 나도 적당히 말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곤 짐 꾸러미에서 물통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소후작이 그것을 받아 품 안에 넣으며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건 곧 사냥제가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이제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전 이만 물러나 볼게요.”

나는 소후작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더니, 말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래요. 저도 이만 폐하께 가 봐야겠네요.”

그 후, 나는 소후작과 헤어져 성문 앞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황태자의 생신 연회에서 나를 핍박했던 삼총사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모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들과는 마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후다닥 발걸음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의 새된 목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어머, 공작님의 비서분이시군요. 빨간 머리라 그런가 엄청 눈에 띄시네~”

하필이면 ‘공작의 비서’와 ‘빨간 머리’를 집어내다니,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 게 뻔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친하지도 않은 나를 굳이 알은척하는 저들의 저의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냥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사냥제 동안 다시 보게 될 얼굴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에요. 비서 양. 그나저나 궁 안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나요?”

“네. 그런데요?”

“어머……. 그동안 예절 공부라도 하셨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부족하시네요. 하긴 뭐…… 어쩔 수 없겠죠.”

하……. 또 이런 패턴이구나! 게다가 이번에도 로맨스 소설 악역 같은 대사를!

가만히 있는데도 시비가 털리는 상황에 제법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말에 일일이 분노하고 싶진 않았다.

“왜 그러시죠?”

그래서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자 대충 조류를 닮은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먼저 입을 뗐다.

“기사님들이 모두 성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들어가는 게 예의예요.”

“세상에! 정말 몰랐어요? 하긴 어떻게 알겠어요. 비서 일을 하고서야 겨우 사냥제를 구경하러 올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런 문화 같은 건 알 수 없었겠죠.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곧이어 여자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더니 까르르 웃어 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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