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저깟 화살.”
에식스는 드라니가 쏘아 보낸 화살을 피하거나 방패를 들어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판마의 갑옷에 대한 믿음이었다.
고작 화살 따위로 갑옷을 뚫고 자신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믿음.
그리고,
팅!
역시나 드라니가 쏘아보낸 화살은 두터운 갑옷으로부터 보호받는 가슴어림에 부딪혀 그대로 떨어지는 듯 했다.
“크큭. 봐봐. 그러게 내가….”
가슴에 부딪혀 떨어지는 화살을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던 에식스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휘이이이익!
언제 쏘아보냈는지 화살이 연이어 날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슴어림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두 번째 화살을…?’
분명 두 번째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까 화살이 갑옷에 부딪혀 떨어질 때쯤, 군중들의 반응을 보느라 잠시 한눈을 팔았던 그때인가?
그 짧은 순간에?
화살이 가까이 올수록 에식스의 동공은 급격히 커져 갔고, 놈이 쏘아 보낸 동작과 화살에 대한 생각들이,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무수히 스쳐 지나갔다.
‘아….’
퍽!
“크…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화살이 이번에는 갑옷으로 보호는 받는 몸통이 아닌, 투구로부터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공간.
에식스의 왼쪽 눈을 파고들었다.
“크으아아아아아악! 시, 시발!!!”
에식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순간 어젯밤 부관 르퍼트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드라니 드 안할트. 공식적으로 용병 길드에 등록된 등급은 4등급입니다. 드라니 용병대라는 100명 정도 규모의 용병대의 대장이었습니다.’
‘4등급? 그럼 문제없겠네. 거기. 포도 좀. 음….’
에식스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시녀가 먹여주는 포도를 입에서 우물거렸다.
8강전을 앞두고 자신의 부관인 르퍼트의 보고가 있었지만, 분명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었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
‘뭐? 뭐가 더 있어? 희귀장비가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지난 라운드에서 그자가 싸우는 것을 봤을 때, 평범한 4등급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활 솜씨가 제법….’
‘뭐야, 그럼 됐네. 레이나~!’
에식스는 더 이상 르퍼트의 보고를 들을 수 없었다.
‘아이. 에식스 니임. 꺄악! 거기는 간지러워요~!’
자신과 레이나의 본격적인 유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르퍼트가 했던 보고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다.
오죽하면 드라니라는 놈이 검이 아니라 활을 사용하는 궁기사라는 것도 콜로세움에 와서야 알았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르퍼트는 그때 마지막에 분명 활 솜씨가 어쩌구 하는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때 분명 르퍼트는 그런 말을…
“크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에식스의 의식의 흐름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엄청난 고통이 의식마저도 끊어내고 있었다.
대회가 벌어지는 콜로세움은 마치 도서관이라도 되는 듯 침묵에 빠졌다.
심판도, 군중들도 가만히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했다.
그저 에식스의 고통에 찬 비명만 경기장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드, 드라니 드 안할트 승리!!”
얼마간 후에야 심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드라니의 승리를 선언했다.
허나 경기의 승패는 정해졌지만, 드라니는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느새 일련의 기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여 드라니와 에식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놈! 등급을 속였구나! 어서 에식스 경을 모셔가라! 어서! 그리고 코번트리 기사단은 티루스 왕국의 첩자를 포박하라!”
코번트리 기사단의 단장 레녹스는 이대로 드라니라는 자를 그냥 보낼수는 없었다.
아무리 검투 대회라 하더라도 코번트리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의 눈이 화살에 꿰뚫렸다.
지금은 검투 대회라는 형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 에식스의 눈을 맞춘 그 활 솜씨는 절대 4등급의 그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3등급 이상인, 벽을 깬 자만이 쏘아 보낼 수 있는 화살이었다.
“뭐, 뭐야?!”
드라니는 10여 명의 기사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다시 화살을 활시위에 매겼다.
아무래도 에식스라는 놈이 론디아 왕국 고위 귀족가의 자식이다 보니 이 사달이 난 것으로 짐작은 되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투 대회인데!
규칙은 오로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이었기 때문에 규칙을 어긴 것은 없었다.
‘시발.’
드라니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심판을 쳐다봤다.
“시, 심판! 이거 뭐야?! 규칙 어긴 것은 없잖아!”
“…그, 그렇긴 한데…….”
심판이 코번트리 기사단의 단장 레녹스의 눈치를 슬쩍 봤다.
레녹스가 당장에라도 인정사정 보지 않고 검을 휘두를 기세라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뭐가 그렇긴 한데야!”
“그, 그래도 너무 심하긴 했습니다. 화살로 눈을 맞추다니요. 그, 그러다 죽을 수도 있는데요.”
“안 죽었잖아!”
“…….”
“뭐 이런 개판 같은 대회가 다 있어! 이거 왕실 주관 대회 아니야?! 그런 대회를 일개 귀족가의 기사단이 이렇게 망쳐도 되는 거야?!”
“…….”
심판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뭣들 하나?! 어서 저자를 포박하지 않고! 티루스 왕국의 첩자다!”
드라니는 티루스 왕국의 안할트 가문출신이었고, 그런 출신을 들먹이며 티루스 왕국의 첩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뭣들 하는 짓이야! 게다가 등급은 속인 게 아니라 길드에서 등급 승급 절차가 아직….”
“닥쳐라!”
