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마을 주민들의 상태를 봤을 때, 다른 영지의 영지민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카쉬 지방이라는 황량한 지방에서 영지민들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이곳 카쉬 지방을 접수한 드라니 용병대가 최소한 영지민들에게 착취 수준의 통치를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최악이었던 치안 부분에 있어서는 도움이 된 부분도 있었을 터.
그렇다면 어차피 영지를 다스릴 인력이 필요하고, 또 수도 론디니아로 외유를 해야 하는 카엘의 입장에서 굳이 이들을 다 죽일 필요는 없었다.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는 게 좋다는 계산이 서자, 카엘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이들을 제압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라흐! 뒤를 받쳐! 저놈부터 잡는다.”
카엘의 시선은 오로지 드라니에게 쏠렸다.
저놈이 대장이니 저놈만 잡는다면, 나머지는 지리멸렬할터.
붕!
카엘이 검을 옆으로 세워 우선 달려드는 용병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크아아아아악!”
검을 옆으로 세운 터라 머리가 잘려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코뼈가 부러지고 이가 몽땅 빠지는 참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좌측에서 달려들던 용병은 어깨가 부서졌고, 오른편에서 달려들던 용병은 다리가 부러져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강 손을 섞어보니 이들이 수준이 파악됐다.
시라흐 기준으로도 위협적인 놈들은 없는 수준.
“시라흐! 웬만하면 죽이지는 마! 시간 좀 끌고 있어!”
“어? 죽이지 마?! 흐헛! 왜! 시발!”
시라흐가 사선으로 검로를 꺾어 용병의 목을 찌르려다 급히 어깻죽지로 검로를 틀었다.
“크윽!”
어깨를 찔린 용병이 검을 떨어뜨리면서 공격 능력을 상실했지만, 당연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시라흐는 사람 하나를 살리고서도 욕지기가 절로 나왔다.
에라이 썅!
망할 카엘 때문에 이무 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카엘의 말 한마디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이 손끝은 또 뭐고?
시라흐는 왠지 모를 자괴감이 몰려와 카엘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야! 카엘! 왜인지 이유나 말해!”
카엘은 시라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용병들을 헤치고 드라니에게 도약했다.
탓!
“일로 와! 도둑놈 새꺄!”
드라니는 갑자기 다른 용병들은 다 제쳐두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놈을 보며 눈이 급격히 커졌다.
안 그래도 무슨 여유인지 검면으로 수하들을 후두려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갑자기 도약을 하는 위치와 거리도 말이 안 됐던 탓이었다.
‘저기서 뛰는데… 이게 된다고?’
놈의 쌍검은 이미 코앞이었다.
드라니는 어쩔수 없이 서둘러 검을 곧추세웠다.
캉!
“흐헉!”
카엘의 쌍검과 드라니의 검이 부딪혔고, 드라니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엄청난 거금을 들인 미스릴제인 덕분에 검 자체가 단숨에 잘려 나가진 않았지만, 드라니로서는 처음 감당해보는 엄청난 힘이 그를 짓눌러 내려오고 있었다.
“크윽! 대, 대체….”
카엘? 카엘이라고 했나?
카엘의 검을 마주한 지 찰나도 지나지 않은 순간이 흘렀지만, 벌써부터 양팔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내버리고 팔을 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지만, 드라니 용병대의 대장으로서 그 럴수는 없었다.
불룩.
순간 드라니의 팔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아아악! 나는 드라니! 드라니 용병대의 대장! 드라니 자작이다!”
“어? 어어?”
드라니 필생의 힘이 지금 이순간 검에 실렸다.
“드라니 자작이다아아!”
“…….”
“드라니 자작이다아아아아악!”
“…….”
“드라니 자작… 드라니… 드라….”
“…하아… 뭐하냐?”
드라니의 얼굴이 시벌게 졌다.
나름 필생의 힘을 쏟아부었것만, 그 검에 맞서고 있는 카엘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카엘은 하품까지 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 상황.
“드….”
“뭐 하냐고 이 새꺄!”
카엘은 드라니와 맞서고 있던 검을 뗌과 동시에, 비어있는 드라니의 옆구리를 타니스의 검의 옆면으로 힘껏 후려쳤다.
