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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르는 검
몇 번이고 순백의 칼날과 푸른 서리 칼날이 충돌하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작 검을 겨루는 두 사람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세상이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 곳에는 검과 사람만 존재했으니까.
극도로 고조된 의식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전장은 오직 두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잡스러운 그 어떤 요소도 끼어들 수 없는.
‘지독한 놈이야.’
마르코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륜스이의 눈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놈이 다 있나 싶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주제에 속세를 떠난 고승처럼 초탈한 표정이라니. 반칙이 아닌가.
그 힘은 또 어떻고.
공격적인 마법은 죄다 칼 한 자루 휘둘러서 베어 버린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놈의 검격에 휘말린 마법은 힘을 잃고 마법 자체가 분해되어 버렸다.
그나마 통하는 마법은 일단 발동하고 나면 마법적인 영역을 벗어나 그 자체로 현상이 되는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해일이나 산사태 따위의 것들은 마법을 없애도 현상을 없애지는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조금 전의 유성도 베어내긴 했지만, 일단 떨어지기 시작한 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년이 튀어나와서 말도 안 되는 기적으로 사람들을 지켜내서 의미는 없었지만.
그런 주제에 상태 이상은 아예 먹히지도 않는다.
샤일록의 말로는 필멸자 수준을 벗어난 정신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고 하니 공포나 혼란, 정신 지배 따위는 아예 쓸 생각도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놈을 잡으려면 직접 싸워야 한다.
제 놈이 제일 잘하는 영역에서만 목숨을 가져갈 기회를 주니, 이게 이기적인 놈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나.’
눈과 눈이 마주치고 의식이 서로를 휘감는다.
작은 걸음,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예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마르코로서는 평생 처음 느껴보는 공감의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들과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어머니조차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도, 생각도.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좋다고 마을로 기어들어 와서 여인을 희롱하고 나아가 씨까지 뿌리고 가는 작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존재 자체가 죄인 자들을 제 손으로 늘리면서 대체 왜 웃고 떠든단 말인가. 왜 한 번도 아니고 틈만 나면 찾아와서 제 주장과는 반대인 짓을 한단 말인가.
술에 취해 어머니를 범하고 돌아가는 놈을 미행하다 옆구리에 칼을 박아본 건 절대 복수심이나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놈에게 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머니나 다른 마을 사람들이었으니 굳이 그가 나서서 복수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그가 놈을 죽인 건 단지 자신과 놈이 정말로 다른 존재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 같은 인간이었지. 그저 싫어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버러지들.’
살려달라고 꽥꽥 비명 지르던 놈의 눈동자에 스멀스멀 번지는 공포는 그도 마을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해줬다.
옆구리에서 줄줄 새던 피도, 갈빗대를 하나씩 부러트려 뽑을 때 경련하던 몸뚱이도 다르지 않았다.
놈이 찔러 죽인 마을 아저씨와도 같았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먹으려고 잡던 돼지와도 같았다.
그저 아프면 피 흘리고 죽을 위기에 처하면 비명 지르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짐승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 마르코는 환희로 가득했다.
자신이 비밀을 알아냈다. 시지라고 부르면서 학대하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우리는 결코 다르지 않다!
이제는, 어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 같은 사람이라면, 그들도 태어나는 게 죄인 존재가 아니라면 차별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놈의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대충 놈의 시체를 근처 수풀에 던져 버린 마르코의 머릿속에는 어머니께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으니까.
‘하하! 나도 참 병신이었군.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마르코는 그 시절에 느꼈던 희열을 담아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정작 륜스이는 그가 느끼는 감정을 모두 함께 느끼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러모로 재미없는 녀석이다.
어머니가 보여준 반응은 조금 다른 의미로 재미없었다.
악질적인 사내에게 짓밟힌 몸을 겨우 추스른 어머니는 마르코의 말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는 그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쥐꼬리만 한 식량 창고 귀퉁이에 그를 처박고 속삭이던 어머니의 얼굴이.
‘파멸, 파멸인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식량 창고에 있는 걸 다 먹기 전까지는 나오지 말라는 말에 마르코는 영문을 몰랐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세상 누구보다도 그를 아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대더라도.
