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카엘과 켄드릭은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카일킬 상회 앞마당에서 서로 마주 보고 대치했다.
카엘은 자연스럽게 허리춤에서 타니스의 검과 강철 검을 양손에 뽑아 들었고, 켄드릭도 평소 사용하던 미스릴이 섞인 검을 손에 쥐었다.
카엘 vs 켄트릭.
이 두사람의 매치는 카일킬 상회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켄드릭은 카엘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덤바튼 영지의 최강자였다.
아니, 론디아 왕국 동부지방에서도 적수가 없었으니 론디아 왕국 동부지방의 최강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다면 카엘은 어떠한가?
카엘은 아직까지 정해진 용병 등급은 없었지만, 카일킬 상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자타공인 동부지방 최강자와 혜성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한 카엘의 대결.
뭇 사람들의 가슴을 떨리게 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카엘 경이 이기지 않을까?”
“에이, 그래도 켄드릭 경이 이기지. 켄드릭 경이라고! 동부최강 켄드릭 경!”
“그럼 저 사람은 그 카엘인데? 그때 못 봤어? 사람 머리 가르는 거? 그게 인간이야?”
“…….”
사람들은 순식간에 카엘과 켄드릭 주변에 모여 둘 중 누가 이길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리고 급기야 돈을 걸며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카엘에 50실버!”
“나는 켄드릭 경에 금화 1닢!”
“받고 카엘 경에 금화 2닢!”
“받고 켄드릭 경에 두 배로!”
“나도 켄드릭 경! 그래도 이름값이 있는데. 켄드릭 경에 금화 8닢!”
내기 금액이 50실버에서 시작해서 종국에는 금화 8닢까지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걸리는 금액은 대체로 이름값이 높은 켄드릭 쪽에 쏠렸다.
단순 내기에서 도박으로 과열되는 조짐이 보이자, 로스시가 더 두고 보지 않고 끼어들었다.
“다들 그만하게. 이게 무슨 생사를 건 전투도 아니고 단순한 대결인데 무슨 돈을 그리 크게 거나?”
“…죄, 죄송합니다. 로스시 경.”
“죄송합니다. 그럼 내기는 없던 걸로….”
로스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할 것까지는 없고. 나는 카엘 경에 금화 5닢. 딱 여기까지. 더는 안 되네.”
“…네?”
“카엘 경에 금화 5닢. 상한선 금화 5닢으로 하자고. 이러다가 다들 전 재산 걸겠어.”
“아… 네. 큼. 거기 적어. 로스시 경. 카엘 경에 금화 5닢.”
로스시는 내기 판돈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적히는 것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금화 5닢은 이미 땄다.
이런 생각이었다.
카엘과 켄트릭의 대결.
남들은 둘 사이의 승리확률을 반반 정도로 보는 것 같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절대 아니었다.
분명 둘이 붙는다면 카엘의 압도적인 승리일 게 분명했다.
물론 켄드릭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부지방 최강의 기사에다가, 자신을 비롯한 카일킬 상회 호위대를 공포에 물들게 했던 그 시라흐보다도 강한 기사였지만, 저 카엘. 저기 카엘은 그런 상식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인간이 아니었다.
“나도 저기 저 인간한테 내기 금액 모자란 부분 전부.”
“네…?”
한창 내기 명부와 돈을 관리하던 상회 사환이 방금 내기에 끼어든 자를 쳐다봤다.
시라흐가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저 인간이라면 누군가요?”
“저기. 저 인간. 괴물.”
“아… 카엘 경이요?”
“그래. 어차피 저 괴물이랑 켄드릭에 걸리는 돈이 똑같아야 내기가 성립될 거 아냐?”
만약 켄드릭에 걸린 돈이 금화 30닢이면 카엘에게도 똑같이 금화 30닢이 걸려야 어느 한쪽이 이겼을 때 이긴 쪽에서 건 만큼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 그렇긴 한데 그럼 금화 12닢이 부족한데요? 어… 로스시 경이….”
사환이 슬쩍 로스시의 눈치를 봤다.