캉!
콰직!
“크어억!”
검과 마찬가지로 미스릴이 쓰인 드라니의 갑옷이 평범한 강철 갑옷처럼 구겨졌고, 드라니는 저기 구석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대, 대장!”
“자작님!”
“대장이 어떻게?!”
“역시 카엘!”
“광기사! 카엘! 광기사! 카엘!”
드라니가 쓰러지자 시라흐와 슈테트는 환호성을 내질렀고, 용병대원들 사이에서 크게 동요가 일었다.
드라니가 카엘과 검을 맞대고 구석에 쓰러진 채로 쳐박히기까지 걸린 시간이라는 것은 1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어떤 대응이라는 것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카엘은 바닥에 널부러진 드라니에게 다가가 그 가슴에 발을 올려두었다.
여차하면 갑옷과 함께 갈비뼈를 부숴버릴 태세였다.
“크으… 사, 살려….”
신음성을 내뱉는 드라니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갑옷 역시 검과 마찬가지로 미스릴제였지만, 이놈이라면 갑옷도 충분히 망가뜨리고 갈비뼈와 장기를 터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잠시였지만 직접 겪어본 놈의 힘이라는 것은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야. 살려줄 테니까. 항복하는 거냐?”
“무, 물론.”
드라니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만 하면 살려준다니, 노예병으로 팔릴지라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쟤들은? 쟤들도 항복하는 거겠지?”
카엘이 드라니의 가슴에서 발을 치우고, 용병들을 가리켰다.
드라니는 이번에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외쳤다.
“다, 당연히. 모두 무기를 버려라! 항복이다! 모두 무기를 버려!”
“대장! 기껏해야 세 명인데! 정말 항복합니까?!”
“맞습니다, 자작님! 기습에 당하신거 같은데 금방 구해드리겠습니다!”
드라니가 항복하라고 했지만, 용병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드라니의 얼굴이 다시금 시뻘게졌다.
“야이… 크윽… 야이 새끼들아! 닥치고 항복하라고! 이자는 서, 성검(聖劍) 루앙 이상이다!”
성검 루앙 이상?
드라니의 말에 용병들 사이에서 어떤 불신과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네? 저놈이 그 루앙보다 더 쎄다고요?”
“설마….”
“에이….”
대륙의 제1종교 유스틴교에는 종단에서 자랑하는 두 명의 성기사가 존재했다.
한명은 성창(聖槍) 비에르.
다른 한명은 성검(聖劍) 루앙이었다.
성창 비에르는 대륙 10강 중 1인으로 대륙 공인의 1등급 기사였고, 성검 루앙은 그에 못 미치지만 역시 대륙에 널리 알려진 천외천이라는 2등급의 기사였다.
좀처럼 종단 밖으로 외유를 하지 않는 성창 비에르와는 달리, 성검 루앙은 자주 대륙을 횡단하며 도전자들에게 결투 대련을 받아주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드라니 역시 루앙과 만나 용병대의 부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결투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루앙은 결투 상대를 죽이지 않을뿐더러, 만에 하나라도 이기기라도 한다면 대륙 전체에 엄청난 명성을 떨칠 수가 있으니, 결투 대련 상대로는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결투의 결과는 다섯 수 만에 드라니의 패.
루앙이 선수를 양보했음에도 다섯 합 만에 패했으니, 실질적으로는 네 수만에 패한 셈이었다.
그리고 드라니는 지금 그때 그 루앙보다, 지금의 카엘이 더한 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용병들은 이미 대륙에 널리 명성이 퍼진 루앙보다 눈앞에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더 강하다는 드라니의 말에 쉽게 수긍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새끼들아! 직접 싸워본 내가 그렇다는데, 네놈들이 뭔데 아니라는 거냐?! 맞다니까?! 그러니 항복해! 다 뒈지기 싫으면!”
절규에 가까운 드라니의 외침에 용병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지금 항복은 좀….”
“그러다 노예병으로 팔리기라도 하면….”
드라니로서는 분통이 터질 반응이었다.
“크윽. 새끼들이 진짜. 나중에 보자.”
“하아….”
카엘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다시 검을 세게 쥐었다.