그 뒤로는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짜디짠 보존 식량을 조금씩 먹으면서,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되새기곤 했다. 히죽히죽 웃다가, 물을 조금 마시고 절인 채소 따위를 뜯어먹는 시간의 반복.
시끄러운 소리가 몇 번인가 들린 것도 같았고 좀 이상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당부를 잘 따랐다. 착한 아들로.
‘너도, 나도 기다리는 건 비참한 죽음뿐이지.’
식량은 조금 남았지만, 어머니가 힘겹게 두고 간 물이 변하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마르코는 이 정도면 충실하게 당부를 따랐다고 생각하고 창고를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어째선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있는 힘껏 문을 발로 차고 밀고 때려봤지만 거칠게 흔들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절망에 빠지는 대신 상하기 시작한 물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음식도 충분히 먹어 힘을 채운 다음 온몸으로 부딪히길 몇 번이나 했을까.
마침내 부서지다시피 한 문과 함께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나온 마르코는 보고야 말았다.
‘해골 무덤···’
온통 불타고 무너져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과 그 한 가운데에 기념이라도 하듯 높이 솟아오른 인간의 해골을 쌓아 만든 탑을.
평생 처음, 비칠비칠 해골 탑으로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해골을 쓰다듬었다.
그 해골은 분명히 마르코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가끔 먹을 걸 던져주던 아저씨의 것일 수도 있었고, 옆집 아주머니의 것일 수도 있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던 옆집 형의 것일 수도 있었고, 어느 날 마르코를 잡고 더러워졌다며 펑펑 울던 마을 누나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것일 수도 있었고.
‘결국 세상은 강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법이지. 좋은 가르침이었다.’
마르코는 그날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걸. 정말 중요한 건 진실조차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이라는 걸.
그는 바람 따라 흩날리는 시커먼 잿가루로 칙칙하게 더러워진 잿빛 해골 무덤을 보며 다짐했다. 자신은 이렇게 당하는 자로 살지 않겠다고.
이름 모를 해골을 품에 간직하고 길을 떠난 건 그래서였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어머니의 해골로 생각하기로 한 그 물건을 보며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그 뒤로는 시시했다.
마르코는 누구보다도 재능이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누구나 알법한 대도시의 뒷골목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약한 놈의 주머니를 털고, 뒤통수에 칼을 박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버텼고 나이가 차자 곧장 폭력 조직으로 들어갔다.
선배나 형님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을 죄다 먹어 치우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강했고 교활했으며 악랄했으니까.
조직 이름을 해골 무덤으로 바꾼 건, 운명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어둠에 몸담은 자, 사람을 죽이는 길에 발 들인 자라면 모두, 그 언젠가 어머니의 해골이 얹혀있던 무덤에 정수리가 꿰뚫린 채 꽂히는 결말을 맞게 된다는 뜻이었다.
멍청한 놈들은 불길하고 강렬해서 좋다는 놈도 있었지만, 적어도 마르코가 생각한 뜻은 그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세운 이름에서 자유로워졌다.
심연의 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이제 눈앞의 고양이만 넘어서면 된다.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길에 한 발은 이미 들였다. 오랜 세월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필멸자의 종착지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가거라, 해골 무덤으로!’
포효하는 마르코의 강렬한 살의가 맞댄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와중에도 륜스이는 차분했다.
초월에 발 디딘 자의 전장이란 언제나 이랬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감각이 서로의 의식을 연결하고 오가는 칼날이 서로의 삶을 비춘다.
처음 이런 전장에 섰을 때는 그도 적잖게 당황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마르코의 삶은 해일처럼 범람해서 그의 의식을 잠식하려 했지만 무엇 하나 물들일 수 없다.
륜스이의 삶은, 검은 고난과 고뇌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색으로 이미 짙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네 겨울은 끝나지 않는구나.’
‘끝날 필요 없다. 나는 겨울의 왕이 될 테니까!’
눈으로, 검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며 마르코라는 인간을 깊이 이해하게 된 륜스이는 문득 안타까워졌다.
자연에 계절이 있듯 사람의 삶에도 계절이 있다.
