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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검사의 죽음-133화 (133/497)

북 알리아타 연합

로란체와 안코나의 관계는 여러모로 미묘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구의 영국과 아일랜드, 한국과 일본 따위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피맺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다.

인구의 25%가량이 기근으로 날아가고도 피눈물 흘리며 밀을 뺏겨야 했던 곳이나 전 국민이 전쟁에 동원된 거로 모자라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건 아니니까.

물론 그 국가들이 특별할 정도로 역사적인 원한이 깊을 뿐이지, 그렇다고 서로 간에 쌓인 것이 가벼운 건 절대 아니다.

마누엘의 목소리에 실린 한기가 그 무게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 먹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오.”

엉뚱한 말이었지만, 누구도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을 수 없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과 치켜 올라간 눈썹, 파르르 떨리는 수염이 지금 그의 심정을 알렸으니까.

뜬금없이 던진 이상한 말이 아니라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수십 년 동안 안코나의 양강으로 도시를 지배한 남자, 마누엘 리치가 헛소리나 할 위인은 아니었지만.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니, 불편한 게 참 많다오. 기계처럼 기름칠이라도 해서 다시 매끄러워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람 몸이 또 그렇지는 않잖소.”

딱히 큰소리는 아니었다.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

그렇기에 그 안에 숨은 분노가 더 선명하게 듣는 이에게 다가오는 목소리였다.

“젊은 시절이랑 다르게 무릎도 아프고, 손목도 쑤시고. 눈도 침침한 걸 보면 나도 은퇴할 때가 가까워졌나 보오. 그래도 귀는 멀쩡하다고 생각했거늘, 그것도 내 착각이었나 보군. 이상한 말이 들리는 걸 보니.”

안코나인 중에 로란체와의 싸움에서 선조를, 가족을 잃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세대에 한 번은 벌인 전쟁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았고, 그만큼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로 흘러든 눈물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가장 많은 이를 잃어야 했던 자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안코나를 지배하고 대표하는 12 가문의 일원이었다.

피 흘려 도시를 지킨 선조의 유지를 이은 그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전선으로 나가고 가장 나중에 전선에서 물러났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 루카는 마누엘의 분노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 어르신. 거긴 사정이 있습니다. 제가 다 설명.”

“자네는 조용히 하게. 나는 안코나 경과 이야기하고 있다네. 로시를 대표하는 자로서 굳이 내 말을 막고 싶다면 존중은 하겠네. 대신 다시 리치와 겨루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끙···”

륜스이를 도우려던 루카가 한 마디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물론 마누엘의 분노는 이해한다.

누구보다도 륜스이를 존중하고, 또 존경하는 그조차도 처음 로란체와의 연합을 들었을 때는 격분했으니까.

당장 그의 큰아버지가 46년 전의 전쟁에서 죽었다. 작은아버지가, 삼촌이, 형이 죽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까.

로란체와 손잡자는 이야기를 듣고도 화내지 않는 건, 안코나인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누엘의 경고에도 다시 한번 나서려고 했다. 륜스이가 손을 들어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어떻게든 마누엘을 달랬으리라.

“그러면 어찌해야 했습니까.”

“뭐? 자네, 그걸 말이라고!”

“100척의 배, 2만의 해군. 그들 모두가 괴물 아가리로 들어가야 했습니까? 로란체와 손잡는 게 싫어서?”

검에 사는 자로서, 륜스이는 원한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수많은 자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그 업으로 다른 이의 원한에 누구보다도 더 심하게 시달렸으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아무리 피폐하고 나락에 굴러떨어진 시절이라도 륜스이가 무고한 이를 생각 없이 베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에게 죽은 자는 죽어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가볍게는 강도질을 하려고 덤빈 자나 전장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로 만난 자가 있었다. 무겁게는 신념이 있으나 도저히 함께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 자도 있었고.

대부분 악인이었다.

악의로서 악행을 하는가, 선의로서 행한 것이 악행이 되었는가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렇기에 원한을 말하는 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그리 살았다.

그리고 시지를 베었다.

평생 핍박과 모멸 속에 살아온 사람들, 그저 살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과 잘못된 방식의 투쟁에 영혼을 뺏긴 사람들.

자기 기준으로도 무고한 이를 베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전에 죽은 자들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의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혜와 원한은 단순히 표면적인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외인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 아름답고 고결한 도시의 이름을 주셨지만, 동시에 제가 평생을 보낸 곳은 다른 지역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란 말인가? 지금 그런 말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원한은 비이성적인 감정이다.

효율만 생각하자면 원한이 무에 중요하겠는가. 가족을 죽였건, 과거에 악연으로 엮였건 그냥 손잡고 이익만 보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그런 비이성적인 감정이 있기에 사람이다.

륜스이는 이성으로 사람의 본능적인 영역을 설득해야 했다.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께 로란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암! 당연하지!”

“예로부터 로란체 놈들은 신의가 없어서, 믿을 수가 없어!”

마누엘의 눈치를 보는 건지 격렬한 동의가 이어졌다. 물론 그들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진심도 깔려있었다.