방금 분명 로스시가 상한선을 금화 5닢으로 제한한 탓이었다.
시라흐는 로스시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봐. 내가 여기서 자객한테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설마 이런 걸로 쩨쩨하게 굴진 않겠지?”
“…뭐. 알겠습니다. 시라흐 경만 특별히 봐 드리죠. 이봐 시라흐 경만 금화 12닢 접수해드리게. 마지막으로.”
“아… 넵. 그렇게 하죠. 저…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사환이 슬쩍 시라흐의 눈치를 살폈다.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카엘에게 금화 12닢을 넣어도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분명 카엘 과 켄드릭의 매치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것은, 누가 봐도 동부최강의 켄드릭이었다.
“흥. 너희들은 직접 보고도 모르냐? 쟤는 나도 이길 수 있어. 쟤가 카엘을? 어림도 없지.”
시라흐가 말하는 ‘쟤’.
켄드릭이었다.
“네…? 그건 좀….”
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라흐와 켄드릭은 같은 3등급 기사였지만, 상당한 수준 차이가 있다고 알려진 탓이었다.
게다가 시라흐가 켄드릭보다 강하다면, 켄드릭처럼 영지를 받고 정착하지 저리 낭인으로 전장을 떠돌지도 않았을 터였다.
사환의 눈빛에 시라흐가 발끈했다.
“뭐야? 내가 쟤한테 진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큼… 돈 주십쇼.”
“지금은 돈 없어. 장부에 외상으로 적어놔.”
“네? 아니 그럼 내기가 성립이 안 되는데요… 지면 어쩌려고….”
“아니, x발. 안 진다고. 적어두라고.”
“아니, 그래도 돈은 확실히 해둬야….”
사환이 용기를 내서 뻗대자, 시라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이 뭘 잘못 처먹고 이리 뻗대나 싶었다.
그러다 결국 엘리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이봐! 만약 내기에서 지면 여기서 일할 테니까, 그때 급여 내놓으라고. 알겠지?”
“네…?”
“알겠지? 급여는 다른 놈들보다 무조건 세 배로. 내가 어제 결투에서도 공을 세웠잖아!”
엘리나는 황당한 얼굴로 로스시와 시라흐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시라흐 경 정도라면 우리 상회에서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물론 우리 상회 내부의 규칙을 잘 지켜주신다는 전제조건하에라면요.”
“이봐, 됐지? 지면 저기 너네 부회장이 돈 대신 내줄 거다.”
시라흐가 사환을 닦달했다.
엘리나가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시라흐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딴 상회가 정한 규칙이 무슨 소용인가?
시라흐의 닦달에 사환이 울상으로 엘리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엘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돈 대신 내줄 테니까 시라흐의 억지를 받아주라는 뜻이었다.
사환이 결국 시라흐의 이름을 내기 명부에 적었고, 그걸 지켜본 시라흐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하하….”
기사의 장갑을 카엘에게 빼앗긴 것도 짜증 나는데, 여기서 금화 12닢을 만회하면 이걸로 미스릴제 장비들이나 한번 알아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금화 12닢이 아니라 금화 100닢이라도 걸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억울할 정도였다.
로스시는 금화 12닢 걸고 좋아하는 시라흐를 보며 일견 공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켄드릭 경이라고 해도 저 카엘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이다.’
로스시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직접 카엘을 옆에서 경험했기에, 금화 5닢까지 과감히 베팅할 수가 있었다.
쏠쏠하게 금화 5닢 들어오면 뭘 할까?
지금부터는 아무 걱정 없이 이런 생각이나 하면 그만이었다.
캉!
그리고 로스시가 딴 돈으로 방패를 새로 장만할 생각을 하는 동안 카엘과 켄드릭의 대련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검이 처음으로 부딪혔다.
카엘은 켄드릭의 검을 수 차례 받아내고 난 후, 널찍이 두세 걸음 물러났다.
기사의 장갑을 통해 힘 보정을 조금은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켄드릭을 힘으로 완전히 압도할 수가 없었다.
‘아 썅. 아직 회복이 덜 됐네.’
