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노검사의 죽음-49화 (49/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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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주인

온갖 소리가 아스라이 귓전을 울린다. 온몸에 힘이 없고 자꾸만 기침이 나온다.

도저히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줬다.

본능적으로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 발을 걸친 상태라는 걸.

‘이대로, 이대로 모든 걸 끝낼 수는 없다.’

오른쪽 귀로는 함께 하자고, 편해지자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명확하지는 않고, 천으로 귀를 막았을 때처럼 뭉개지고 가는 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뜻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달콤한 말이었다.

머리는 멍하고 목도 아픈 상황,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쪽으로 쏠리려는 발을 레오나르도는 허벅지를 때려가며 막았다.

얼굴도 볼 수 없고,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았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자의 본능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오른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망자의 유혹이라는 걸.

‘나는, 나는···’

쉬고 싶다는 욕망,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욕망이 휘몰아치며 자아를 흩어놓는 상황에서도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떠올리려 애썼다.

레오나르도를 레오나르도로 있게 해주는 기억들이 그의 노력에 반응해서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덜컥 버려진 기억.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거지들의 기득권을 무시하고 동냥하다 흠씬 두들겨 맞던 기억.

쓰레기처럼 버려져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보이던 꼬장꼬장해 보이는 얼굴의 기억.

갑작스러운 불행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기억이 그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망자의 세계로 이끌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내 삶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어.’

아무것도 아닌 고아가 멋도 모르고 절하면서 사제의 연을 맺던 기억.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받아준 스승님의 얼굴과 그걸 보고 또 좋아서 헤실헤실 웃었던 기억.

아버지처럼 따랐고, 그런 제자를 아들처럼 아껴주던 스승님과의 기억.

이제는 아득하도록 멀어진 시절의 기억이지만, 분명히 그의 안에 존재했다.

레오나르도는 그 기억의 힘으로 자신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내게는, 할 일이 있단 말이다!’

덜컥이던 몸이 비명처럼 내지른 외침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빛으로, 삶으로.

“헉, 허억. 나, 나는 살았나?”

“살았지. 축하하네, 젊은이. 역시 심력이 나쁘지 않은 친구군.”

기침을 토하며 몸을 일으킨 레오나르도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비로소 눈을 뜬 그에게 부드럽게 웃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기억났다.

결승에서 싸워야 할 상대였다.

반사적으로 검을 찾는 그를 륜스이가 나직하게 달랬다.

“경황이 없나 보군. 승부는 끝났네. 자네와 내가 싸운 건 아니네만. 그래도 끝난 건 끝난 거지.”

“뭐? 승부가 끝···”

륜스이의 말에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간 있었던 일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결승을 앞두고 내키지 않지만, 약의 힘을 빌리려고 하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부분이 생각났다.

그다음부터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흐릿한 느낌이었지만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자기 몸을 차지한 자가 놀라운 무위를 선보이며 륜스이와 겨루던 기억과 정체를 밝히던 기억. 그리고 끝내 륜스이에게 목을 베이는 기억까지.

순차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목을 부여잡았다.

“어떻게··· 분명히 목이 베였는데.”

“살다 보면 사람이 아닌 자를 벨 일도 있더군. 그래서 노력했지.”

온갖 흉흉한 괴물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활보하는 이 세계에서도 검사에게 가장 불편한 적은 따로 있었다.

영체나 부정형의 괴물, 근원을 다른 곳에 둔 존재 따위가 그런 적이었다.

마법 무기를 사용하면 영체에도 타격을 줄 수는 있었지만, 역시 불완전했다.

살아있는 존재를 공격하는 것에 비해 몇 번이고 상대를 더 베어야 했고, 그나마도 완전히 죽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영체는 물론이고 근원이 다른 곳에 있는 존재는 아예 죽일 수 없을 정도니 놈들은 실로 검사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빙의 따위로 산 자의 몸을 차지한 영체는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희생자가 죽어버리니까.

결국, 저런 적을 상대로 검사가 할 수 있는 건 성직자나 마법사의 도움이 있기까지 버티는 것뿐이다.