륜스이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베르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면 직접 손잡은 분께 물어봅시다. 정말로 신의가 없었습니까?”

“여기서 내게 갑자기 폭탄을 떠미는 건 좀 비겁한 거 아닌가?”

“그건 대답이 아닙니다.”

베르토는 복잡한 얼굴로 끙끙 앓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아니. 적어도 지난 전장에서는 아니었네.”

“캄피오니 경! 드디어 미쳐버린 거요? 안코나 경도 아니고 댁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시끄럽소! 나는 마땅히 스스로 경험하고 느낀 대로, 진실을 말하고 있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라고 외면할 생각이라면 당장 평의회에서 나가시오! 그리고 어린애들이랑 소꿉장난이나 하시지!”

위험한 발언에 분위기가 폭발하려는 순간, 륜스이가 가볍게 탁자를 길게 뽑아낸 손톱으로 두들겼다.

날카롭지도, 둔탁하지도 않은 톡톡 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때렸다.

거기에는 가볍게 두드렸지만 불온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찍어 누르는 힘이 있었다.

그는 찡그린 의원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다시 마누엘에게 말했다.

“어르신도 알고 계실 겁니다. 로란체인이 정말 그 정도로 신의가 없고 비열한 족속들이라면 지금의 성세는 있을 수도 없었다는걸. 그랬다면 진작에 다른 도시와 국가에 공적으로 몰려서 토벌당했겠지요.”

마누엘은 대답 없이 여전히 륜스이를 노려만 봤다.

완강한 태도에 륜스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 거기서 캄피오니 제독님이 고집을 부렸다면 피 흘려야 했던 건 우리의 젊은이들입니다.”

“우리라고?”

꿈틀하는 마누엘의 눈썹이 그의 심경을 보여줬다.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

좋게 표현하자면 완고함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옹고집을 보며 륜스이는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생긴 걸 느꼈다.

“우리지요. 우리의 아들, 우리의 남편, 우리의 아버지.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로란체가 싫어 함께 괴물 뱃속으로 던져주기에는 아까운.”

“허···”

“그리고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중세적 가치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은원은 중요하다. 명예 역시 중요하고.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생존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륜스이는 의원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분명하게 말했다.

“묵은 은원이, 미래가 될 젊은이를 갈아 넣어서 해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선조의 핏자국 위로 아들의, 손자의 피를 부어놓고 지난 흔적이 사라졌다고 만족할 수 있다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티는 내지 않았지만, 륜스이는 지금 하는 설득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패한다면 안코나를 떠나는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다가오는 난세는 거칠고 난폭하다.

모든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리라. 옛 시절의 미덕은 휘몰아치는 혼란 속에서 부덕이 되고, 그 시절의 의인은 해일처럼 몰려오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빛바랜 시신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연합은 그 감당하기 어려운 격동을 헤쳐 나갈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아이가, 젊은이가 곧 미래입니다. 노인의 원한으로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다시 새로운 원한을 쌓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끝에,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까?”

로란체와 안코나를 합친다고 한들 인구 50만 남짓한 게 현실이다.

반면에 제국의 인구는 2,000만이 넘는다. 서쪽에서 그들을 견제하는 이종족 연합 역시 전체 인구가 1,000만이 넘는 상황.

시대가 평화롭다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인구 차이가 얼마나 크건, 군사력 격차가 나건 그저 무역에 집중하며 돈이나 벌면서 살면 된다. 지금까지처럼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면서.

하지만 다가오는 시대는 그런 동네 골목대장 싸움이나 할 여유가 없다.

륜스이는 직접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황제가 서거하고, 황태자가 죽고, 야심가들이 발호하며 거인이 쪼개져 싸우는 난세에서 동쪽의 소왕국들이 들고일어나고 이종족 연합까지 제위 계승 전쟁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북방의 이민족들까지 남하하니, 한동안 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구렁텅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그 혼돈 속에서, 누구보다도 큰 명성을 얻었고 끝내는 에밀과 함께 황제를 만든 게 륜스이다.

덕분에 변방의 일개 남작령이 변경백의 지위까지 얻었다. 검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까지 받았다.

중요한 건 곧 일어날 혼란이 절대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안에 황제의 죽음으로 촉발된 제국 내전은 불씨가 잦아들기까지 무려 30년이 넘게 걸렸다.

그 절망적인 죽음과 파괴의 세월이 과연 안코나라고 비켜 갈 것인가? 지난 삶에서는 그랬다. 이번에는?

륜스이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기에는 안코나가 너무 커 버렸다. 로란체도 마찬가지. 이제는 더 이상 방관자로서 적당히 돈이나 벌 수 없다.

힘없는 자가 가진 보물은 그 자체로 죄가 되니까.

“젊은이의 피로 분을 푸는 게 노인의 역할입니까? 그게 아니면, 고난과 수고를 무릅쓰고라도 젊은이의 미래를 열어주는 게 노인의 역할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멋진 말이군.”

마누엘은 어느새 맹목적인 적의를 잃고 떨떠름한 기색이 되어버린 분위기를 읽어냈다.

