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루키우스는 일리야가 보낸 서신을 확인했다.
그를 남부에 보낸 레이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일리야는 밀레이 영지에 세워지는 신전이 마틴과 연관되었음을 알아낸 건 물론이고 새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에이든 버밍엄.’
루키우스는 에이든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처음 듣는 가문이었으나 일리야의 말에 의하면 밀레이 백작 가문과 깊은 연이 있어 보였다.
버밍엄 가문은 원래 대대로 조각을 업으로 삼던 평민이었다.
뛰어난 실력으로 한 고위 귀족의 눈에 들어 작위까지 얻게 되었고, 밀레이 저택에도 조각상을 납품한 이력이 있었다.
일리야는 그 조각상이 무언가 특별하리라 추측했다.
‘밀레이 백작이 에이든 버밍엄에게 조각상 보수를 요구했다고.’
작위를 얻은 후로 버밍엄 가문은 조각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굳이 릴리가 에이든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루키우스는 일리야의 추측이 타당하다 여겼다.
‘조각상을 만든 버밍엄 가문 사람만 알 수 있는 특별한 비밀이 있으니 에이든을 찾은 거겠지.’
루키우스는 일리야의 서신을 손으로 가만히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밀레이 영지에 세워지는 신전과 저택의 조각상 보수.
때마침 동시에 일어나게 된 이 두 상황을 루키우스는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었다.
‘조각상이 밀레이 가문의 가보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들은 물론이고 마틴도 찾고 있는 세 번째 제물과.
루키우스는 이 사실을 레이나에게 알리기 위해 그녀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노크 소리에도 반응이 없어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 레이나가 보였다.
루키우스는 그녀를 불러 깨우는 대신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그녀의 발치에는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피곤한 나머지 서류를 읽던 중에 잠이 든 듯했다.
루키우스는 서류를 모아 정리하며 읽어 보았다.
‘조델이 만든 약의 제조법이군.’
레이나가 조델을 속여 얻은 정보였다.
조델의 계략에 증인이 되어 줄 폴록 대공도 있으니, 자료만 정리된다면 순조롭게 조델을 황궁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을 터였다.
‘레이나는 우두머리를 치기 전에 잔가지부터 쳐내야 한다고 했지만.’
루키우스는 과연 조델을 쳐낸다고 마틴이 잡힐까 싶었다.
조델이 레이나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건 그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숙부는 조델을 잘라 냈겠지.’
루키우스는 행방이 묘연해진 마틴을 찾고자 시릴과 마야에게 부탁해 놓은 참이었다.
‘만약 숙부를 찾는다면…….’
그때도 레이나의 방식을 따라야 할까.
레이나는 루키우스와 달랐다.
죄를 지었으면 법의 절차대로 죗값을 치르길 원했다.
평소의 루키우스였다면 마틴을 발견하자마자 목을 쳤을 것이다.
‘그편이 훨씬 간단하니까.’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가 폴록 대공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던 레이나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으나 레이나는 아니었다.
루키우스는 레이나에게만큼은 두려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레이나의 옆에 앉았다.
레이나는 루키우스가 옆에 앉아도 깨어나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불편해 보이는 레이나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레이나를 말없이 보던 때였다.
“으음.”
레이나가 루키우스의 어깨에 더욱 깊게 이마를 기댔다.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레이나는 여전히 잠이 든 채 미간을 찡그리기만 했다.
루키우스는 햇살이 내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가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이내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차양을 만들자 비로소 레이나의 미간이 풀어졌다.
언제 봐도 잠이 든 레이나의 얼굴은 무방비했다.
싸늘한 표정이 지워진 말간 얼굴이 그녀를 평소보다 어려 보이게 했다.
루키우스가 레이나의 눈코입을 찬찬히 훑어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때였다.
“좋으냐?”
루키우스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가만히 시선을 돌려 맞은편을 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정령이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 좋으냐 물었다.”
정령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잠이 든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니.”
“조용…….”
“으음.”
레이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가 눈을 떴다.
“대공님?”
레이나는 자신이 깜빡 잠이 든 거로 모자라, 루키우스의 품에 몸을 기대고 있어 놀랐다.