륜스이는 그런 게 싫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기적과 마법이 세계를 뒤트는 곳에서 검사라고 잠자코 불가능을 받아들이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창안했다.

공간을 뛰어넘어, 피륙 대신 본질을 베는 검을.

“이면 베기라고 하네. 나도 아직 미숙해서 완전히 상처 없이 베는 건 어렵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을 걸세.”

“아···”

륜스이의 말대로 목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대고 있던 손을 떼어보니 몇 방울 피가 묻어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저 거대한 태도에 목이 베인 레오나르도의 몸에 생긴 상처는.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경지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다는 걸 깨달았다.

앞서 있었던 륜스이의 경지를 보면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 보여준 건 단순히 강하다는 말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치를 뛰어넘어, 검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칼 한 자루로 바람과 벼락을 부르고 기적을 일으키는 자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별이라고 불렀다.

상대, 륜스이는 그 별의 영역에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별과 겨루려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가, 그제야 륜스이가 베푼 은혜를 깨달았다.

륜스이는 굳이 어렵게 옷치긴이라는 혼만 베어낼 필요가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빙의한 혼을 베어 죽여도 희생자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깔끔하게 목을 치는 편이 더 편했으리라.

그런데도 륜스이는 레오나르도를 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감사를 담아 지금 해야할 일을 했다.

“다른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지금은 이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오냐.”

헌무제 우승 자격 박탈?

륜스이만 한 검사가 그 정도가 대수겠는가. 저 정도 실력이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

아니, 스스로 세력을 일으켜 적당한 영지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레오나르도는 륜스이에게 어떤 사정이 있어서 헌무제에 출전했는지 모른다.

저런 절세의 검사가 출전할 정도로 대단한 대회가 아닌데도 굳이 출전한 걸 보면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무에 중요하겠는가.

지금 중요한 건 오직 륜스이라는 한 사람이, 레오나르도라는 한 사람을 살려줬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루카 로시는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내용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라는 걸.

“경애하는 시민 여러분!”

그는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륜스이의 말대로 마르코의 수작질에 허둥지둥하며 대응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지금 그가 하는 말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는 지금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루카 로시는 꽤 오래 검술을 수련했다. 나름대로 재능도 있어서 어디 가서 쉽게 죽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방금 륜스이가 보여준 건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저 거대한 칼이 레오나르도의 목을 자르고 지나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목은 잘리지 않았다.

그에게 난 상처라고 해봤자 격전 중에 륜스이에게 베인 얼굴의 상처를 제외하면 피 몇 방울 흐르는 정도.

경지에 이른 검사라면 륜스이의 마지막 검술, 그 자체에 경악했으리라.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검술이라고는 모르고, 알더라도 륜스이의 검에 담긴 깊이를 눈치챌 정도가 아닌 사람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건 역시 칼로 사람을 베고도 베이지 않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기도 했고.

“검으로 사람을 베도 죽지 않는 경지? 아닙니다! 그전에 있었던 놀라운 경기? 그 또한 아닙니다!”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흥미를 끌어낸다.

다음으로는 미묘한 죄책감을 자극하는 단계다. 루카 로시는 지금 자신이 귀족으로서 배운 것을 모두 동원했다.

이번 기회를 살려 륜스이를 떠오르는 태양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는 안코나 검사의 상징이 돼야 했다.

인연이 닿아 거둔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자 하는 륜스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르코가 흠집을 내려고 수작을 부린 게 하루는 고사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수작이 허사로 돌아간 지금이 아니면 륜스이를 온갖 암계로부터 지킬 기회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랐다.

저 강인한 검사라면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악의를 손에 쥔 검 한 자루로 모두 베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적잖이 고생할 것이다.

사람의 악의란 그저 무력만으로 막아내기 어려우니까.

“패자가 승자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승자가 패자에게 존중을 나타내는 이 장면 그 자체입니다!”

사실 대단한 것 없는 모습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흔하지는 않더라도 꽤 보일 법한 모습이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단했다.

“헌무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여왕과 그 부군 될 바다에 바치는 성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최근의 헌무제는 어땠습니까?”

루카 로시는 변질된 헌무제의 현실에서 안코나의 현주소를 깨달았다.

