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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대공의 시한부 동생을 숨겼다-3화 (3/120)

제3화

칼릭스는 간절함을 담아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달빛은 닮은 은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새침하게 올라간 눈매까지 아름다웠으나 여자는 차가워 보였다.

칼릭스의 애원에도 여자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결코 너그러운 대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릭스의 눈에 어렸던 간절함이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나 보다.

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뒤늦게나마 입을 뗀 사람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절벽에 서서 새카만 밤바다를 내려다보던 칼릭스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함께 가자고 했던 남자.

그러나 목소리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조나단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칼릭스와 시선을 맞췄다.

“착한 아이처럼 굴겠다는 말이구나?”

칼릭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으리라.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하게, 착한 아이로 있겠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칼릭스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기특하네.”

조나단의 칭찬에 칼릭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네가 필요 없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칼릭스는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동생을 기쁘게 해 주려고 널 데려왔는데.”

조나단이 칼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

“아…….”

“대신 좋은 사람에게 보내줄게. 그자가 하는 일은 거칠어도 아이에게는 제법 친절하거든.”

조나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칼릭스에게 말하던 순간이었다.

“오빠.”

내내 가만히 있던 레이나가 그를 불렀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조나단의 눈썹이 둥글게 올라갔다.

“아이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었어?”

“절 위하는 오빠의 마음이 기특해서요.”

그의 마음을 레이나가 알아주자, 조나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다른 아이로 바꿔 줄게. 얘는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말하는 게 영 음침해서…….”

칼릭스에게 시선을 준 조나단이 말끝을 흐렸다.

이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칼릭스에게 손을 뻗었다.

“이건 또 뭐야?”

그의 손이 불시에 칼릭스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줄을 잡아당겼다.

줄의 정체는 가죽끈으로 된 목걸이로, 나무로 만든 작은 조각상이 걸려 있었다.

“앗!”

칼릭스가 놀라 손을 뻗었다. 조나단은 가볍게 그를 밀어내며 그 나무 조각상을 유심히 보았다.

“이 기분 나쁜 건 뭐지?”

조나단이 한순간에 싸늘해진 목소리로 칼릭스에게 물었다.

손때가 묻은 낡은 조각상이 꼭 주술사들이 남을 저주할 때 쓴다는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불길한 물건을 지닌 아이라면 당장 저택에서 내쫓아야 했다.

“대답해.”

매섭게 변한 그의 태도에 칼릭스가 겁먹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난감이에요. 동화 속 영웅을 조각한…….”

“아하.”

그제야 조나단이 표정을 풀었다.

“고아가 어디서 이런 걸 얻었을까. 훔쳤구나?”

“아니에요!”

칼릭스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돌, 돌려주세요.”

이대로 뺏길세라 초조해진 칼릭스가 줄을 잡고 당겼다.

조나단은 헛웃음과 함께 목걸이를 손에서 놓고 레이나를 보았다.

“봐봐. 구질구질한 장난감 좀 만졌다고 저렇게 달려들잖아. 손버릇도 나빠 보이고. 역시 다른 애가 좋겠어.”

“아뇨. 저 애가 좋아요. 오빠 말대로 그 길고양이를 닮았거든요.”

물론 레이나는 그녀가 예뻐했다던 길고양이의 생김새를 전혀 몰랐지만.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어요. 저는 아이를 데리고 바깥바람이나 쐬다 올게요.”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나가서 대체 뭘 하려고?”

그리 묻는 조나단의 얼굴에 걱정은 없었다.

그저 흥미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낼 뿐이었다.

“나도 같이 갈까? 너는 이런 장난감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잖아. 내가 어떻게 놀아야 재밌는지 알려 줄게.”

레이나는 정말이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이대로 두면 조나단이 끈질기게 달라붙을 테니까.

“오빠.”

레이나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엄지로 검지의 손톱을 틱틱 긁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귀찮게 굴어요.”

레이나의 싸늘한 중얼거림에 조나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귀찮게 할게.”

역시.

‘조나단한테도 잘 먹히는구나.’

레이나는 백작 부부를 상대하기 싫을 때면 지금처럼 행동했다.

하녀들의 수다를 엿듣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레이나는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매사에 무심하게 반응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주체하지 못해 발작 수준에 이른다고.