역시 거칠게 살아온 용병들이라 그런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쉽게 목숨을 내맡기지는 않는 듯했다.
타앗!
카엘은 용병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고, 카엘의 검이 휩쓸어가면서 한동안 용병들의 뼈 부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장원 안팎에 진동했다.
절반쯤 되는 용병들이 나자빠졌을 때, 그나마 두 발로 서 있는 용병들은 드라니가 했던 말을 곱씹을 수가 있었다.
‘성검(聖劍) 루앙 이상이다!’
정말로 루앙 이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범접하는 강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손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50여 명의 용병들이 당했다.
“시, 시발 진짜 루앙 이상이야?”
이런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지자 용병들은 더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목숨까지 걸 수는 없었다.
탱!
챙!
용병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쓰러진 자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모두 카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라흐! 슈테트! 이놈들 전부 무장해제 시켜!”
“네! 카엘 경!”
“…….”
슈테트는 우렁차게 대답했고, 시라흐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팔짱을 꼈다.
그러다 시라흐가 슈테트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너가 알아서 해라.”
“네?”
“그럼 내가 하리? 나 바지르의 시라흐인데?”
“아….”
“쯧. 빨리해. 저놈 또 지랄할라.”
“…넵.”
그러고 보니 지금껏 카쉬 지방에 오면서도 검 쓰는 일을 제외하고는 시라흐가 직접 움직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카엘이 슈테트와 시라흐 둘에게 명령아닌 명령을 내리면 잡일은 다 슈테트가 떠맡아 하는 구조였다.
이번에도 시라흐의 감시 하에 용병들의 무장 해제가 조금씩 더디게 이뤄졌다.
그리고 무장해제가 다 끝나갈 무렵 드라니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근데 누구십니까, 진짜?”
카엘이 몸을 벽에 기댄채로 앉아있는 드라니를 슬쩍 보다가 답했다.
“카엘. 카엘 드 카쉬 남작이다.”
“네? 카쉬 남작? 이곳 카쉬는 점유하고 있는 귀족 가문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장해제 작업을 모두 끝마친 슈테트가 잔뜩 신이 나서는 끼어들었다.
“…….”
드라니의 반응과 상관없이 슈테트의 설명이 시작됐다.
“그게 그러니까요, 여기 카엘 경이 말이죠….”
슈테트의 설명이 끝나갈 무렵 드라니를 비롯한 용병대원들은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허… 데, 데미안이 죽었다고요? 여기 카엘 경한테?”
“데미안이 죽어?”
“마궁 데미안이?”
슈테트는 제가 한 일인 양 잔뜩 어깨가 올라온 채로 말했다.
“여기 카엘 경께서 데미안을 죽이고 이번 새번 영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셨고, 그 결과 분봉받은 땅이 이곳 카쉬 지방입니다.”
“음….”
드라니는 엄청난 말에 침음성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엘의 실력이라면 그 마궁 데미안을 진짜 죽였어도 이상하지는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되는 실력자가 자신의 영지를 불법 점유한 용병대를 어떻게 처분할까 걱정이 덜컥 들었다.
“카엘 경. 우리를 살려둬서 어쩌려는 겁니까? 노예병으로 파는 겁니까?”
카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아니. 여기서 일 좀 하고 있어라.”
“네?”
“나는 론디니아에 다녀와야 하니까. 여기서 하던 대로 치안유지하고 세금도 걷고 일 좀 하고 있으라고. 아, 강도질은 하지 말고.”
“저, 정말입니까?”
“물론. 그러려고 살려둔 거니까.”
“아….”
죽이지도 않고, 노예병으로 팔지도 않는다니.
요즘 같은 난세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뭐, 어차피 노예병으로 판다고 해도 그동안 모을 재물을 가지고 어느 정도 선에서 협상해볼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드라니는 나름 감격을 해서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감사… 감사합니….”
“아, 근데 창고가 어디야?”
“감…네?”
“아니, 아까 보니까 검이랑 갑옷이랑 좋은 거 쓰는 거 같더라고. 대체 돈을 얼마나 모은 거야 여기서.”
“그, 그거야 꼭 여기서 모았다기보다는 예전부터….”
“내놔.”
“네…?”
“내놓으라고. 다.”
“…….”
드라니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