드라니는 활을 들어서 위협을 해보기도 했지만 코번트리 기사단의 기사들은 도저히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다 이길 자신도 없었고.
이쯤되니 진짜 끌려갈 판국이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다급하게 현실적인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급히 찾았다.
“카, 카엘! 카엘 경!!”
분명 저기. 저기 선수 관계자석에 있었는데.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시라흐는 보였지만 무슨 일인지 지금 상황을 전혀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저거 분명 일부러 저러는 거다.
시발 저 새끼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카엘!!
대체 이 중요할 때 어디를 간거야. 이 얼간이는!
드라니가 거의 속으로 절규를 할 때였다.
“뭔 짓거리들이야?”
드라니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서 아주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 카엘 경!!”
“어, 드라니. 이쪽으로 와라. 등신같이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믿고 있었다고요! 근데 카엘 경…! 가고 싶어도 이 새끼들이….”
“이 새끼들…?”
카엘은 슬쩍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한 남자에게 두었다.
그 역시 카엘을 의식하고 말했다.
“레녹스 드 코번트리다. 신분을 밝혀라.”
코번트리 가문의 방계인 레녹스가 먼저 신분을 밝혔다.
“카엘 드 카쉬.”
“카엘 드 카쉬!”
레녹스는 카엘이라는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데이커의 팔을 잘라버려서 론디니아를 진동시킨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카쉬 지방은 어딘지도 모를 작은 지방에 불과했고, 반면 코번트리 가문은 론디아 왕국의 축을 이루고 있는 공작가들 중 하나였다.
감히 카쉬 남작 따위가 코번트리 가문의 행사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어? 나를 아네요.”
“카쉬 남작. 코번트리 가문의 일에 참견하겠다는 것인가?”
“드라니 걔 첩자 아닙니다. 검투 대회 결과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개입을 하는 건 대체 무슨 개뼈다구 같은 짓거리 입니까?”
“개, 개뼈다구? 이런 미친 자가….”
“그리고 코번트리 가문의 일이 아니라 얘는 내 부하예요.”
“이 자와 일행이라고?”
카엘이 거의 울먹거리는 드라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저자 또한 포박하라! 첩자와 한패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어? 나는 새번 백작가의 봉신인데? 이러면 안 될 텐데요?”
카엘은 동부지방의 대귀족 새번 백작가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귀족 세계의 관례상 그 봉신을 친다는 것은 작위를 서임한 대귀족과의 분쟁도 염두에 둬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런 논리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런 분쟁들은 대귀족들 간의 적당한 타협이나 어느 쪽 세력이 더 큰가 하는 힘의 논리로 찍어눌러지고는 했다.
“흥, 새번 백작가 따위. 첩자와 한패다! 상관하지 말고, 포박하라!”
레녹스는 새번 영주가 고작 카쉬 남작 따위의 일로 감히 코번트리 공작가를 상대로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분쟁을 일으킨다면 적당히 타협하거나, 찍어누르면 그뿐이었다.
단장인 레녹스의 명령이 떨어졌고, 기사단의 기사들이 드라니에 이어서 카엘에게도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카강!
스억!
카엘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에게서 피가 튀었고, 순식간에 팔 4개가 후두둑 땅에 떨어졌다.
“크, 크아아아악!”
“크윽…크으으으으”
“아… 이, 이놈이 감히…!”
설마 놈이 반격까지 할 줄은 몰랐던 레녹스는 화가 어이가 없음을 넘어서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코번트리 가문의 일을 방해한 것.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상하게 한 것.
모두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대죄였다.
스릉-
레녹스는 처음으로 직접 검을 뽑아 들고 놈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섰다.
2등급 기사인 자신에게 카쉬 남작따위는 애초에 상대가 아니었다.
데이커를 상대로 팔을 자른 것?
자신도 그쯤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다.
데이커가 못난 것이지 저놈이 강한 게 아니었다.
“그만하게!”
레녹스가 당장에라도 카엘에게 짓쳐들려 할 때였다.
중후하고 강한 목소리가 레녹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린채로 차마 검을 더 뻗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체펠린 공작 전하.”
그리고 역시나.
대륙 10강이자 왕국의 최강자.
체펠린 공작이 단신으로 경기장 한복판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 무슨 추태인가?! 경기장에 기사단을 이끌고 난입을 하다니!”
“…오늘 이곳에 계셨습니까?”
“관람을 하기 위해 있었네만. 뭐가 잘못됐나?”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참견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코번트리 기사단은 티루스 왕국에서 보낸 첩자로 의심되는 자를 포박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일행도 마찬가지이고요. 게다가 이미 코번트리 기사단의 피를 봤습니다.”
“애초에 정당하게 끝난 대결에서 자네가 기사단을 이끌고 난입을 한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더 이상 추태를 부리지 말게. 오늘 일은 검투 대회에서 드라니 드 안할트가 승리한 것, 그냥 그뿐이네.”
“크윽….”
레녹스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체펠린 공작이 나선 이상 그의 말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왕국의 또 다른 축인 공작가문의 주인이자 대륙 10강인 체펠린 공작의 말의 무게였다.
세력의 크기만 보자면 코번트리 가문이 더 우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코번트리 가문의 주인인 탁시스 공작의 의중도 묻지 않고 체펠린 공작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오… 크큭.”
카엘은 대충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체펠린 공작의 개입으로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