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노검사의 죽음-97화 (97/497)

과거의 사슬

포효는 크고 강렬했다.

어찌나 두려운 소리였는지 오가던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그 공포와 억압의 현장에서도 모험가들은 곧장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하고 습격당하는 건 그들에게 일상이었으니까.

“등급 낮은 애들은 사람들 대피시켜! 자신 있는 놈은 싸울 준비 하고! 뭘 멍하니 있어! 빨리 움직여! 사람들 오거 밥으로 바칠 거냐!”

“이런 시발, 륜스이나 만나서 죽어버리지, 여긴 또 왜 온 거야?”

처음부터 당황 따위 하지 않은 세실리아가 잽싸게 칼을 뽑으며 지시를 내렸다. 게오르크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등에 멘 방패를 풀어 쥐며 투덜거렸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냐?”

“그러는 할머니도 지금 웃고 있잖수.”

“난 이 상황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라장을 건너온 사람이라 그렇고. 넌 완전히 응애응애 하는 애기잖아.”

“애기라니! 이래 봬도 내가 베테랑 모험가라고!”

“그래서 몇 년이나 모험가로 활동했니? 난 50년은 넘은 것 같은데?”

비웃듯 던진 세실리아의 말에 게오르크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요정과 경험이랑 나이로 싸울 생각을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기본적으로 수백 년은 우습게 사는 종족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용 정도는 불러와야 나이로 엘프를 찍어누를 수 있으리라.

물론 게오르크는 용이 아니었고, 할 수 있는 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것뿐이었다.

“에이씨, 요정이 그러면 반칙이지!”

“반칙은 무슨. 너 싸울 때 규칙 정해두고 싸우는 애였어?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상상 이상으로 풋내기구나?”

“컥,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으어, 이럴 때 내 편 들어줄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게오르크는 목덜미를 잡고 휘청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슬프게도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줄 엠마는 여기 없었다.

엘리안 교의 대성당으로 가는 대신 안코나에서 성녀로서 받아야 할 교육을 받게 된 건 좋은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런 모험까지 따라올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빠르게 변화할 세상에서 무섭게 돈을 푸는 안코나가 비상하는 미래를 내다본 교단의 투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러나저러나 게오르크로서는 연인을 뺏긴 신세였지만.

“저도 돕겠습니다!”

“응? 야, 할머니가 한 말 못 들었냐? 등급 낮은 놈은 가서 사람들이나 대피시켜.”

게오르크는 분노로 가득 차 마을을 습격한 오거에게 화풀이할 기세였다. 그러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비장한 표정의 리카르도가 있었다.

그는 짐짓 짜증 내는 척하면서 리카르도를 타박했다.

“싸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네가 싸울 수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우린 네 도움이 필요 없다니까?”

“왜요! 오거잖아요!”

“오거니까 그러는 거다, 이놈아. 륜스이가 믿고 널 우리한테 맡겼는데 송장 되면 내가 무슨 얼굴로 걔를 보냐?”

게오르크는 리카르도를 보며 혀를 찼다.

오거의 무지막지한 덩치와 강력한 포효에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은 분명히 좋았다. 이 녀석은 언젠가 크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저런 대형 괴수와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나름대로 재능도 있고 신체 능력도 좋은 녀석이었지만, 오거와의 싸움은 녀석이 지금까지 경험한 싸움과는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

기술과 힘의 싸움이 아니라 발과 전술의 싸움.

륜스이, 아니 최소 세실리아 정도 되는 괴물이 아니라면 오거를 상대로 인간의 기술은 통하지 않았다. 무술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구나 대괴수전은 한 번의 실수가 최소 반신불수, 심하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차근차근 공부하고 관전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실전에 나가는 게 옳다.

게오르크는 불퉁한 태도를 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미덥지 않아서가 아니다. 넌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강해. 배운 시간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도록 강하고.”

“그러면 싸우게 해주세요!”

“안 돼. 아마 네 스승이 이미 해준 말이겠지만,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니 내가 다시 말해주마. 잘 들어.”

세실리아와 비교할 수는 없다지만 게오르크가 지금까지 만난 동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많은 동료 중 그보다 먼저 시체가 되어버린 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죽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이유를 차지하는 건 만용과 오만이었다.

지금 리카르도가 오거에게 덤비는 게 그 만용이다.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만이었고.

“살아남아라. 오직 살아남는 자만이 강해질 수 있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냐. 누구나 처음엔 다 약하다. 네가 뭐, 용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처음엔 약하지.”

