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칼릭스는 힐끔 레이나의 앞에 놓인 음식을 보았다.
희멀건 죽인 칼릭스와 달리 레이나가 먹는 음식은 제대로 된 요리였다.
칼릭스가 가만히 레이나를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나가 눈썹을 둥글게 들어 올렸다.
칼릭스의 두 눈에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레이나는 칼릭스의 앞에 놓인 음식을 보았다.
‘아하.’
레이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칼릭스는 잉거솔 저택에서 약초가 들어간 맛 없는 음식만 먹었다고 했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음식이 딱 그렇게 생겼다.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
“네!”
칼릭스가 얼른 대답했다.
“잠시만.”
그리 말한 레이나가 빈 접시를 하나 들었다.
그러곤 가운데 놓인 요리를 덜어 주었다.
그녀가 칼릭스에게 접시를 건네려고 하자 루키우스가 말했다.
“안 됩니다.”
잔뜩 기대하며 접시를 받을 준비를 하던 칼릭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왜요?”
“어렸을 때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났다가 열병이 온 적이 있습니다.”
“…….”
“소화력이 안 좋아 함부로 먹으면 안 됩니다.”
레이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보육원에서는 어떤 음식이든 잘 먹었는걸요. 그렇지, 칼릭스?”
레이나가 확인차 묻자 칼릭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키우스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칼릭스.”
“…….”
“다른 음식을 먹었다고?”
레이나는 그를 대신해 루키우스에게 설명하려 했으나 칼릭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리고 어렸을 때 탈이 난 건 음식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칼릭스는 여전히 루키우스를 보지 못했지만, 말만은 또박또박 내뱉기 위해 노력했다.
“대공님과 숙부님이 식사 중에 싸우셨잖아요. 그래서 체한 거예요.”
그러나 말을 할수록 칼릭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루키우스와 숙부를 탓하는, 무척 건방진 말을 내뱉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체했다고?”
루키우스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자기 건강에 대한 자각이 있다면 군말 없이 먹도록 해라.”
레이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루키우스가 칼릭스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아직 어린 데다 가뜩이나 주눅 들기 쉬운 칼릭스에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순 없는 걸까.
원체 표정도 없는 루키우스가 시종일관 저런 화법으로 말했다면 칼릭스가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그 부분은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결국 레이나가 끼어들어 말했다.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게 더 몸에 안 좋아요. 차라리 맛있는 음식을 마음 편하게 먹는 게 칼릭스의 몸에 더 좋을 거예요.”
루키우스가 레이나를 가만히 보았다.
탐탁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레이나가 선수를 쳤다.
“그러는 대공님께서도 편식하시잖아요.”
칼릭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확인해 보듯 루키우스의 접시를 보았다.
레이나도 그의 접시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단 음식만 골라서 드시잖아요. 아니에요?”
“…….”
“그렇게 편식하셔도 이리 건강하신데, 대공님보다 더 균형 잡힌 요리를 먹는 칼릭스를 걱정할 필요 없으실 거예요.”
루키우스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더는 반대하지 않자, 레이나는 칼릭스에게 요리를 담은 접시를 건네주고 하인을 불러 죽을 치우게 했다.
칼릭스는 레이나와 루키우스를 번갈아 보다가, 광대가 점점 씰룩였다.
‘레이나가 이겼다!’
레이나는 칼릭스의 편을 들어주었고 루키우스를 이겼다.
칼릭스는 마치 자신이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포크를 들었다.
루키우스는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칼릭스를 힐끔 보았다.
칼릭스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저런 얼굴을 한 칼릭스는 처음 보았다.
아니, 그의 앞에서 저렇게 풀어진 얼굴을 한 게 처음이었다.
“칼릭스. 저번에 내가 물어본 거, 어떻게 할지 정했니?”
칼릭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나를 보았다.
“대공님과 나의 약혼식에 참석할지 말이야.”
“아…….”
칼릭스가 루키우스를 힐끔대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를 알아본 레이나가 얼른 덧붙였다.
“대공님과 나는 네가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
“…….”
“너도 함께해 주면 무척 기쁠 것 같거든.”
칼릭스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참석할게요.”
그의 대답에 레이나가 환하게 웃었다.
