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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사회성의 이면에 따라붙는 그림자는 배타성이다.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무리 짓지만, 무리를 짓기에 다른 자를 배척하니 실로 모순적인 일이다.
그 어떤 사회에서도 다른 자에 대한 따돌림과 핍박은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배타성이야말로 사회적 생물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래된 게임 속 세상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지금 륜스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그 증거가 있다.
“히끅! 끅!”
“아디나, 너!”
해맑게 웃으며 륜스이에게 안겨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겁에 질려 딸꾹질하기 시작한 아이의 모습도,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 언니의 모습도.
차별이 부른 슬픈 단상이었다.
륜스이는 아이들의 급격한 변화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하얀 옆구리에 있는 붉은 반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시지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저 반점을 세간에서 부르는 이름은 죄악의 낙인이었다. 정작 그에게는 저 반점이 자신의 죄를 증명하는 낙인으로 보였다.
“시지...”
들끓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복잡한 감정에 움츠러드는 아이들을 두고 륜스이는 빛바랜 기억을 걷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떨어진 무법천지, 그는 살아남기 위해 많은 죄를 지었다.
사람을 죽인 건 죄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이 냉혹한 세계에서 생존을 위한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 수단에 가까웠으니까.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야 채 지우지 못한 현대인의 가치관이 신세계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괴로움에 며칠을 잠 못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결국,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법.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이 홀로 깨끗한 척, 고결한 척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살인의 무게는 그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륜스이를 괴롭힌 건 지키지 못한 인연, 버려야 했던 목숨 따위였다.
무섭고 차가운 세상에서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들이었다. 꽃처럼 다가와 무너진 그를 피워준 사람들이 꽃처럼 떨어질 때 아무것도 못 했다는 사실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륜스이의 이름에 아무리 찬란한 칭호가 따라붙어 별처럼 빛난다고 한들 그는 필멸자에 불과했으니까. 전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인연을 보낸 기억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을지언정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시지, 시지는 다르지...’
시지족이라는 이름보다 저주받을 족속이나 악마의 자식들 따위로 더 많이 불리는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이 대륙의 어느 종족보다도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강제로 갈기갈기 찢겨 전 대륙에 흩뿌려졌기에 어딜 가나 보일 뿐이었다.
이들은 본래 대륙 중앙에 살던 부족이었다.
오만하고 또 오만한 자들. 세계가 멸망할 때 그들 중에서 세계의 구원자가 나타나 시지를 뭇 민족 중 으뜸으로 만든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받는 차별은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저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그 성질을 못 이겨 비천한 자라고 불렀다고 하니 부족이 해체되어 떠도는 신세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은 넓으니 수많은 종족이 있어 어느 하나 더 우월한 종족도, 덜 우월한 종족도 없다. 하나 오직 스스로 우월하다 믿는 시지 만이 진실로 열등한 종족이다... 허.”
격노한 황제가 시지 해체를 명하며 터트렸다는 말을 주워섬긴 륜스이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분노는 이해하지만 실로 잔인한 처사다.
시지라 하여 오만하고 무도한 자만 있을 리 없거늘 어찌 한 민족을 그리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시지였더냐.”
“으앙! 자, 잘못했어요!”
숫제 울어버리는 아이를 보며 륜스이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불규칙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나뭇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복잡하게 굽이친 문양처럼 그의 마음이 복잡하게 물들었다.
황제의 화를 산 이름 모를 시지가 죽어 백골이 된 지도 수백 년이 지났건만 그들은 여전히 오만불손하고 무도한 자들이었다.
그 후손이 오만하여 그런 것도 아니고, 무도하여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그리 여겼기에 그러했다.
‘삼인성호라...’
륜스이가 시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죽음에 한 발짝 걸친 그를 구해낸 친우를 따라 페나의 이름을 가진 지 십 년쯤 지난 후의 일이었으니, 지금부터는 이십 년쯤 전의 일이었다.
전에 없던 기근이 닥쳤고 사방에서 아사자가 출몰하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이들은 대대적인 인종 말살을 시작했다. 시지의 저주가 재앙을 불렀다는 황명을 믿고서.
위정자의 변명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 믿고 싶었기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기에.
제국과 왕국 곳곳에서 시지를 닥치는 대로 죽였다. 베어 죽이고 찔러 죽였다. 때려죽이고 태워 죽였다.
