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어쩌면 앞으로 대륙 10강은 대륙 11강이 될지도 몰라.’
체펠린 공작이 카엘을 두고 한 말이었다.
엔도버는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 그때 체펠린 공작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정말인가?
앞으로 대륙은 대륙 10강이 아니라 대륙 11강의 시대로 들어가나?
대륙 10강의 1인이라는 체펠린 공작과 검을 직접 섞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 수준이라면 체펠린 공작이라 하더라도 결코 쉽게 이기진 못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이봐요, 엔! 엔!”
“…어?”
“뭘 저 정도 가지고 넋 놓고 보고 있어요? 저 정도야 당연한 거지.”
시라흐는 엔도버에게 카엘을 두고 괜히 우쭐거렸다.
마치 동네 뒷골목 에서 뒤를 봐주는 형을 자랑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크음… 저기 도망가는 기사나 가서 죽이지 그러나? 놓치면 큰일 날 거 같은데.”
“어…?”
시라흐가 한눈을 판 사이에 기사 한 명이 카엘의 검을 피해 저택 담벼락 쪽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시라흐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저 기사를 놓치게 된다면 카엘이 얼마나 지랄을 할 것인가?
게다가 중요한 건 자신이 놓치는 모습을 엔도버가 봤다는 것이었다.
엔도버의 성격을 잘은 모르지만 만약 카엘에게 동시에 추궁을 받는다면 자신이 본 것을 카엘에게 술술 말할 것이라는 것은 무조건 확신할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라흐는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도망을 치는 기사에게 뛰어들었다.
아무래도 기사들은 육중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고, 시라흐는 간소한 흑의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잡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어딜 도망가!”
“크억!”
시라흐는 무사히 따라잡은 기사의 목젖을 단번에 꿰뚫어 버리고 검을 털었다.
생각보다 코번트리 기사단의 숫자가 적었고, 더 이상 지원 병력이 나오질 않는 것을 보니 저택 안에 있는 기사단의 수도 이게 끝인 모양이었다.
본래 코번트리 기사단은 질도 질이지만 500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는데, 지금 카엘과 맞붙고 있는 기사단의 수는 기껏해야 백여 명 남짓이었다.
기사단이 여기에 없다면 어디론가 빠졌다는 뜻이었다.
설마 탁시스 공작도…?
시라흐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와중에 카엘이 소리쳤다.
“야! 시! 뭐해?! 저기도 도망가잖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어느새 코번트리 기사단의 단장 레녹스가 십여 명의 기사들을 더 대동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더 이상 엔도버는 탈주하는 기사들이나 잡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엔도버가 레녹스를 상대하고 있는 동안 카엘은 나머지 기사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누구냐…?”
“…….”
레녹스의 물음에 검을 맞대고선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은 2등급 기사였다.
저기 다른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카엘이라고 짐작되는 이도류를 쓰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다른 놈은 쉽게 처리를 할 수 있어야만 했다.
허나 그게 안 됐다.
카앙!
카강!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의 수준이나 장비는 레녹스가 우월했지만, 상대의 폭발적인 검술은 단 한순간의 틈에 레녹스의 목을 꿰뚫을 듯 움직였다.
휘익!
캉!
한차례 더 상대의 검을 간신히 막아낸 레녹스는 두어 걸음 물러난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강한 파괴력과 속도를 둘 다 갖춘 폭발적인 검술.
직접 검을 섞어본 적은 없었지만 짐작이 되는 사람이 한사람 있긴 했다.
“엔도버… 엔도버인가? 허… 설마.”
레녹스는 처음 소란을 듣고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병력의 대부분이 죽어버린 시체의 수에 놀랐고, 침입자가 단 세 명에 불과하다는 것에 두 번째 놀랐다.
그리고 침입자 중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주는 한 명이 하필 이도류를 쓰고 있는 바람에 세 번째 놀랐다.
그 이후에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마지막으로 또 놀랐다.
설마 엔도버가 카엘과 함께 감히 코번트리를 넘봤을 줄이야.
“…….”
레녹스가 엔도버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했음에도 정작 엔도버는 말없이 레녹스의 목을 노릴 뿐이었다.
도망치는 자 없이 모두 죽이면 정체가 탄로 날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먼저 밝힐 필요는 없었다.
“미쳤군. 엔도버! 미친 건가! 감히 코번트리를 넘봐? 감히?!”
“…….”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지 그러나? 하… 어이가 없군. 카엘을 죽이라고 했더니 그 카엘과 손잡고 코번트리를 넘보다니…!”
엔도버가 코번트리를 넘본 것도 화가 날 일이었지만, 카엘과 손을 잡았다는 것도 분노가 치솟을 일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결과만 보자면 엔도버는 코번트리보다는 카엘을 더 무서워하고 그와 손잡았다는 뜻이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녹스는 엔도버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코번트리는 강하다.
카엘 따위보다 훨씬 강하다.
이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레녹스는 이런 생각과 동시에 같이 온 기사들에게 손짓했고, 곧 그 기사들이 엔도버를 앞뒤로 포위했다.
“하아… 하아….”
카엘은 기사단을 본래 상대하던 기사단을 거의 다 처리했지만 점점 숨이 가빠져오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도망자도 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카엘을 더 힘겹게 만들었다.
게다가 슬쩍 보니 엔도버 역시 레녹스가 가세한 탓에 사면초가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시라흐는 감히 엔도버를 도우러 갈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간간히 도망쳐 나가는 기사들이나 때려잡을 뿐이었다.
“…시이발. 저 새끼는 항상 왜 제대로 안 싸우는 거 같지?”