루키우스가 그런 레이나를 가만히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레이나가 곧바로 입꼬리를 내리고 칼릭스 쪽을 눈짓했다.
어서 칼릭스에게 말을 걸어 보라는, 재촉하는 눈짓이었다.
루키우스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칼릭스.”
루키우스의 부름에 칼릭스가 화들짝 놀랐다.
이제 와 음식을 빼앗길까 봐 슬쩍 접시를 꽉 쥐었다.
“요즘…….”
칼릭스는 물론이고 레이나도 긴장한 얼굴로 루키우스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나?”
칼릭스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멍한 얼굴이 된 건 레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를 풀 대화를 생각해 보랬더니.’
식사 자리에서 제일 듣기 싫은 화제를 꺼낸 루키우스였다.
칼릭스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궜다.
“대답해.”
심지어 루키우스는 대답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레이나는 그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으나 루키우스는 칼릭스만 보고 있었다.
“요, 요즘엔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바빠서…….”
“그렇군.”
“정, 정말이에요. 이제부터는 열심히 하려고…….”
“진심인가?”
레이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누가 추임새를 저렇게 넣냐고!’
그녀는 속으로 탄식했다.
‘첫술부터 배부를 생각은 없다지만, 너무 효과가 없는걸.’
루키우스는 분명 나름대로 레이나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알려 준 ‘그래? 그랬구나. 정말?’ 이 세 가지 추임새를 칼릭스의 앞에서 했다.
문제는 애초에 그가 추궁하는 질문을 던진 탓에 어떤 추임새를 넣어도 비꼬는 것처럼 들리게 되었다.
칼릭스도 더는 할 말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
그렇게 세 사람의 식사 시간은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무리되고 말았다.
* * *
식사 자리가 끝나자 루키우스가 레이나에게 말했다.
“당신 말대로 했으나 역효과만 났습니다.”
레이나는 뜨끔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대공님과 칼릭스 사이의 분위기가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졌어요.”
루키우스는 레이나를 빤히 보았다.
전혀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계속하다 보면 더욱 자연스럽게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레이나를 보던 루키우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밤이 와 하늘이 어둑했다.
“씻고 오겠습니다.”
레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뜬금없이 그걸 왜 그녀에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침실에서 기다리십시오.”
“……네?”
레이나는 깜짝 놀랐다.
“제, 제가 왜요?”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합의라는 말에 레이나는 기억이 떠올랐다.
두 사람 다 서로의 조건을 미리 들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는 것을.
‘올 것이 왔구나.’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하겠다고 한 사람은 그녀였기에, 이제 와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 * *
레이나는 루키우스의 침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는 그저 루키우스의 불면증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그녀는 자신이 의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레이나는 가만히 방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삭막하기만 했다.
‘저택을 자주 비워서 그런가?’
레이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 루키우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완전히 여미지 않은 루키우스의 잠옷 셔츠 사이로 맨가슴이 조금 보였다.
레이나는 그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았다가 시선을 들었다.
루키우스가 손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고 있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눈을 들었다.
레이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왠지 보면 안 될 걸 본 기분인데.’
무방비한 모습의 루키우스는 전보다 유순한 귀공자처럼 보였지만, 어쩐지 레이나는 평소보다 더욱 긴장이 되었다.
루키우스는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그녀를 알아보았다.
“왜 그럽니까?”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 들어 묻자, 레이나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단, 단추를 덜 잠그셨어요.”
그 말에 루키우스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앞섶이 벌어져 있었다.
“답답한 옷차림으로 자는 건 질색입니다.”
심드렁하게 대꾸한 그가 레이나에게 다가왔다.
소파에 앉아있던 레이나에게 그가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에게서 시원한 향유 냄새가 풍겨왔다.
레이나는 이제 숨까지 참았다.
루키우스가 레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레이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려 그와 거리를 벌렸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레이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등불을 들었다.
그러곤 후, 입김을 불어 등불을 껐다.
사위가 한결 어두워졌다.
그는 방에 있는 등불을 차례대로 껐다.
점점 방이 어둑해지자 레이나는 입안이 탔다.
루키우스가 침대 쪽 벽면에 있는 등불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불을 껐다.
방이 순식간에 아늑해졌다.
‘왠지.’
레이나는 당황했다.
‘분위기가 묘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