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모, 목이 아직 붙어있는 건가?
두 팔로 온몸을 훑어봐도 어디 한군데 잘린 곳은 없었다.
흘끔.
드라니는 그제야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카, 카엘 경!”
그리고 드라니의 눈앞에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카엘이 있었다.
“하아….”
드라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엘이 경기장에 난입을 했다면, 일단 목숨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저 엔도버가 카엘을 뚫고 자신을 어떻게 해코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어깨의 통증이 다시 몰려왔다. 결국 드라니는 바닥에 벌러덩 주저앉아버렸다.
“아… 파, 판마의 검이… 파,판마의 검이….”
반면 엔도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등급 희귀 무기이자 전 부속 블랙미스릴로 제작된 판마의 검이 조각나 있었다.
아니, 조각이 아니라 아예 두동강이 나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가 비현실적이라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언뜻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야! 항복이라잖아! 항복!”
“커억!”
그리고 비현실은 곧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현실이 되었다.
카엘은 엔도버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찍어눌렀다.
“크어어억!”
“야 이 새끼야. 항복이라고 하면 말귀를 좀 알아 처먹으라고.”
“커컥… 컥!”
엔도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동공에는 핏발이 섰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어떻게든 자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팔을 떼어내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그게 쉽사리 되지 않았다.
목을 짓누르고 있는 손의 악력과 팔의 힘이 엔도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쟤 항복이야. 네가 이겼어. 알겠지?”
“커… 커억… 제, 제발….”
“뭐라고?”
“…제 …제발 …소, 손 좀….”
“대답을 하라니까?”
카엘은 손을 더 쥐어짜듯 움켜쥐었고, 엔도버의 얼굴이 시꺼멓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엔도버는 입에 게거품을 문 채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
“뭐야? 죽었나?”
카엘은 손에 힘을 서서히 풀면서 엔도버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반응이 없던 엔도버의 몸에서 기척이 왔다.
“…흐어… 흐어어어… 헉…헉…헉….”
“어? 안 죽었네. 그럼 다시….”
“헉… 헉… 자, 잠시만. 알았어. 알았다고! 내,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어…!”
“그래? 진작 그러지.”
카엘은 엔도버의 대답에 만족하고는 엔도버의 목에서 손을 거두었다.
“헉…헉….”
그리고 엔도버는 그제야 벌겋게 손자국이 새겨진 목을 더듬었다.
거의 끊어지는 줄 알았던 목이 그대로 몸에 붙어있었다.
살아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되었다.
“드라니! 뭐하냐! 졌으면 이제 가야지.”
“아… 네! 가, 가야죠! 갈 겁니다. 네.”
드라니는 카엘의 호통에 엉거주춤 일어나면서도 엔도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는 마치 전신처럼 군림하던 엔도버였는데, 지금은 고양이 앞에 쥐새끼가 따로 없었다.
‘이, 이게 카엘…! 저 엔도버를 저렇게까지 어린애처럼 다룰 수가 있다니.’
원래도 괴물 같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저기 앞서가는 카엘의 등 뒤에서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와….”
“하아….”
카엘과 드라니가 사라지고 나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짓눌려졌던 콜로세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장내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심판이 뒤늦게 소리쳤다.
“과, 광폭의 엔도버 경! 승리! 엔도버 경이 드라니 경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게 됩니다!”
허나 심판의 승리 선언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의 환호성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이번 경기의 진정한 승자가 엔도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 * *
“크윽….”
엔도버는 여태 멍이 되어 손자국이 남아있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움푹 파인 손자국을 따라서 까끌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 꼭 아직도 숨통이 조여져 오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종자 아런이 조심스레 건낸 위로의 말은 엔도버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쾅!
“카엘… 그 개자식…!”
오히려 굴욕감과 분노만 더 커질뿐이었다.
천하의 엔도버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개구리처럼 당해버렸다.
마치 밟으면 밟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었다.
2등급의 반열에 오른 이후 겪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아니, 처음 검을 잡고 기사가 된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분노 뒤에는 공포가 자리 잡았다.
대회 결승에서 카엘 그놈을 만나게 된다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감.
그래서 결국 엔도버는 카엘과의 대진이 예정된 대회 결승에서도 바로 기권하는 것으로 일찌감치 선언을 해버렸다.
“저… 엔도버 경….”
“아런! 내가 우습나? 옆에서 얼쩡대지 말고 물러가 있으라고!”
“그, 그게 아니라 레녹스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레녹스가…?”
“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아….”
엔도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레녹스가 무슨 일로 왔는지 단번에 짐작이 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판마의 검이 부서진 것을 탓하러 왔을 터였다.
게다가 드라니의 사지를 레녹스의 청탁대로 자르지 못한 것, 마지막으로 결승에서 카엘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까지.
레녹스의 방문은 마치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찾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가라고 할까요?”
“…가 있어. 갈 테니까.”
“네?”
“먼저 가 있으라고! 갈 테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하아….”
엔도버는 다시금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쨌든 레녹스, 그 뒤에 있는 코번트리 가문과의 채무 관계는 해결을 해야만 했다.
