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조나단은 콧노래를 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금 남부의 땅을 밟은 그의 두 눈에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생도 신분으로 들렀을 때는 갈 수 없었던 남부의 유흥시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왕 들른 김에 제대로 놀아 볼까.’
조나단이 막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어디 가십니까?”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에 조나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잊었으나 그에게는 골치 아픈 동행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일리야였다.
“이봐, 정말로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간섭할 셈이야?”
조나단이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나 한가해?”
“한가한 게 아니라, 레이나 양의 부탁을 받았으니까요.”
조나단의 비아냥에도 일리야가 덤덤하게 말했다.
조나단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굴렸다.
‘레이나를 정말 아끼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남부로 가신다고요?”
레이나는 돌연 남부로 향하겠다는 조나단에게 의문을 품었다.
“내가 퇴학당한 이유가 어떤 놈 때문이라고 말했지?”
레이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이지만, 조나단은 아직도 그 일에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당하고만 살 성격 아닌 거 알잖아. 그 자식을 찾아서 복수할 셈이야.”
레이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요?”
“사고라니. 정당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거지.”
조나단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받아 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도록 들들 볶을 목적이었다.
“도대체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조나단은 레이나가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해군 사관 학교에 들어가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대부분 망나니야.”
그렇다고 해군 사관 학교가 순전히 망나니들의 집합소만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해군이 되고자 지원한 평민들도 많았다.
“그놈도 귀족 집안의 자제였지만 망나니 같지는 않더라고.”
가문의 작위도 높지 않았고 가난했으니, 이름뿐인 귀족이었다.
그런 가문 출신이라면 해군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해 생도가 될 법했다.
“얌전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놈이었거든.”
조나단과 어울리던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무료한 생도 생활의 놀잇거리로 만만한 생도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녔다.
남자도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꿋꿋하게 시비를 무시하며 심심한 반응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쳐 버렸다니까.”
조나단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조나단과 어울리던 무리의 한 명이 남자를 골탕 먹였다.
남자가 받을 편지를 빼돌린 것이다.
남자의 유일한 낙이 그에게 오는 편지임을 알았기에 벌인 일이었다.
문제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남자가 크게 분노했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조나단이 범인이라고 오해해 다짜고짜 조나단에게 달려들었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갔더라고.”
남자는 오해를 풀어 주려고 해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조나단도 말로 진득하게 설득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남자가 걸어온 싸움에 응했다.
사실, 지루하던 차에 잘 걸렸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안타깝게도 때가 안 좋았지.”
조나단이 혀를 찼다.
그날은 황궁 고위 관료들이 해군 사관 학교를 방문한 날이었다.
조나단과 남자의 싸움이 크게 번지면서 소란이 일었고 그 모습을 관료들이 보고 말았다.
규율 따위 무시하고 개싸움을 벌이는 광경에 관료들은 크게 실망했다.
분노한 총장은 더는 학교의 기강을 흐리는 생도들을 가만둘 수 없다며 조나단과 남자를 퇴학 처분했다.
선례로 남겨 다른 생도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조나단의 말을 듣던 레이나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크게 싸운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한데요?”
조나단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말했잖아, 미친놈이라고. 그 와중에 드러나지 않는 곳만 때리더라니까.”
조나단은 당장이라도 셔츠를 벗어 엉망이 된 자신의 몸을 레이나에게 보여 주려 했으나 레이나가 질색하며 사양했다.
“반대로 나는 얼굴만 노렸거든. 그랬더니 총장이 나를 이 싸움의 주범으로 취급하더라고.”
조나단은 자신이 왜 손해배상을 청구하려 하는지, 이제는 이해되느냐고 물었다.
레이나는 어느 정도는 조나단이 억울해할 만하다 느꼈으나 딱히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끼리끼리 만나 싸움을 일으켰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도가 도대체 누군데요?”
레이나는 이쯤 되니 조나단과 대등하게 싸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버밍엄 남작 가문의 외동아들이야. 워낙 한미한 가문이라 넌 들어도 모를걸.”
조나단의 예상과 달리 레이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 사람 이름이 정확히 어떻게 되죠?”