분명히 륜스이의 말은 옳다.

언제나 노인의 입이, 손이 전쟁을 결정하고 젊은이가 피 흘리고 죽는다. 누군가의 아들이, 남편이, 아버지가 죽고 불구가 되어 돌아온다.

정작 그 모든 비극의 설계자는 피 한 방울 뒤집어쓰지 않고 모든 과실을 따 먹을 따름이다. 공허한 대의를 부르짖으며.

그런 의미에서 안코나 평의회 의원들은 다른 지역의 귀족 정치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전장에 나서는 건 다른 지역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지만, 잃는 것 역시 공유했으니까.

안코나는, 안코나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단순한 물질적 가치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누엘은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 미래가 어떤 건지는 말하지 않고 있지 않나. 분명히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잃는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도 없을 테지. 하지만 그 미래가 무언지 알려주지도 않고 과거를 잊자고 말할 생각인가?”

“우선 미래가 어찌 흐를지부터 이야기해야겠지요.”

엘레나의 죽음 이후 안코나를 떠나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듣지 않은 륜스이는 근방의 역사를 잘 모른다.

하지만 제국의 역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제 그 사실을 풀어낼 때가 되었다.

“황제는 곧 죽습니다.”

“뭐?”

“놀랄 일은 아니실 텐데요? 당금 황제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을 넘어 아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중병을 앓아 궁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도 어느덧 3년이군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지. 그래서?”

황제가 오늘내일한다는 건 딱히 대단한 비밀은 아니다.

어지간한 제국 귀족이라면 모두 알고 있고, 주변국에서도 힘깨나 쓴다는 권력자라면 아는 이야기다.

그걸 서대륙에 온 지 1년도 안 된 륜스이가 어찌 알았는지 의문이었지만, 마누엘은 일단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정보를 얻은 수단이 아니다. 그런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륜스이가 가진 통찰력이었다.

“아마 황태자가 건재하니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황태자가 죽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뭐? 그걸 말이라고 하나? 황태자는 건강한 젊은이네. 비명횡사할 리 없어. 암살이라면 더 어림도 없고.”

“세상에 절대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황태자를 암살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뽑아 든 칼보다 어둠 속에 숨은 칼이 더 무서운 법이다.

제국 근위대는 틀림없이 강력하지만, 무적 같은 건 절대 아니다.

“자네는, 끙. 그래, 자네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제가 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은 못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습니다. 당장 저는 얼마 전에도 황태자를 암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군요.”

“지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요한은 그 정체를 모른다면 무조건 한 번은 당할 수밖에 없는 자다.

그의 고유 마법인 만화경은 마법 해제나 마법 무효화 결계 따위를 무시한다. 감지할 수도 없다. 계획을 잘 짠다면, 황태자가 죽고 나서도 제국 근위대는 아무것도 모를 터.

륜스이조차도 자신을 지키는 정도라면 모를까, 요한의 암수에서 누군가를 지킬 자신은 없을 정도니 누가 있어 그에게서 안전할까.

더 큰 문제는 그가 속한 단체, 황혼의 의지가 작정하고 제국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수백 년 동안 쌓은 업보가 드디어 심장을 찌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올 때다.

그 모든 사실을 아는 륜스이의 말은 무겁게 회의장의 공기를 울렸다.

마누엘은 륜스이가 말한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륜스이 같은 남자가 능력이라는 점에 있어서 허언할 리 없으니까.

단지 우려할 뿐이다.

륜스이가 황태자 암살을 기도하는 자와 연관이 있다면 그로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륜스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걱정하시는 바는 알고 있지만, 저는 그자의 협력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그자와 저는 적입니다. 단지 제가 지금 이 시점에서 그자를 막아낼 수 없을 따름이지요. 싸운다면 이길 수 있지만, 놈의 암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런가···”

마누엘은 륜스이의 말에 비로소 안도했다.

물론 황태자를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자가 활보하고 다닌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 칼날이 안코나로 향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

“중요한 건 황태자가 죽는 미래지요. 그는 죽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자네도 막을 수 없나?”

“어렵습니다. 가능하다고 한들 제가 갑자기 무슨 수로 황태자의 곁을 지키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제국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인재가 없어 허덕이는 것도 아니다. 뭐 하러 외인, 그것도 안코나의 이름까지 받은 외인을 호위로 황태자에게 붙이겠는가.

“암살 세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알려드리지요. 일단 지금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대륙 전체가 휘말릴 혼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폭풍 속에서 침몰하지 않으려면 더 큰 배가 필요합니다.”

“안코나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안코나가 제국의 일개 지방이라도 상대할 수 있습니까?”

륜스이의 반문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불가능하다. 바다에서라면 모를까, 육전에서 제국군은 세계 최강이다. 안코나가 아니라 그 어떤 도시를 가져와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로란체입니다. 제게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물으셨지요?”

“그랬지.”

륜스이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부쩍 나이 먹은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에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크고 단단한, 난세를 헤쳐 나갈 배의 이름을.

“통일 알리아타.”

머나먼 미래로부터 찬란한 이름이 회의장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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