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레이나는 약혼 관련 계약서를 쓰기 위해 루키우스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쳐 레이나는 놀랐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레이나 양.”
골동품 가게의 마스터 일리야가 루키우스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일리야가 여기에 있지?’
레이나는 어떤 얼굴로 일리야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 속고 속이기를 반복한 뒤론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레이나 양.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리야가 미소를 입가에 건 체 레이나에게 다가왔다.
“저는 루터 백작 가문의 일리야 루터라고 합니다.”
일리야가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터 백작 가문.
‘평범한 귀공자가 왜 암거래 상인을 하는 거지?’
레이나는 그의 손을 맞잡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계시겠죠.”
일리야의 입가에 건 미소가 깊어졌다.
그가 손을 거두고 말했다.
“늦었지만, 레이나 양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
“제가 레이나 양을 속였으니까요.”
그는 사과하는 처지인데도 태도가 묘하게 여유로웠다.
“저는 저대로 루키우스와 칼릭스를 도우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레이나는 물끄러미 일리야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 따지기도 그랬다.
그의 말대로 그는 친구를 도왔을 뿐이었다.
레이나는 루키우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리야 님은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저희가 계약서 쓰는 걸 도와주기 위해 왔습니다.”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서류를 쓰는 일도 하세요?”
레이나가 묻자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 친구가 계약서가 서로에게 공평하게 쓰였는지 확인을 부탁해서요.”
“…….”
“제가 계약의 증인이 되어 드릴 수 있을 테고요. 두 분의 약혼식에 대해 조언도 드릴 겸 왔습니다.”
“조언이요?”
“일단 앉으시죠.”
일리야가 소파를 눈으로 가리켰다.
레이나와 루키우스가 나란히 앉고 건너편에 일리야가 앉았다.
“두 분의 순조로운 가짜 약혼을 위해서.”
일리야가 레이나와 루키우스에게 계약서를 각각 내밀었다.
“이 약혼에 서로가 지켜줬으면 하는 것들과 바라는 것들을 써 주십시오.”
레이나는 서류를 받아들고 고민했다.
‘뭘 써야 할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계약서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레이나가 힐끔 루키우스를 보았다.
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루키우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뭘 쓰는 거지?’
나에게 뭘 바라는 거야?
왠지 조바심이 난 레이나도 펜을 들었다.
작성을 마친 루키우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레이나도 작성을 마치자 일리야가 두 사람의 계약서를 가져가서 확인했다.
두 사람의 계약서를 읽은 일리야가 입꼬리를 휘었다.
“이건 확실히 각자의 의견을 들어봐야겠군요.”
일리야가 레이나와 루키우스에게 서로의 계약서를 바꿔서 전해 주었다.
찬찬히 서류를 읽어나가던 레이나가 멈칫했다.
“대공님.”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뭡니까?”
레이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제가 왜 대공님과 함께 침실을 써야 하는 거죠?”
레이나는 자신이 그간의 일로 피로하여 글자를 아주 제대로 잘못 읽었길 바라며 물었다.
루키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을 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레이나는 황당해졌다.
이제 그녀의 표정은 별 미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변태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레이나는 소름이 돋아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절대 싫어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언가 착각을 하셨나 봅니다.”
루키우스가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저는 침실을 공유한다는 말만 썼지, 다른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레이나는 서류를 다시 읽어 보았다.
-약혼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레이나는 루키우스와 침실을 공유한다.
“당신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나는 그럴 생각 없다고.”
레이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도 그럴 생각 없어요.”
애초에 이상하게 말을 하는 건 루키우스 아닌가.
“저는 왜 침실을 공유해야 하는지,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건 간단합니다.”
루키우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레이나를 보았다.
“당신이 있어야 내가 잠을 잘 수 있으니까.”
“……네?”
“내가 잠이 든다면 그때는 침실을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레이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제가 있어야 잠이 오시는데요?”
의아해하던 레이나의 머릿속에 어떠한 기억이 스쳤다.
“골든 플라워 보육원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나는 얼른 말했다.
“그건 제가 대공님의 차에 수면제를 탔기 때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저는 약이 들지 않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드셨잖아요. 그 수면제는 코끼리도 잠재울 만큼 강력한 약이라고 했어요.”
“그런 건 없어. 난 당신 때문에 잠든 거야.”
레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일리야는 제가 특별한 사람을 찾는 걸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도움을 부탁했다고?
레이나는 루키우스가 일리야를 이렇게나 신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던 중에 일리야가 새로운 단서를 주었습니다.”
루키우스는 일리야에게 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특별한 사람을 찾고 싶다면 자네에게 특별한 사람을 찾게.
칼릭스를 찾느라 바쁜 와중에 기껏 찾아왔더니 말장난 같은 말이나 했다.
그러나 그 단서를 받은 날 루키우스는 레이나를 만났다.
일리야가 준 단서에 부합하는.
루키우스는 일리야가 준 단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당신 때문에 잠이 들고 깨어난 날,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루키우스가 레이나의 객실을 찾아와 말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이미 제가 칼릭스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으셨나요?”
“그 후에 제 심복의 보고를 받고 알게 된 겁니다. 더불어…….”
루키우스가 일리야를 보았다.
“일리야로부터 당신이 수면제를 부탁했다는 얘기를 듣고 의심을 굳혔습니다.”
레이나의 시선도 일리야에게 꽂혔다.
일리야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 양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레이나가 전혀 믿지 않자 일리야가 덧붙였다.
“저는 레이나 양이 칼릭스를 데리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지만, 그 목적이 불순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왜죠?”
“레이나 양은 크롤로트 가문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요.”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셈이었습니다.”
일리야는 레이나가 수면제를 요구한 것을 루키우스에게 곧바로 말하지 않았다.
만약 레이나가 루키우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었다면, 수면제가 아닌 독약을 요구했을 테니까.
애초에 루키우스는 수면제에 내성이 있으니 그리 큰 효과도 못 볼 터였다.
“나중에야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죠.”
루키우스는 시릴에게 전해 들은 보고로 인해 이미 레이나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걸 모르고 수면제 얘기를 꺼냈던 일리야는 당황했다.
정확히는, 그의 예감이 빗나갔다는 생각에.
“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거든요.”
레이나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칼릭스를 숨겨 주었다니.
일리야는 여태 자신의 촉을 믿고 과감하게 행동해 왔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결국 제 예감이 맞았지요.”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이나는 괴짜 보듯 일리야를 보았다가 루키우스를 보았다.
“이제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 그 조건을 넣은 겁니다. 저의 불면증에 당신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날, 나 때문에 루키우스가 잠들었다니.
‘나는 한 게 없는데?’
레이나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던 때, 루키우스가 레이나가 쓴 계약서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건 뭡니까?”
루키우스 역시 레이나가 건 조건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써야지, 왜 칼릭스에 대한 걸 씁니까?”
레이나는 루키우스에게 칼릭스와 관계 개선에 노력해 달라고 적었다.
“그런 조건을 걸지 않으면 제 말을 듣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
“칼릭스는 대공님을 신뢰하지 못해요. 믿음을 심어 주시려면 칼릭스와 가까워지셔야 해요.”
게다가 칼릭스의 분위기가 요즘 들어 조금 이상해졌다.
레이나는 하루빨리 칼릭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저는 칼릭스가 저희의 약혼식에 꼭 참석했으면 해요.”
루키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칼릭스에게 더는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고 싶어요.”
“저도 레이나 양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일리야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왕 약혼식을 하는 김에 크고 화려하게 하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레이나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