당황한 레이나가 말까지 더듬자 조나단이 눈썹을 둥글게 들어 올렸다.
“에이든 버밍엄. 아는 사람이야?”
레이나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알다마다.
‘에이든 버밍엄은 원작 남주잖아!’
이름을 접할 일이 없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존재였다.
‘원작에서는 해군 사관 학교에 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원작이 꼬이면서 에이든의 삶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 듯했다.
‘하긴, 에이든은 원래 신분 차이로 릴리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도 못했지.’
에이든은 남몰래 릴리를 짝사랑했다.
릴리가 잉거솔 대공가와 전쟁을 치르게 되자 그녀를 도와주면서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에이든을 몰랐던 릴리는 갑자기 나타나 도와주는 그를 경계했다.
그러다 잊고 지냈던 그와의 어렸을 적 추억을 기억해 냈고, 에이든이 그때부터 줄곧 그녀를 좋아해 왔음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점차 마음을 열었다.
‘그 지고지순한 순정남이 조나단에게 싸움을 걸어 퇴학까지 당하다니.’
레이나는 멍해졌다.
어찌 보면 에이든은 기가 막히게 제대로 응징한 걸지도 몰랐다.
잉거솔 가문과 밀레이 가문이 전쟁을 치르지 않게 되면서 에이든은 릴리와 연을 만들 기회가 없어졌다.
그 원인이 바로 칼릭스를 레이나에게 데려온 조나단 아닌가.
‘하지만 고작 편지 하나 훔쳤다고 그토록 흥분하다니.’
의아함을 느끼던 레이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나단에게 물었다.
“그 편지가 혹시 누구한테서 온 건지 아세요?”
조나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 보낸 편지도 아니었어. 밀레이 백작이 보낸 편지였다던데.”
레이나는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이든과 릴리가 왜 편지를 주고받지?’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접점이 생겼나?
레이나는 잠시 고민했다.
퇴학당한 에이든은 남부로 돌아갔을 테니, 릴리와 만날지도 몰랐다.
‘그래도 원작의 남주와 여주인데.’
레이나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가 숨기고 있는 세 번째 제물과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될 단서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지금 상황에서 오빠가 남부에 가서 사고를 일으켰다간 저희 가문이 더욱 난처해지는 거 아시죠?”
조나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레이나. 네 허락을 받을 생각은 없어.”
“그래도 용돈은 저한테 받으셔야죠.”
조나단이 움찔했다.
“남부로 향할 마차며 그곳에 머무를 비용이 필요하실 텐데요.”
크롤로트 백작 부부가 자리를 비우면서 레이나가 가문의 재정 관리를 도맡고 있었다.
어차피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 레이나가 하도록 내버려 두었거늘, 조나단은 이런 걸림돌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남부에 가실 수 있도록 허락해 드릴게요.”
레이나가 선심 쓰듯 말하며 입꼬리를 휘었다.
“대신, 제가 붙여 줄 사람과 함께 가세요.”
조나단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행인이 일리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리야 역시 조나단이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레이나가 부탁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일로 정령의 정화와 관련된 단서를 얻을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레이나와 루키우스가 북부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을 도와주던 일리야가 이번에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의 애인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개인가?”
조나단이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이렇게 하지.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네가 하기 싫다고 떠났다고.”
그렇게 만들겠다는 듯, 조나단이 일리야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일리야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레이나가 불쌍하군.”
“뭐?”
“당신이 사고치면 이젠 그 뒤처리를 레이나가 해야 하니까. 그 나이를 먹고도 철부지 짓 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나?”
일리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애초에 수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퇴학까지 당하지도 않았겠지.”
일리야를 물끄러미 보던 조나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희미하게 웃은 그가 일리야에게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그들이 있는 골목 주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마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신전을 세우겠다고요?”
“여기 말고 더 좋은 곳이 있을 텐데요.”
그들은 대신전에서 파견 나온 신관들이었다.
‘남부에 신전을 세운다고?’
일리야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신전을 세울 지역들은 마틴 경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더군요.”
신관들이 마틴을 입에 올리자 일리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남부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