특성을 사용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은 평소에 낼 수 있는 힘에 훨씬 못 미치는 정도만 검에 실을 수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켄드릭에게 밀리는 감마저 있었다.
켄드릭은 느리면서도 빠르고, 또 가벼운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거력을 담아내는 현란한 검술을 구사했다.
카엘이 오로지 강공으로만 일관하는 것에 비해, 켄드릭은 적재적소에 힘을 분배하면서 카엘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연히 체력 분배에서 켄드릭이 우위에 있었고, 카엘은 안 그래도 특성 사용 이후 체력이 바닥이 났던 터라 시간이 갈수록 켄드릭을 상대하는 게 힘에 부쳤다.
시라흐는 켄드릭을 상대로 맥을 못 추는 카엘을 보며,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저 새끼가 그새 뭘 잘못 먹었나?”
지금껏 제놈이 대가리를 깨왔던 기사가 몇 명인데, 고작 켄드릭 따위를 상대로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켄드릭은 기껏해야 자신과 동급인 3등급 기사가 아닌가?
“야! 야이 x발놈아! 제대로 안 할래!”
설마 싶긴 했지만, 금화 12닢을 여기서 날릴 수는 없었다.
아니 실질적으로 금화 12닢이 아니라 금화 24닢이나 마찬가지였다.
100%로 얻어야 할 금화 12닢이 사라지고, 마이너스 금화 12닢이 되는 거니까.
‘켄드릭 저놈이 제법 검술을 체계적으로 갖춘 것 같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카엘이 그걸 상대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시라흐가 부들거리는 동안, 카일킬 상회의 다른 기사들도 싸움을 구경하며 저들끼리 한두 마디씩 주워섬겼다.
“카엘 경이 밀리는데요?”
“그러게. 뭐지?”
“역시 진짜 기사한테는 아무리 카엘 경이라도 힘든 걸까요?”
“진짜 기사?”
“체계적인 고급 검술을 배운 기사 말입니다. 처음이잖아요. 그런 상대와 카엘 경이 싸우는 것이.”
“아… 그렇네.”
지금껏 카엘이 상대한 자들은 모두 용병들이었고, 가장 강한 상대였던 시라흐도 낭인 출신이었다. 즉, 카엘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정식 기사와는 처음 싸우는 셈이었다.
‘체계적인 고급 검술이라서 저렇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시라흐는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고급 검술을 배우지 못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다.
직접 검을 맞대본 카엘은 결코 저정도가 아니었다.
“고급 검술이니, 뭐니 그딴 거 저 괴물한테 통할 것 같어? 야, 뭐하냐고?!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시라흐가 카엘의 꼴사나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외침이 카엘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켄드릭은 시간이 갈수록 힘, 체력, 속도, 그리고 검술까지 모든 면에서 카엘의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카엘은 힘만 믿고 있을 게 아니라, 이럴 때를 대비해 검술도 좀 익혀 놓을 걸 하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민첩이 특성 사용 후유증에 영향을 덜 받는 덕분에, 빠른 움직임으로 커버를 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부웅!
자연스럽게 카엘의 손이 바빠졌고, 켄드릭의 검이 옆구리를 간신히 빗겨서 훑고 가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와….”
켄드릭은 켄드릭대로 거의 잡을 듯 잡을 듯한 놈이 계속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게 짜증이 났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건가? 이런 걸 기사의 검이라고 할 수가 있나?”
“잠시만요! 댁, 꽤 하네. 지금 상태에서는 무리겠어요.”
카엘에게 다시 한번 쇄도하려던 켄드릭의 검이 멈칫했다.
“패배를 인정하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목이 말라 가지고. 저기 한 모금만 먹고 할게요. 괜찮죠?”
“…….”
침묵은 곧 긍정.
카엘은 여러 관중들 사이에서 쿤타를 찾았다.
“어… 거기. 아저씨.”
“어… 어.”
쿤타는 카엘의 신호를 받고 기다렸다는 듯, 얼른 수통 하나를 카엘에게 내밀었다.
찰랑.
수통 안에 담겨있는 트롤의 피 냄새가 오늘따라 향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