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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검사의 죽음-109화 (109/497)

평화를 바라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오랜 여정은 륜스이처럼 강인한 무인이라도 꽤 피곤하게 했다.

완전한 신체로 인해 질병에 걸리거나 눈에 띌 정도로 피로가 쌓이지는 않더라도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안코나로 오자마자 강적과 한 차례 싸우고 적지 않게 심력을 소모한 상태.

그래도 참석해야 하는 회의였다.

“로하스 씨에게 말은 들었어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페나 경, 그 뚜와라는 오거는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렇소. 그 친구는 충분히 선악과 유불리를 분간할 지능이 있고, 은원을 인지하오. 적어도 내가 뚜와의 은인으로 남은 이상, 도시 안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을 게요.”

줄리아 리치는 확신으로 가득한 륜스이의 말에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륜스이 정도 거물의 보증으로 안 될 일이 없다. 어지간하지 않아서 문제지.

결국, 서로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불편한 역할만 떠넘긴 평의회의 노인들을 욕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으음, 그러면 그 므이는요? 그 오가는 뚜와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던데요?”

“큰 문제는 없소. 일단 뚜와의 통제를 잘 따르고 사람 말을 알아들을 정도 지능은 있소. 아직 말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줄리아는 더 물을 것도 없는 륜스이의 명확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며 노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리치 가문의 수장인 마누엘 리치가 피식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흠, 알겠소. 페나 경이 그 정도로 확신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겠지.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소?”

“안코나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는 문제지요.”

“로하스 씨에게 간단한 설명은 들었소만, 우리는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오. 말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작은 대화에도 의도가 숨겨진 걸 보면 괜히 안코나를 쥐고 흔드는 거대 가문의 수장으로 몇십 년이나 버틴 게 아니었다.

륜스이는 확신이라는 말 뒤에 숨은 책임이라는 말을 느끼고 쓰게 웃으며 마누엘의 질문에 답했다.

“곧 전쟁이 일어날 거요. 상대는 이미 들어 아실 테고.”

“하, 전쟁. 전쟁이라!”

“그것도 망할 로란체 놈들과 말이지!”

“이참에 아예 주춧돌도 안 남기고 쓸어버리면 안 되나?”

전쟁이라는 단어가 륜스이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좌중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들은 수십 년을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능구렁이들이었지만, 그래도 안코나인이었다. 로란체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일단 욕부터 하고 보는.

그 모습을 보며 륜스이는 복잡해진 머리를 한숨으로 달랬다.

상황이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난 삶에서 전 세계가 휩쓸리는 대전쟁에도 참전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안코나는 이제 없다.

그가 안코나에 온 지 반년도 안 지났건만, 큼직한 일만 세도 벌써 몇 개째인가.

하수구에서 뷜락을 만나더니, 혁명이 일어나고 심연의 군주가 강림했다. 거기다 이제는 전쟁까지.

심지어 아디라와 아디나 자매를 위해서라지만 황혼의 의지와도 원한으로 엮였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모든 사실이 가리키는 건 명확하다.

돌로 만든 배처럼 물속에서 은인자중하던 안코나는 이제 없다. 격동의 중심에서 온갖 풍파를 맞아야 하는 운명만이 아리아드나의 여왕을 기다리고 있다.

“그만, 그만! 어수선하게 이게 무슨 추태인가! 로란체의 이름이 나왔으니 화가 치미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지금은 회의 중일세! 다들 좀 진정하게나!”

“끙, 알겠습니다.”

“그래도 로란체 놈들은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해줘야!”

“씁!”

평의회 의원치고 어디 가서 부족한 대접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눈을 부릅뜬 마누엘에게 덤비는 미친 자는 없었다.

로시의 가주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지금, 그는 평의회의 최고 어른이자 최고 권력자였으니까.

어지러운 회의장을 호통과 눈빛으로 정리한 마누엘은 륜스이와 그 옆에 앉은 엘레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쟁, 슬슬 전쟁할 때도 되었지. 로란체와 마지막으로 싸운 것도 벌써 40년 전이던가, 50년 전이던가.”

“46년 전입니다, 어르신.”

“나도 알고 있네. 쯧, 좀 가만히 있게나.”

괜히 끼어드는 루카 로시를 보고 혀를 찬 마누엘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생 애지중지 기른 손녀를 채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놈팡이를 곱게 볼 할아버지는 없다.