“조금 더 눈을 붙이십시오.”
루키우스가 말했으나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잠을 몰아내기 위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 탓에 루키우스가 레이나를 깨운 정령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령도 피곤한 레이나를 깨워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미안하구나. 이리 빨리 깨울 생각은 없었단다.”
“아니에요. 일어나야죠.”
몸을 바로 세운 레이나가 정령과 루키우스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어요?”
“아무것도.”
“아무 말도 안 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둘이 동시에 대답하자 레이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일리야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루키우스가 화제를 돌리며 일리야의 서신을 건넸다.
레이나가 서신을 읽는 동안 정령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본 루키우스가 물었다.
“힘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령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밝힌 후로, 힘을 비축하겠다며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마찬가지다. 여전히 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짐작 가는 점도 없습니까?”
정령이 고개를 저은 때, 서신을 다 읽은 레이나가 루키우스를 보았다.
“아무래도 남부에 가 봐야겠어요.”
레이나는 정령의 불안정한 상태와 일리야가 알려 준 정보를 생각하니, 릴리와의 만남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 백작이 말해 줄 생각이 없더라도 설득해 보는 수밖에요.”
“남부에 가겠다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정령이 레이나를 보았다.
“언제 갈 셈이냐? 이번 주는 아니겠지?”
“되도록 빨리 갈 수 있게 최대한 시간을 내 볼 셈이에요.”
레이나의 대답에 정령이 미간을 구겼다.
“너희, 설마 잊은 것이냐?”
정령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레이나와 루키우스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 주에 칼릭스의 생일이 있지 않으냐!”
레이나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칼릭스의 생일!’
애초에 칼릭스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랐던 레이나였다.
루키우스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는 그간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대공님. 그동안 칼릭스의 생일은 어떻게 챙겨 주셨어요?”
“케이크와 선물을 주었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챙겨 주셨네요?”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키우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저는 대부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루키우스가 바빠 저택을 자주 비우기도 했고 칼릭스를 부러 피한 탓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틴이 살갑게 챙겨 줬을 리도 없으니, 칼릭스는 생일날에도 홀로 지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령이 혀를 찼다.
“그러니 칼릭스가 생일이 코앞이어도 들뜨는 기색이 없지.”
가뜩이나 레이나와 루키우스가 바빠 보이니 더욱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것이다.
레이나는 생일 얘기를 꺼내면 괜찮다고 말할 칼릭스의 얼굴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야.’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칼릭스의 생일만큼은 제대로 챙겨 주자고 다짐했다.
* * *
칼릭스의 침실을 찾아간 레이나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고개를 젓는 칼릭스의 반응을 보아야 했다.
“저는 괜찮아요.”
칼릭스는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요.”
칼릭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씁쓸한 미소가 아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레이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준비하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어.”
사실 시간이 촉박했으나 레이나는 잠을 줄여서라도 해낼 셈이었다.
그러나 칼릭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럼 생일날 하고 싶은 일은 없니?”
칼릭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레이나랑 형이랑 같이 케이크를 자르고 싶어요.”
무척 소박한 대답에 레이나가 얼른 물었다.
“선물은?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면 충분해요.”
레이나는 좀 더 생각해 보라며 칼릭스를 설득했다.
그는 마지못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레이나는…….”
말끝을 흐린 칼릭스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으나 칼릭스의 얼굴을 보면 무언가 생각난 게 있어 보였다.
칼릭스는 레이나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슬쩍 눈을 피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레이나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칼릭스는 그의 방을 나서는 레이나를 마중 나간 뒤 문을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칼릭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레이나가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었으나 칼릭스는 정말로 받고 싶은 게 없었다.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오히려 내가 선물을 주고 싶어.’
그가 여태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고 생일까지 치르게 된 건 레이나 덕분이었다.
칼릭스는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레이나에게도 형에게도 깜짝 선물을 주자.’
그리 결심한 칼릭스가 두 눈을 빛냈다.
이전과 달리 특별한 생일이 되리란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칼릭스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생일날 두 사람에게 선물을 주기는커녕 함께할 수조차 없게 되리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