돈에 미쳐 제 세를 과시할 장소로만 여기고 서슴지 않고 승부 조작을 시도하는 도장들, 본래의 의미를 잊고 그저 재밌는 광경이기만 하면 환호하는 관중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편한 도시 지배를 위해 방조하는 위정자들.

제 몸에 생긴 암을 알고도 방치하는 어리석은 환자처럼, 지금의 안코나는 스스로 몰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가장 번영할 때, 가장 짙은 그림자를 키우는 상황. 이제는 그 흐름을 끊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헌무제를 두고 그저 한탕 벌이로 여기는 돈의 망자들과 성사를 제 몸값 올릴 기회로만 여기는 가짜 무인들이 벌이는 한판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중을 비판할 때 중요한 점 중 하나는 대상을 불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루카 로시는 지금도 누가 돈의 망자들인지 찍어서 욕하지 않았다. 가짜 무인도 딱히 특정 도장이나 인물을 지칭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중의 잘못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옳은 말을 거북하게 듣는 대신 동조하게 된다. 참 나쁜 놈이구나. 그런 나쁜 놈은 벌 받아야지. 따위의 반응을 보이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자신을 지칭하는 게 아니니 거부감 없이 나쁜 상황이나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루카 로시가 배운 대로라면 그랬고, 실제로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근 방향을 잘못 잡고 굽이쳐 흐르던 헌무제가 드디어 본래의 모습을 찾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습니까!”

하나둘 루카 로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작은 끄덕임이 이내 파도처럼 좌중을 휩쓸고 환호와 박수가 되어 찰랑대는 바다를 크게 흔들었다.

그 모든 흐름 속에서 루카 로시는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눈에서 스멀스멀 악의가 피어오르는 마르코를 흘깃 봤다.

저자와 륜스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륜스이를 몰락하게 하려는 건 분명히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가 할 일도 간단했다.

륜스이를 지키고 역으로 하나의 상징으로 만든다.

헌무제의 상징이자 안코나 무인의 상징이 된 륜스이는 뒤틀린 흐름을 바꾸는 혁명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동시에 기득권을 치워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루카 로시에게 최고의 패가 되어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단단히 못 박아야 했다.

륜스이가 안코나의 검이라는 사실을.

“저는 이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가만히 추이를 살폈다. 영문을 모르고 그저 박진감 있게 흐르는 상황이 좋아서 환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루카 로시의 말에서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경악했다.

“봉헌검의 주인이 될 자격 말입니다.”

폭탄처럼 떨어진 루카 로시의 말에 환호가 잦아들고 서서히 침묵이 일대에 내려앉았다.

봉헌검의 주인.

본래라면 바다에 바쳐야 할 봉헌검이지만, 그 검을 개인에게 수여한 결과다. 단순히 상징성만 강한 칭호는 아니라서, 봉헌검의 주인은 헌무제에 관련한 모든 걸 감찰할 권한이 있다.

헌무제와 바다와의 결혼식이 안코나 시민에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절대 가볍지 않은 칭호였다.

덕분에 수백 번이 넘게 치러진 헌무제에서 봉헌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4명뿐이었다.

그나마도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산 사람이 100년도 더 전의 사람이었으니 사실상 맥이 끊긴 칭호였다.

루카 로시는 지금 그 명예롭고 무거운 칭호를 륜스이에게 주고자 했다.

“동의합니다.”

누구도 쉬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레오나르도였다.

그는 힘겹게 지탱하던 몸으로도 팔을 들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박수와 함께 한 말은 너무 작아서 사람들에게 닿지 못했지만, 그 뜻만은 사람들에게 닿았다.

홀로 쓸쓸하게 울리던 박수 소리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레오나르도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대한 찬사였다.

“동의한다!”

“옳소!”

제각각 흥분에 찬 외침이 경기장을 해일처럼 뒤덮는 가운데, 루카 로시는 륜스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작 륜스이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의미로 눈을 부릅떴지만, 어찌하겠는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을.

과거에서 돌아온 자와 미래에서 돌아온 자의 격돌에서 유일한 승자는 돌아온 탕아였다.

세상에 절망하고 가문과 절연한 탕아의 화려한 복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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