코번트리 가문은 엔도버로서도 갚아야 할 빚을 마냥 뭉개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엔도버는 이제 곧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게 될 저택의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금광에 투자를 한다는 게 크게 잘못되는 바람에 결국 론디니아에 있는 집까지 넘어가게 생겼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검투 대회가 중요했던 건데….’
덜컥.
엔도버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역시나 레녹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거만하게 탁자 위에 두 발을 올린 상태로.
* * *
드라니와 엔도버의 준결승전에 미친 파장은 생각보다 더 컸다.
우선, 카엘과 4강전을 치러야 할 상대가 지레 겁을 먹고 기권을 했다.
광폭의 엔도버가 그렇게 당하는 것을 봤는데, 어떻게 맞붙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카엘은 결승으로 자동진출.
게다가 카엘과 결승에서 맞붙어야 할 엔도버까지 결승을 앞두고 일찍부터 기권을 해버렸다.
결국 이번 검투 대회는 4강전과 결승전을 치루지도 않은 카엘의 우승.
“…이렇게 우승을 한다고?”
엔도버의 기권 소식을 듣고 황당함을 넘어서 얼이 빠진 시라흐가 중얼거렸다.
4강전에서 싸워야 할 상대가 기권한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가지만, 설마 엔도버까지 기권을 할 줄은 몰랐다.
결과적으로 카엘은 딱 세 번 싸우고 우승을 한 셈이었다.
“그러게? 이게 되네. 물론 그게 다 이 몸의 위대함 때문이지만. 하하하”
“맞습니다, 카엘 경! 이 모든 게 카엘 경께서 위대한 덕입니다.”
카엘이 자화자찬하자, 어느새 카엘의 신봉자가 되어버린 드라니가 맞장구를 쳤다.
드라니로서는 이번 대회에서만 카엘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명 받은 터라 카엘의 추종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엘의 자화자찬과 드라니의 아부가 십여 분간 이어지자 시라흐는 버럭 짜증을 냈다.
“적당히 좀 해! 미친놈들아. 가만히 듣자 듣자 하니까 몇십 분을 그 지랄을 하고 있네.”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냐. 내 덕에 돈 번 주제에.”
“뭔 소리야?”
“잊었어? 내기 배당금. 너네 둘다 금화 100닢씩은 받을걸.”
“아… 맞네.”
시라흐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엘이 우승을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보니, 우승자 내기 배당금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제발 카엘이 우승해줘!’ 같이 간절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생각보다 배당금이 적어서 조금은 섭섭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카엘 경! 정말 감사드립니다. 카엘 경 덕분에 저도 금화 100닢이나 받게 됐어요!”
드라니는 내기 배당금을 받게 된 것을 가지고 또 카엘을 찬양했다.
카엘은 드라니가 이 정도까지 자신의 신봉자가 됐다면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혹시 조금만 줄 수 있나?”
“역시 카엘… 네?”
“금화 100닢이나 받게 됐으니까. 한 10닢쯤은….”
“에이. 카엘 경 역시 농담 도 잘하십니다. 하… 하….”
“농담 아닌데.”
“…그건 아니죠.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실망입니다. 카엘 경.”
드라니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정색을 했다.
카엘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렇지?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하…하하하”
“그렇죠? 역시 카엘 경! 유머감각도 탁월하십니다.!”
“…저 등신 새끼들.”
시라흐는 점점 가관이 되어가는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 어색함이 가라앉을 때쯤 불쑥 물었다.
“야, 카엘. 근데 너 우승상금 어떡할 거야?”
“뭘 어떡해? 뭔 소리야?”
“아니 그게 아니라. 자작으로 승작을 할 거야, 아니면 금화 300닢으로 우승상금 받을 거야. 둘 중에 뭘 할 거냐고.”
이번 검투 대회에서 우승자는 금화 300닢을 우승상금으로 받거나, 남작 이하의 신분인 경우에는 우승 상금 대신 귀족 작위 서임 혹은 작위 승작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음….”
시라흐의 질문을 카엘은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사실 이 문제는 대회에 참가 할 때부터 고민을 하고 있던 문제였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자작으로 승작을 하는 게 당연히 맞았지만, 한편으로는 금화 300닢도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시라흐는 심각하게 고민하는듯한 카엘을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와… 이 새끼 이걸 고민하고 있네. 미친놈인가. 애초에 자작 되고 싶다고 참가한 거 아니었어?”
“그, 그건 그렇지만…돈이… 크윽… 내 돈! 그냥 둘 다 주면 안 되는 거냐고! 치사한 국왕 놈!”
카엘은 뒷머리를 쥐어뜯었다.
결국에 선택은 뻔했지만, 선택되지 못할 나머지가 너무나 아쉬웠다.
“이걸 왕을 욕하고 있네. 그럼 그냥 금화 300닢 받던가.”
“아, 아니야. 그래도 승작은… 해야겠지.”
카엘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금화를 포기하고 자작으로 승작을 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승작을 위해 참가한 대회였고,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