이로 인해 몇 차례 저택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어 다들 레이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지금처럼 손톱을 건드리는 행동이 전조 증상이랬지.’

이를 알게 된 레이나는 필요할 때마다 써먹었고, 매번 효과를 봤다.

“그럼 내 하인을 빌려줄 테니 데리고 가.”

선선히 물러난 것 같았던 조나단이 제안했다.

“입이 무거워서 믿을 만해.”

그는 아무래도 레이나가 사람 한 명 묻으러 간다고 단정 지은 듯했다.

“괜찮아요. 제 하녀를 데려가면 되니까요.”

레이나는 손톱 건들기를 그만두고 하녀를 불렀다.

“마야.”

마야는 레이나의 전담 하녀였다.

조나단은 레이나의 부름에 나타난 하녀를 보고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처음 보는 하녀인데?”

그도 그럴 것이, 마야는 조나단이 떠난 후 레이나가 새로 들인 하녀였다.

“전에 있던 하녀는 어디 가고?”

“걔는 입이 가벼워서요.”

레이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마야를 보았다.

“아이와 함께 외출할 테니 준비해 줘.”

태연히 말했으나 레이나의 손은 긴장으로 땀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 * *

그 시각, 잉거솔 저택은 분주해졌다.

황제의 명을 받아 분쟁 지역으로 파견 나갔던 잉거솔 대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대공님.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저택의 집사가 정중한 태도로 루키우스를 환영했다.

“숙부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집사는 루키우스의 외투를 받아들며 물었다.

“목욕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식사는 여독을 푸신 후에 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루키우스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시중들기 위해 따라오는 하인들을 마다하고 혼자 씻었다.

씻고 나온 그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늘 번듯하게 넘겼던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나른하게 흘러내렸다.

잘 벼린 칼날처럼 빛나는 갑옷을 입고 저택을 들어올 때와 달리, 지금의 그는 평범한 귀공자처럼 보였다.

루키우스는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모래알이 낀 듯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그가 눈을 감았다.

적막한 방에 그의 고른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똑똑.

이내 들려온 노크 소리에 루키우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잠시간의 휴식이었으나, 다시 드러난 그의 두 눈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워진 뒤였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집사의 안내로 다이닝 룸에 당도한 루키우스가 식탁에 앉자 그의 앞으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담은 접시들이 차례로 놓였다.

루키우스는 무감한 눈으로 접시를 보다 맞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의자가 비어 있는 그 자리에는 음식은커녕 커트러리조차 놓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어디 있지?”

미간을 좁힌 루키우스가 묻자 집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혹시, 듣지 못하셨습니까?”

“무엇을?”

“칼릭스 도련님께서는 지금 남부에 있는 요양원에 계십니다.”

루키우스의 시선이 천천히 집사에게 향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요양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마틴 경께서 분명 소식을 전해 드렸을…….”

“숙부님이 칼릭스를 요양원에 보냈나?”

마틴 경은 루키우스의 숙부였다.

동시에 부모님을 일찍 여윈 잉거솔 형제를 키워 준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는 루키우스가 대공 작위를 물려받을 나이가 될 때까지 임시 가주로서 잉거솔 저택과 영지를 관리해 왔다.

이후에도 지금처럼 루키우스가 오래 저택을 비우는 상황이 오면 그가 자연스레 가주의 역할을 대신했다.

“칼릭스 도련님의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요양차 남부 휴양지의 요양원으로 보내셨습니다.”

휴양지의 요양원.

루키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의 숙부는 ‘임시’ 가주 역할에 단단히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진짜’ 가주라도 되는 줄 아는 듯했다.

“대공님.”

집사가 루키우스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럼 이제 식사를…….”

“아니.”

루키우스가 단호하게 집사의 말을 잘라냈다.

“외출할 것이니 필요 없다.”

“예? 외출하신다니요. 1년 만에 저택에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집사의 만류에 루키우스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지나쳐갔다.

“어, 어디로 가십니까?”

집사가 황급히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남부로 갈 것이다.”

“칼릭스 도련님이 있는 요양원으로 말입니까?”

“그래. 내가 칼릭스를 ‘데리러’ 갔다고, 이 말도 숙부님께 꼭 전하도록.”

뜨끔한 집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루키우스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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