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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대공의 시한부 동생을 숨겼다-105화 (105/120)

제105화

그 시각 잉거솔 대공가에서는 정령이 귀가가 늦어지는 레이나와 루키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건들건들 다리를 떨었다.

그간 인간들을 지켜보며 배운 행동이었다.

인간들은 초조하면 다리를 떨거나 손톱을 깨무는 행동을 했다.

‘시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거늘,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지?’

정령이 다리를 떠는 거로 모자라 손톱까지 깨물려고 입술에 엄지를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령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파 옆에 빌이 서 있었다.

정령은 미처 모습을 숨기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빌이 정령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도대체 누구세요?”

빌은 정령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정령은 제 존재를 남들에게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특히 칼릭스의 곁에 자주 붙어 있는 빌은 정령을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정령은 귀족 같지도 않았고 칼릭스의 친척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칼릭스는 물론이고 레이나와 루키우스와도 꽤 친분이 있어 보였다.

저택에 기거하는지 아무 때나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 저택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

“칼릭스가 저택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고 했거든요?”

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강아지도 자꾸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해요. 마치 동화 속 요정처럼요.”

“…….”

“당신도 그렇고요.”

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정령을 보았다.

정령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요즘 정신이 없어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데 예전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늘 나타나는 사람 앞에만 나타났는데 빌이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정령은 속으로 말을 골랐다.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나는 칼릭스의…… 가정 교사다.”

정령은 고민 끝에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

칼릭스와 레이나 그리고 루키우스와 태연히 말을 섞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은 가정 교사밖에 없다고 여겼다.

“가정 교사요?”

빌이 못 미덥다는 눈으로 정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칼릭스는 공부를 전혀 안 하던데요?”

빌은 칼릭스가 공부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책을 많이 읽기는 했으나 따로 수업을 들으러 간 적은 없었다.

정령은 큼큼 목을 다듬고 말했다.

“칼릭스는 몸 상태를 고려해 당분간 공부를 쉬고 있단다.”

“그럼 왜 이 저택에 계세요?”

정령은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는 빌 때문에 곤란함을 느꼈다.

“공부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 숙제를 내 주기 위해서다.”

정령은 되는 대로 둘러댔다.

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령은 부담감을 느꼈으나 정작 빌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칼릭스가 생각보다 게으르구나.’

빌은 칼릭스가 숙제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번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빌은 다른 가문의 아이들이 잉거솔 저택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자꾸만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는 칼릭스였다.

이내 빌은 결심한 듯 정령의 옆자리에 앉았다.

태연하게 그의 옆에 앉은 빌을 보고 정령은 당황했다.

잉거솔 형제와 레이나를 제외한 인간과는 이토록 가까이 있어 본 적 없던 정령이었다.

정령은 슬쩍 몸을 옆으로 옮기며 빌과 거리를 벌렸다.

“가정 교사님이 보는 칼릭스는 어떤 아이인가요?”

정령의 한쪽 눈썹이 쑥 올라갔다.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지?”

“그야…….”

빌은 검지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제가 생각보다 칼릭스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너는 칼릭스의 친구 아니더냐.”

그것도 유일한.

빌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칼릭스에 대해 저만큼 잘 아는 아이는 아직 없다고요.”

빌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에요. 칼릭스가 어떤 아이인지 잘 모르겠어요.”

기회를 봐서 자리를 뜨려 했던 정령이 멈칫했다.

“잘 모르겠다니, 무슨 뜻이지?”

정령은 왠지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가 자신의 형을 똑 닮은 것 같아요.”

정령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칼릭스가 루키우스를 닮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령은 빌이 생각보다 칼릭스와 그리 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번에 아이들이 왔을 때…….”

빌은 정령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을 설명해 주었다.

갑자기 변한 칼릭스의 태도라든지, 유난히 붉어 보였던 눈동자라든지.

“잠깐.”

가만히 듣던 정령이 빌의 말을 잘랐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어땠다고?”