그 상대가 탕아로 유명했던 놈이라면 더.

문제는 정치적으로 리치와 로시가 반목을 끝내고 협력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분명히 두 가문의 가장 유망한 젊은이가 결합한다면 그보다 더 큰 상징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도 서로 좋아하는 눈치였고.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마누엘은 괜히 루카 로시에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륜스이와 엘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세대가 지나고 그다음 다음 세대가 청년이 될 정도로 긴 세월이 지났군. 분명히 피할 수 없는 전쟁이지.”

“당연하죠! 어르신, 다 죽입시다!”

“로란체에 파멸을!”

“좀 조용히 하라니까. 자네들이 싸우고 싶은 건 알겠네. 누구보다도 잘 알지. 모두 안코나인 아닌가.”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면서도 로란체라는 이름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건 안코나인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대륙 남부의 해상 패권을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평화롭게 지내려면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의 무역로를 양분해서 지낼 수도 있었다. 서로를 소가 닭 보듯 무시하더라도.

하지만 기억이 아니라 역사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오랜 옛날, 알리아타의 왕위 계승을 두고 충돌하는 순간부터 두 도시는 원수가 되었다.

평범한 원수가 아니라, 오직 서로의 멸망을 바라는 철천지원수가.

지금까지는 제대로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누엘은 오랜 갈등의 종말을 위한 열쇠가 되어줄 두 사람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묻고 싶다네. 엘레나 로하스 씨. 당신은 안코나인이오?”

“의도가 좀 불순하시네요.”

“허허, 이해해주시게. 나이를 먹으면 이미 아는 것도 확인하고 싶어진다네. 잃을 게 많아지면서 겁이 많아지거든. 더구나 자네는 모험가가 아닌가.”

기본적으로 모험가는 영지나 국가 간의 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직접 적을 둔 도시나 고향의 일에는 참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선택하기 나름이다.

마누엘이 굳이 엘레나에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을 던진 이유였다.

“끌려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진 않지만, 제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네요. 전 안코나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하하! 좋소, 아주 좋소! 명성 높은 트랩 마스터가 안코나인으로서 참전해준다니, 든든하군!”

어떤 의미에서는 륜스이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이 엘레나였다.

륜스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동시에 지킬 수 있는 장소는 결국 한 군데에 불과하니까.

반면에 엘레나는 시간과 예산만 주어진다면 무한히 함정을 깔아 아무리 많은 군대라도 동시에 막아낼 수 있다.

깔아둔 함정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까.

로란체와의 전쟁이 기정사실로 드러난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이 될 사람에게 참전하겠다는 확언을 받았다.

이제 다음은 그녀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마누엘은 아직 웃음기가 묻어나는 얼굴을 륜스이에게 돌렸다.

“그러면··· 페나 공은 어찌하시겠소? 봉헌검의 주인이니 안코나를 위해 싸워라.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공 같은 사람의 마음을 윽박지르는 것 따위로 움직일 수는 없겠지요.”

“잘 보셨습니다.”

무인, 그것도 높은 경지에 든 무인은 대체로 외골수가 많다.

그들에게 은근한 압박이나 노골적인 협박 따위로 뭔가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다른 사람의 협박에 휘둘릴 바에는 차라리 목숨 걸고 싸우는 걸 선택할 사람들이니까.

륜스이도 그런 기질이 없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고 좋은 사람을 만나며 많이 유순해졌다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칼 같았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마누엘은 조금 더 자세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나는 본래도 페나 공이라면 저 일곱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소. 이번에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하셨고. 공은 굳이 안코나가 아니라도 어디에서건 명성을 얻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부탁뿐이오. 페나 공, 안코나를 위해 싸워주실 수 있겠소?”

“처음 안코나에 도착했을 때 한 다짐이 있소.”

다소 뜬금없는 대답이었지만 기분 좋은 정도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모든 사람이 륜스이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수많은 눈동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했다.

“가능하면 조용히, 은인자중하며 살고자 했소.”

배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지키지 못한 소년을 알아보고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한 생각이었다.

지난 삶이 너무 격렬했기에 륜스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심으로는 지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눈 감았을 때, 그대로 삶이 끝났더라도 좋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생각이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는 목이 잘려 그의 앞에서 머리통만 굴러다니던 소년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활짝 웃으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결심했다.