그래도 3등급 기사인데 너무 활약이 미미한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지금 맡고 있는 역할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스억!
“커억!”
카엘은 기사 한 명의 목을 더 쳐버리고는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지금인가? 하아… 하아….”
다시 한번 슬쩍 둘러봤다.
엔도버는 여전히 힘겨웠고, 자신은 지쳐 있었다.
확실히 지금인 듯싶었다.
‘특성 발동, 전장의 사신!’
팟!
[특성, 전장의 사신(E)이 발동됩니다. 높은 힘 능력치와 민첩 능력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공격력과 민첩성이 각 120% 상승합니다.]
[낮은 특성 등급의 영향을 받습니다. 특성 발동 제한 시간 2분.]
특성, 전장의 사신이 발동되자 전신에 힘이 폭발했다.
종전에 방패를 버리고 이도류를 착용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의 버프가 전신을 휘감는 듯 했다.
카엘은 먼저 이제 십여 명 남짓 남은 기사들부터 휩쓸어갔다.
이전까지는 체력이 소모됨에 따라서 목이나 어깻죽지와 같은 갑옷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급소들을 되도록 노렸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크아아아악!”
푸와왁!
두터운 갑옷으로 보호를 받던 허리가 뭉텅 잘려나갔고, 순간 방패를 들어 보호하려던 머리는 방패채로 쪼개져 들어갔다.
특별한 검술도, 검형도 필요 없이 그저 검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갈 뿐이었다.
“뭐, 뭐야?”
시라흐는 갑자기 미쳐 날뛰는 카엘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엔도버에게 괴물 같은 카엘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지금 카엘의 강함은 그 익숙한 모습을 한 차원 더 뛰어넘은듯했다.
카엘은 특성 발동 제한 시간의 반의 반도 안 쓴 채로 남은 기사들을 정리하고는 레녹스 쪽에서 엔도버를 압박하던 기사들까지 덮쳐갔다.
“저, 저자부터! 저자부터 상대하라!”
레녹스가 당황하여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크아아아아악!”
“바, 방패! 방패를 들어 막아라! 합격술… 커억!”
걸리는 것은 모조리 잘라버리는데 기사들의 합격술이 빛을 발할 수가 없었다.
후두둑.
엔도버는 자신을 위협하던 기사들의 피로 목욕을 하며 잠시 동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저 검에 맞서지 않기로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레녹스!”
엔도버를 압박하던 기사들까지 모조리 정리한 카엘은 복면을 아래로 내리고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어차피 이제는 도망칠 기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카, 카엘! 역시 너였나?!”
“레녹스. 왜 나를 죽이려고 했나?”
“크윽… 광폭의 엔도버라는 자가….”
레녹스는 순간 카엘이 아니라 엔도버로 짐작되는 자를 노려봤다.
만약 저자가 엔도버가 맞다면 역시 짐작대로 엔도버가 코번트리 대신 카엘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
스르륵.
엔도버는 카엘을 따라서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고 복면을 아래로 내렸다.
“엔도버!”
레녹스는 짐작대로 엔도버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성을 터트렸다.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짐작에 불과할 때와 그 짐작이 확실한 사실이 됐을 때 충격이 다른 탓이었다.
“그러게 왜 되지도 않을 무리한 부탁, 아니 협박을 한 겁니까?”
“크윽. 그걸 말이라고!”
“말이 안 되는 건 레녹스 당신입니다! 저 새끼…크음. 저자가 얼마나 괴물인데! 카엘을 어떻게 죽이냐고 내가!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니 내가 선택을 한 게 아니오?!”
“엔도버. 잠깐만 조용히 해봐. 조용.”
“…….”
카엘이 조용하라고 하자 엔도버의 입이 조개처럼 꾹 다물어졌다.
“하… 하하….”
그 모습을 보고 레녹스는 실소를 흘렸다.
어떻게 광폭의 엔도버가 저렇게까지…
레녹스의 충격과는 별개로 카엘의 말은 이어졌다.
“자, 그러니까 레녹스 당신이 나를 죽이라고 청탁을 한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당신에게 나를 죽이라고 한자는 누구지? 탁시스 공작인가? 아니면 에식스? 지금 탁시스 공작은 어디에 있지?”
“…이, 이겼다고 생각하나? 감히 코번트리 가문을 상대로?”
“누가 시켰냐니까 웬 쌩뚱맞은 소리야? 혼나볼래?”
카강!
카엘이 검을 휘두르자 레녹스가 들고 있던 검이 너무나 손쉽게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스억-
또 한 번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레녹스가 들고 있던 방패가 절반으로 잘려나갔다.
투둑.
이쯤 되자 레녹스로서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엔도버가 왜 카엘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아…”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괴물을 상대로는 평소 자랑이던 냉철한 이성을 붙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사, 살려… 살려줘….”
“일단 말을 해봐. 그러니까. 누가 시켰지?”
“타, 탁시스 공작 전하께서….”
“역시 탁시스 공작인가? 그럼 지금 그 탁시스 공작은 어디에 있지?”
“영지… 영지에….”
레녹스가 더듬더듬 말을 마치려는 찰나였다.
스억-
푸와왁!
레녹스의 몸이 갈라지며 피가 뿌려졌고, 시라흐와 엔도버가 그 피를 뒤집어썼다.
“…좀 평범하고 깔끔하게 할 수는 없는 거야? 기술적으로?”
시라흐가 피를 뒤집어쓴 채로 투덜거렸다.
카엘은 검에 묻은 부산물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그런 거 몰라. 그냥 힘으로 하는 거라.”
“무식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