정령이 갑자기 진지하게 물어와 오히려 빌이 당황했다.

“찰나지만, 해리라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던 칼릭스의 눈이 평소보다 붉어 보였거든요.”

정령이 심각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빌은 아차 싶어 덧붙였다.

“칼릭스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칼릭스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에요.”

빌은 자신이 칼릭스의 흉을 본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졌다.

행여나 정령이 칼릭스를 이상한 아이로 볼까 봐 걱정되었다.

“네 말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안다.”

정령이 빌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는 칼릭스를 항상 지켜봐 주는 좋은 친구로구나.”

빌이 얼떨떨한 얼굴로 뺨을 붉히는 사이 정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칼릭스의 침실로 향했다.

* * *

칼릭스는 자신의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레이나와 루키우스의 귀가가 늦어져 책이나 읽으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정령님?”

칼릭스는 갑자기 그를 찾아온 정령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릭스.”

정령은 칼릭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와 얼굴을 가까이한 정령이 칼릭스의 두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정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릭스의 두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더는 칼릭스가 악한 힘을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칼릭스에게는 이제 레이나와 루키우스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형인 루키우스와도 오해를 풀고 사이가 좋아졌다.

아직 자신의 저주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음에도 칼릭스는 지금의 생활에 안정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이를 알았기에 정령은 칼릭스보다는 자신의 정화에 더 신경을 쏟고 있던 참이었다.

‘그럴 마음이 사라진 게 아니라, 숨겨 두고 있는 건가?’

빌의 말에 의하면 칼릭스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아마 칼릭스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는지 자각도 못 한 게 분명했다.

그만큼 칼릭스는 언제든 자신의 마음이 요동치면 자제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도 눈의 빛깔이 바뀌면서.’

칼릭스가 흡수했던 악한 힘이 얌전해진 줄 알았는데.

‘그저 다시 나타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정령은 칼릭스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칼릭스. 요즘은 몸 상태가 어떻지?”

칼릭스가 싱긋 웃었다.

“좋아요. 아프지도 않아요.”

열병이 오려는 징조도 없었다.

그는 정령의 예상대로 지금 자신의 생활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형과 훈련해서 체력도 전보다 좋아졌고요.”

칼릭스는 수줍은 얼굴로 자신의 좋아진 체력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정령의 굳은 얼굴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악몽은 더는 꾸지 않느냐?”

“네.”

칼릭스는 정령이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는 눈치였으나 착실히 대답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마.”

정령은 칼릭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몸 말고 마음이 불편했던 적은 없느냐?”

칼릭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칼릭스는 정령의 시선을 피해 책으로 눈을 옮겼다.

책을 마저 읽는 척 종이를 넘겼으나 글자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때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요. 이제 더는 슬플 일도 없고요.”

“화가 난 적은?”

“…….”

“해리라는 아이가 레이나를 모욕해 화가 나지 않았느냐?”

정령이 해리를 언급하자 칼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 일을 어떻게…….”

“그 아이에게 화가 났을 때 무슨 생각을 했지?”

칼릭스가 침묵하자 정령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칼릭스. 잠시만 네 손을 내게 다오.”

칼릭스는 머뭇거리면서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령은 칼릭스의 손을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칼릭스는 숨을 죽이고 정령을 쳐다보았다.

정령의 눈가를 움찔 떨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침실 문이 열렸다.

레이나와 루키우스가 서 있었다.

“칼릭스.”

“레이나!”

칼릭스는 재빨리 정령의 손을 놓고 레이나에게로 향했다.

“미안. 너무 늦었지?”

“아니에요. 대신전에서 시험은 무사히 치렀나요?”

칼릭스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는 정령을 보았다.

정령은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령님. 왜 그러세요?”

정령은 레이나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레이나.”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문제요?”

“정확히는.”

정령이 마침내 자신의 손에서 시선을 떼고 레이나를 보았다.

“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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