잔혹한 살육이 광기가 되어 전 대륙을 휩쓸었고, 사람들에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에게 시지는 그저 죽여도 되는 악마였고, 죄인이었다.
륜스이가 그 광기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는 얌전히 시골 변방에 불과했던 페나 영지에서 칩거했을 뿐이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전쟁이었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달려든다.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그들을 죽이려고 미쳐 날뛰는 상황에서 시지라고 얌전히 목을 내밀고 죽을 날만 기다리진 않았다.
온 세상에 흩어져 있기에 인지하기 어려울 뿐이지 숫자만 따지면 적지 않았던 그들은 곧 집결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신화에 전해지는 예언의 땅이자 시작의 땅, 시지(始地)를 찾아 모인 이들을 기다리는 건 토벌이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륜스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추악하고 잔인하며,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었다. 아니, 학살이었다.
본의 아니게 참전한 그 전쟁에서 시지를 베어 넘긴 건 지금도 그의 영혼에 원죄로 남아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아.”
반점을 보며 다시 떠오른 끔찍한 기억을 거닐던 륜스이를 깨운 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씩씩대면서 노려보는 아디라의 모습에 그는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이는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격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맞아! 나 시지야! 동생도 시지야! 우리가 시지란 걸 알고 나니까, 갑자기 데려와서 목욕도 시켜주고 방도 잡아준 게 아까워졌어? 아까 사준 아이스크림도 토하게 하고 싶어?”
아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토해내는 건 분노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그 작은 몸을 괴롭히던 차별이었고, 모멸이었다.
길지 않은 삶, 혹독한 세상에서도 가장 낮은 자가 겪어야 했던 괴로움이었다.
“나도 알아! 사람들이 우리 싫어하는 거! 그래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데려왔잖아!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우리가 불쌍해서 데리고 왔으면 그냥 불쌍하게라도 봐! 세상 하찮은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보라고!”
작은 몸 어디에 저렇게 쉬지 않고 말할 힘이 있는지 아디라는 멈추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의 모습에서, 언젠가 무기 같지도 않은 단검을 들고 자신에게 덤비던 시지족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패기를 흩뿌리는 검호가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을 쏟아내는 마도사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했던 아이의 목을 반사적으로 날린 날, 륜스이는 끝내 무릎 꿇고 말았다. 제 가슴에 사무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날은 륜스이가 자신의 인간성이 얼마나 마모됐는지 깨달은 날이었다.
“아니, 그것도 싫지만! 그래도 사람을 병신처럼 보는 게 차라리 낫다고! 왜 너희는 우리만 보면 표정이 그렇게 싹 변하는 건데!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나도, 아디나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그러냐고!”
“으아앙! 언니, 울지마! 히끅, 언니가 울면 나도 울고 싶단 말야!”
아디라는 끝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름대로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던 사람들이 자매의 종족을 알자마자 얼굴을 바꾸는 건 그녀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그저 이 새끼도 다른 놈들이랑 다른 게 없다고 여기고 넘어갈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토록 서러운 건지, 눈물이 흐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차별 같은 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양이에게는 시지나 사람이나 별다를 것 없을 테니까.
헛된 희망이었다.
아디라는 그녀에게 안겨 앙앙거리는 동생을 감싸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불행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죽어버리면 좋았을 텐.”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다.”
벼랑 끝에 몰려 모든 희망을 잃은 자의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든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끊어졌다. 힘이 풀려 가만히 고개만 들어 올린 아디라에게 한숨을 내쉬는 검은 고양이가 보였다.
반짝이는 푸른 눈이 어딘가 씁쓸한 소회를 품고 메마른 땅에 도달한 빗방울처럼 그녀의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구나. 내가 괜한 반응을 보여서 너희를 불안하게 했어.”
백 년 가까이 살았지만, 아이를 달래는 건 언제나 어렵다.
그래도 수많은 경험으로 깨달은 게 있다면, 아이도 알 건 다 안다는 점이었다. 아직 어리다고 하여 아픈 걸 모르고, 따듯함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니 륜스이가 할 일은 그저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뿐이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난 동대륙 출신이란다. 인수족은 모두 동대륙 출신이지. 시지족이 전혀 없는. 당연히 나는 너희에게 다른 사람들 같은 편견은 없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맥이 풀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부디 이 작은 행동이 아이들의 차갑게 식은 가슴에 작은 온기나마 되길 바라며.