게오르크는 리카르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벌벌 떠는 놈은 얼마든지 있다. 제 수준을 파악 못 하고 날뛰는 놈은 그보다는 적지만 충분히 많다.

자기 경험이 부족한 걸 알고 선배에게 참전해도 될지 묻는 건 좋은 태도다.

“지금은 일단 지켜봐라. 보고, 배워서 다음에 싸워라. 한 번도 오거와 싸워본 적 없는 지금 싸우는 건 네 용기가 아냐. 우리의 무책임이다.”

리카르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지하고 무거운 눈빛, 몇 번이고 칼날 위에 생사가 올라가는 전장을 경험한 자의 눈빛 앞에서 차마 계속 고집부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풀 죽지 말고. 네가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그저 각자의 일이 다를 뿐이다. 적어도 지금은.”

거기까지 말한 게오르크는 첫 포효 이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또 차분하게 접근하는 오거를 흘깃 쳐다보고 리카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으랴! 안코나의 철벽 나가신다!”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럽니?”

“아, 원래 남자는 이런 칭호를 좋아한다니까요.”

“애들 때나 그런 거 아냐?”

“남자는 원래 아무리 나이 먹어도 앱니다. 거, 남자 알 만큼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게오르크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을 지우려 뻔뻔하게 고함치며 오거의 시선을 끌었다. 놈은 그런 게오르크를 외면하지 않았다.

정직한, 아니 본능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궤도로 몽둥이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저런 공격을 방패로 막으려고 하면 결과는 뻔하다.

방패가 통째로 박살 나면서 부러진 팔과 함께 몸이 짓뭉개진다. 부서지지 않는 특별한 방패라면 방패와 함께 깔려서 뭉개지겠지.

게오르크는 그런 공격에 맞서 방패 사용자가 할 수 있는 극한을 선보였다.

“크아! 방패는 말이다! 원래 가만히 오는 공격을 기다렸다가 처맞는 도구가 아니라고!”

상대적으로 짧은 카이트 실드로 그는 펀치를 쳐내듯 몽둥이를 쥔 오거의 손을 쳐냈다. 안에서 밖으로.

농담으로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한 팔 길이만 해도 1m는 차이 나고, 손에 쥔 무기의 길이도 2m는 된다.

통곡의 벽처럼 존재하는 그 거리를 공격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찰나에 파고 들어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패하면 오직 죽음이 기다리는 길로 서슴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재능있는 무인이 평생 쌓아 올린 기술이 조화를 이뤄 만든 기적이다.

게오르크는 이 순간, 자신이 왜 베테랑 모험가인지 증명해냈다.

“이런 시발! 이래서 좆 같다니까!”

물론 체급의 차이는 그리 쉽게 좁힐 수 없었다.

비슷한 신장을 가졌다면 게오르크가 선보인 패링이 선공하는 순간, 치명적인 일격을 박아 넣었으리라.

하지만 사람보다 2배 이상 큰 오거는 달랐다.

반사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내뻗은 어정쩡한 무릎만으로도 게오르크는 배를 뚫어주려던 생각을 버리고 옆으로 튕기듯 굴러야 했다.

기술이라고 하기도 힘든 엉성한 무릎 차기라도 거기 맞는 순간 그의 가슴뼈는 온통 뭉개질 테니까.

물론 그저 피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힘겹게 만든 기회를 아무것도 못 하고 놓칠 정도로 그는 풋내기가 아니니까.

옆으로 구르면서도 그의 칼은 놈의 종아리를 한 번 쑤시고 빠져나왔다.

“크아아아!”

“봤냐? 이게 나야!”

“얘는, 아무나 다 하는 거 가지고 왜 이렇게 잘난 척이니?”

“아니, 그게 무슨 섭섭한 말이요!”

“잘 봐.”

게오르크가 벌어준 시간과 공간을 따라 사뿐사뿐 꽃잎처럼 뛰어든 세실리아가 두 자루 칼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오거는 놀랍게도 그녀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설픈 반격은 계속하고 있다. 몽둥이를 휘두르고 발로 찬다. 무릎으로 찍으려고도 해보고 바닥을 긁어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돌멩이를 쏟아붓기도 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이네, 진짜. 아니, 요정이지? 염병, 더러워서 나도 오래 살아야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게오르크는 기가 차서 한숨을 내쉬며 투덜댔다.

밧줄이며 투창, 그물까지 두루 준비한 다른 동료들이 무색하도록 세실리아는 위기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거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체급의 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기술의 차이가 현격히 났다.