때로는 꽃 피는 봄처럼 삶도 아름답게, 화사하게 피어난다. 강렬한 햇빛 속에서 푸르게 성장하는 여름처럼 고난 속에서 삶도 크게 일어난다.
가을이 그렇듯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일어난 삶에 충만한 결실로 가득한 시기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겨울.
흥하는 때가 있으면 쇠락할 때가 있고 피어나는 때가 있으면 메말라 시드는 때가 있듯, 삶 또한 그러하니, 누구라도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서 무너지고 스러질 때가 있다.
버티고 일어나 다시 봄을 맞는 자가 있고 그대로,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때로는 혹독한 추위와 칼바람 속에서 우두커니 굳어버리는 자도 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당장 륜스이부터가 지난 삶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는 겨울의 망자로 살았으니까.
‘내가 네 봄이 되어줄 수는 없겠구나. 적어도 그렇다면.’
마르코와 양상은 달랐지만, 한때는 륜스이도 오직 죽음을 찾아 손에 쥔 칼에 기대어 영원한 겨울을 걷는 자였다.
연달아 찾아온 삶의 고통스러운 굴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더 깊은 나락을 찾아 얼마나 오래도록 헤매었던가.
사람의 삶에 봄이 온다는 건 알았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첫사랑을 잃고 살아남았다. 친구를 잃고 살아남았고 지키고 싶던 후배를 잃고도 살아남았다. 조카 같던 아이를 잃고, 아버지 같던 은인을 잃고, 스승을 잃고 끝내 살아남았다.
그 상실의 연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인연 따위 만들지 않겠노라고. 그저 떠나간 자, 지켜주지 못한 자를 추억하며 칼에 기대 살다 덧없이 스러지겠노라고.
그러니, 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찾아온 친우가 선뜻 그의 겨울 속으로 들어와 손 내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바뀌지 않았으리라.
그는 륜스이의 봄이었다. 구원이었고 빛이었다.
페나의 이름을 짊어진 그만이 오직 죽음을 찾아 핏빛 전장만 돌아다니는 겨울의 망자에게 삶을 주었다.
그래서 페나다.
검성의 이름으로 정점에 올랐을 때도, 세월을 넘어 다시 돌아온 삶에서도 륜스이는 페나였고 페나이며 페나일 것이다.
‘네 겨울을 끝내주마.’
아쉽게도 륜스이에게는 친우 같은 능력은 없다.
그는 친절하게, 조심스럽게 상처 주지 않고 수라도를 걷는 자에게 접근해 건져주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설령 알더라도 마르코는 너무 멀리, 깊이 왔다.
손에 묻은 피가 얼어붙은 설원을 모두 붉게 물들이도록 흘렀으니, 어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루하루 자신을 잃고 죽어가며 방랑하면서도 최후의 선만은 넘지 않고자 했던 륜스이와는 경우가 너무 다르다.
그러니 륜스이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한 사람의 검사로서, 마르코의 겨울을 끝내주는 방법은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그 삶을 끊는 것.
‘하하, 와라! 고양이, 널 내 왕좌의 장식으로 만들어주마!’
인간 마르코의 삶과, 심연 속 군주의 삶이 뒤엉켜 광기에 침식당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며 륜스이는 담담하게 칼을 들었다.
동시에 마르코도 칼을 들었다.
거울처럼 하늘을 향해 치켜든 칼을 쥐고 마주한 두 사람은 같은 듯 다른 기세로 서로에게 다가갔다.
마르코가 온 세상을 모두 얼릴 영원한 겨울이었다면 륜스이는 그저 검이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검. 그저 무언가를 베어 가르는 검.
고요한 암흑 속에서 선명하게 의식이 부딪치고 녹아들 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칼이 서로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겨울, 혹한의 눈보라를 휘감고 떨어지는 검에 대항해 마주 떨어지는 검은 무한이었다.
륜스이라는, 검이라는 작은 세계를 베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검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 끝나지 않는 충돌의 순간에서 순백의 칼날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륜스이의 삶이, 검이 의식이 얽혀 만든 어둠을 가르고, 푸르게 빛나는 서리 결정으로 나타난 마르코의 삶까지 갈랐다.
그리고 겨울을 갈랐다. 구름 낀 하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