“시지족이 여기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대충 안다만... 나는 사람을 종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가장 선량하다고 여겨지는 종족에서도 가장 악한 자가 나올 수 있고 세상에 다시 없을 악마 취급받는 종족에서 누구보다도 고결한 자가 나올 수 있지.”
오랜 세월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를 전전했다 하여 륜스이의 근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몰아치는 모진 고난과 역경에 지난 세계에서 쌓은 보편적 선의 개념이 깎이고 갈려 희미해졌을지언정, 륜스이라는 사람의 도덕관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지족은 그에게 은인이었다. 잊고 있던 선함을 일깨워줬으니. 그는 가슴에 품은 고마움을 담아 아이를 달랬다.
“중요한 건 어떤 종족으로 태어나는지가 아니란다. 누구도 자신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정말 중요한 건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가다.”
륜스이는 이 사실을 게임 속 엄혹하고 잔인한 세계에 굴러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더 이상 추상같은 법도, 따듯한 온정도 없는 세계였기에 호인은 아름다웠고 의인은 찬란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깨달은 것이 기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돌판에 새기듯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말했다.
“아까 말했지? 나는 너희를 강제로 붙잡을 생각이 없단다. 자유를 찾아 떠난다면, 그 또한 존중할 테니 언제라도 떠나거라.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손을 내밀 거라. 세상 모두가 그 손을 외면하더라도 나만은 잡아주마.”
싱긋 웃는 륜스이의 얼굴을 보며 아디라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혼자 열 낸 것 같아서 그랬다. 아니, 그보다도 기뻐서 그랬을지 모른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디라를 대신해 입을 연 건 아디나였다.
“아저씨...”
“음? 왜 그러느냐.”
“나 추워여. 안아주세여.”
“어이쿠, 머리도 다 안 말리고 그렇게 돌아다녔으니 추울 법도 하지. 어서 이리 오거라.”
사람의 호의에 민감한 아이답게 아디나는 륜스이의 진심을 재빨리 알아채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가 감기라도 걸릴세라 힘차게 안아 들었다.
팔을 뻗어 목덜미를 감고 고개를 파묻은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그가 어색한 공기를 흩어냈다.
“그럼, 아이스크림만 먹어서는 배가 고프겠지?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자꾸나.”
“와! 저녁!”
“배가 든든해야 뭐라도 할 수 있는 법이지 않겠느냐. 우리 아디나는 뭐가 먹고 싶으냐?”
“꼬기! 꼬기 먹고 시퍼여!”
륜스이를 만나고 부쩍 칭얼거림이 많아진 아이의 혀짧은 발음을 들으며 그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주저앉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번째 내민 손은 아까처럼 분홍색 육구가 보였다.
아디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보드랍고 따듯한 감촉의 기억 덕분일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잡자 륜스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아디나 옷부터 입히고 나오거라. 마침 나도 오늘 이 도시에 처음 왔으니 파티인 셈 치고 뭐든 먹고 싶은 건 다 먹어 보자꾸나. 새로운 음식도 맛볼 겸.”
륜스이는 이 여관에 어떤 음식이 있고 무슨 맛을 가졌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난 삶의 기억을 따라 찾아온 여관이라는 것도.
그저 희미하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잠자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자매와 함께 한 작은 파티가 끝난 밤, 륜스이는 벽에 기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만난 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복잡한 생각에 잠 못 이루던 그에게 기름칠을 안 한 경첩이 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옆 방의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곧이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였지만, 초인적인 청력을 가진 그의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는 거냐...’
마음을 다한 말도 상처로 가득한 아이의 가슴에 닿기에는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지나치게 짧은 만남이 문제였을까.
가만히 고민에 빠진 그는 복잡한 마음을 두고 자신을 관조했다.
진정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요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는 검을 챙겨 창문으로 향했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멀어지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옷을 걸쳤다. 두루마기라기에는 너무 트렌치코트 같은 옷이 몸을 감싸고 어지간한 사람 키만 한 칼이 소드 벨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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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마친 륜스이가 창문을 열고 밤거리로 몸을 날렸다. 아이가 떠난 흔적을 따라, 마음을 정하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에 미혹 따위는 없었다.
곧고 굳게 세운 뜻이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