적어도 자기 칼이 닿는 거리에서 그녀는 완전히 전투를 지배했다.

“그래도 아무나 다 하는 건 아니라고···”

아래로 떨어지는 몽둥이는 옆으로 휙 피하며 돌아들어 간다. 횡으로 넓게 쓸어내는 몽둥이는 공중제비로 넘어 버리고 어설픈 발차기는 처음부터 허공을 노린 것처럼 빗나간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한들 풍압에 이리저리 흩날려 영원히 닿지 않는 것처럼, 세실리아는 오거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아름답게, 또 화려하게.

그저 피하기에 급급한 것도 아니었다.

평생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답게 그녀의 동작은 모두 공방 일체라, 오거는 벌써 여기저기 베이고 찔려 피투성이였다.

세실리아도 일정 간격 이상으로 들어가는 건 못했기에 비교적 몸통에서 거리가 먼 팔뚝이나 다리 정도만 베어냈지만, 그것만으로도 오거는 충분히 느려지고 약해지고 있었다.

“하하! 얘 정도는 내가 쉰 살에도 충분히 잡았다고!”

“쉰? 대체 나이가 몇인데 저러냐.”

오거는 거대한 덩치만큼 피도 많다.

질긴 가죽과 강인한 뼈로 인해 깊게 베이진 않았지만, 겨우 그 정도 상처에서 나는 피도 적지 않았다.

그 핏방울은 놈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으로 비산하며 꽃잎처럼 흩날렸다.

핏빛 꽃잎 사이에서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며 한 장 꽃잎처럼 춤추는 세실리아가 사람을 홀렸다.

모험가의 인도로 대피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인도하던 모험가들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볼 때였다.

상황은 여전히 전투 중이었고, 전황은 본래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그렇기에 전투 중에 넋을 놓는 건 언제나 죽음을 부르는 짓이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그아아아!”

한동안 일방적으로 공격을 허용하던 놈은 크게 포효했다.

붉게 물든 눈, 흉포한 기세와 천지를 울리는 목소리까지. 어딘가 맥없어 보이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단지 분위기만 바뀐 건 아니었다.

놈은 치명상을 피하고자 뒤로 조금씩 물러나던 자세를 버리고, 순간적으로 대지를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세실리아는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옆으로 피하며 허벅지를 깊게 찔렀지만, 그래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쉽게 풀리더라, 시발! 멈춰, 이 새끼야!”

차가운 눈으로 공방이 벌어지는 영역 바로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게오르크가 몸을 날렸다.

하지만 놈은 옆구리를 찌르는 칼날도 팔뚝으로 받아내며 오직 앞으로 달렸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 무력한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크워어어어!”

놈의 목표가 된 마을 사람들 앞에 있던 리카르도는 얼어붙은 채 그 파괴적인 돌진을 바라봤다.

팔뚝에는 게오르크의 검을 박아넣은 채, 온몸에 피 칠갑하고 달려드는 오거는 무서웠다. 단순히 죽고 죽이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차원이 다른 포식자가 그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피식자에게 가하는 공포는 이전에 경험한 결투와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그래도!’

하지만 멍청하게 몸이 굳은 채 멈춰있던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생명의 위기에 리카르도의 육체가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깨어났다.

심장이 폭발적으로 쿵쾅대며 더 많은 혈액을 뿜어내고,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질주한다. 신경계는 당장이라도 불타버릴 것처럼 달아올라 평소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실어 나른다.

그 모든 작용 속에서 리카르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는 오거를 바라봤다.

‘무서워. 너무 무섭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너보다 훨씬 강한 사람과 싸웠어!’

대련에 불과했다지만 그가 언제나 칼을 마주한 상대는 륜스이 페나.

안코나의 검성이자 하늘을 가르는 검사.

스승의 기세는 하늘에 닿도록 드높았고, 힘도, 속도도, 기술도 저런 괴물에 비할 바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그런 사람의 제자다.

이 정도로 공포에 질려 지켜야 할 사람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타오르는 오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는 가장 익숙한 자세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몇만 번, 어쩌면 십만 번도 넘게 연습한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도망치라고 비명 지르던 육신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

“나는, 리카르도 페나! 륜스이 페나의 제자다!”

미친 듯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던 심장의 저 깊은 곳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처럼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리카르도는 그 열기를 기도로, 목으로, 입으로 토해냈다.

포효, 전사의 포효가 공포로 사람들을 찍어 누르던 괴물의 포효를 불살랐다.

뜨겁게, 더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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