적어도 후회로 남은 상실은 고쳐보기로.

“그저 그런 생각으로 도시에 발을 디뎠건만, 움직이다 보니 이런저런 일에 엮이더이다. 본래 나라는 사람이 조용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건지, 시대가 조용히 사는 사람을 두고 보지 않는 시대인지.”

소중했지만 지키지 못 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움직였더니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지난 인연은 더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전에 없던 원한도 생겼다.

인연이란 사슬과 같아 서로 엮이고 얽혀 은혜와 원한을 함께 끌어당기니, 이제는 지난 삶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변해버렸다.

더 빠르게, 격렬하게.

“사람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시대가 휘몰아치니 어찌하겠소. 혈혈단신이라면 그저 다툼을 피해 누구 하나 없는 곳으로 은거하면 그만이오.”

검과 마법,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강하다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륜스이는 지금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심산유곡에 은거해도 사는 데 큰 불편함은 없고, 지난 삶에 공략한 던전이나 유적 중 하나를 근거지로 삼아 조용히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가?

“하나, 내가 이곳에 오고 맺은 인연이 있지 않소. 가족이 된 아이들과 가족처럼 친해진 누님, 함께 싸운 동료. 모두 안코나에 뿌리를 두고 있소이다.”

륜스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고 상실이 두려워 인연을 거부하며 떠돌던 검귀는 이제 없다. 고독하게, 비참하게 제 목숨을 끊어줄 전장을 찾아 방랑하던 수라도 이제 없다.

그에게는 이제 마음으로 받아들인 아이들과 소중한 동료, 친구가 있다.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시대가 그들을 휩쓸려 한다면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내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행복을 위해 내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소.”

륜스이는 세상 누구보다도 전쟁의 무게를 잘 아는 사람이다.

지난 삶에서 그가 전장을 전전하며 얼마나 많은 비극을 보아 왔던가.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시체가 된 소년병이나 셀 수도 없이 많은 무력한 죽음은 별것도 아니다.

때로는 승자의 폭력에, 때로는 패자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민간인들도 보았다.

비참하게 끌려와 병사들의 욕망에 몸을 더럽히는 여인과 쓸모가 없으니 일단 죽임당하는 아이들.

그 모든 걸 무력하게 바라보거나, 무의미하게 대항하다 죽거나.

선택지라고는 오직 두 가지뿐인 사내들의 모습까지.

전쟁에 반드시 따라붙는 역겹고 거북한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깨끗한 전쟁은 없고, 의로운 전쟁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시작은, 목적은 정의를 부르짖더라도 결국 전쟁이라는 건 모두를 괴물로 만들어 추악한 범죄의 도가니로 만든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피할 수 없다.

“검을 들겠소. 안코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코나에 사는 사람을 위해 나는 검을 들겠소이다.”

“하하! 아주 좋소! 하지만 페나 공, 한 가지 말실수를 하셨소.”

“음?”

륜스이의 대답에 마누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손뼉 쳤다.

가장 영향력이 강한 그가 앞장서자 다른 평의회 의원들도 함께 일어나서 손뼉 쳤다.

어찌 기쁘지 않을까.

대륙 최강을 논하는 일곱별이라고 하면 하나하나가 일인 군단이다. 그런 별을 꺾은 검사가 아군으로 참전하겠다는 말이 기쁘지 않다면 배신자이거나, 권력에 미친 자일 것이다.

물론 마누엘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손뼉 치다가 문득 륜스이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의아한 륜스이의 얼굴을 보며 마누엘은 얼마 전에 새삼스럽게 얻은 깨달음을 전했다.

“안코나는 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건물이 아니라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도 아니요, 우리의 자랑인 산 안토니오 대성당도 아니오.”

나이가 의심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마누엘은 두 손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리 멋진 건물과 운하라도 결국 사람이 만든 물건에 불과한 것. 안코나에 사는 사람들, 안코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곧 안코나라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쥐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불안하지만, 힘 있게 걸어왔다.

그의 걸음에 평생을 안코나인으로 살아온 고집과 의지, 자부심이 묻어났다.

마침내 륜스이의 앞에 도달한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페나 공, 안코나가 될 생각은 없소이까?”

수십 년 정치 인생을 모두 담아 건넨 승부수는 강렬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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