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전
리카르도가 한 차례 홍역을 치를 때 아이들은 이보다 더 흥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나서 집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꺄하하! 집 엄청 넓다!”
“진짜! 진짜로 넓어! 거기다 멋있어!”
출신도 제각각에 사연도 각자 다르지만, 이런 좋은 집은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아이들이었다.
아니, 바로 그저께까지 다 무너져가는 폐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이불도 아닌 천 조각을 닥치는 대로 쌓아놓고 뭉쳐 자는 처지였다.
크고 깔끔한 데다 고풍스러운 맛까지 있는 집을 보고 다들 정신을 놓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야! 아직 우리 집 아냐! 잘못해서 아무거나 건드렸다가 망가트리면 어쩌려고 그래!”
“에? 아니야? 정말?”
혹시 사고라도 칠까 걱정된 아디라가 외친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디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크고 까만 눈에 천천히 물기가 차오르고, 몇 번 깜빡였다. 아디나는 륜스이를 바라보며 먹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이··· 진짜 우리 집 아니에요?”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달팠던지 륜스이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아디나 옆으로 모여 한 뭉치가 된 아이들이 보내는 애절한 눈빛을 받으며 그는 짐짓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니지.”
“지, 진짜여?”
“아직은.”
륜스이의 말에 아이들은 다 같이 몇 번 고개를 갸웃하다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덥석 끌어안으며 환호했다.
“와아! 그럼 나중엔 우리 집 되는 거져?”
“너희 마음에 든다면 그리되겠지. 어떠냐? 다른 집으로 고를까?”
어차피 오늘 중으로 관청에서 추천한 집 두 개를 다 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이 집 말고 다른 집으로 고르려고 하는 기색을 풍기자 아이들이 모두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여! 이 집이 좋아여!”
“맞아요! 이 집 최고!”
“저도 여기가 마음에 드는데요.”
집에 들어오고 나서 늘 싸우던 아이들이 미어캣 무리를 보는 것처럼 한 몸으로 움직였다. 모두 기쁨과 흥분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륜스이는 아이들의 격렬한 의견 제시에 얌전히 옆에 있던 아디라를 바라봤다. 새침한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수줍게 웃는 소녀의 눈동자에도 보일 듯 말 듯 기쁨이 비쳤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예? 아, 예! 저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깨끗하고 넓고 예쁘기도 하고. 거기다 애들도 좋아하니까요.”
“그래? 그래도 지금 당장 결정하는 건 너무 이르니까 조금 더 구경해 보자꾸나. 그리고.”
륜스이는 아디라가 언제나 언니라고 양보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언니 역할을 잘하는 건 좋지만, 이제는 자기도 좀 생각했으면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물론 중요하지. 저 아이들이 살 집이니까. 하지만 얘야. 여긴 네가 살 집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싫으면 싫다고 말해주지 않으련?”
“아··· 네. 그래도 여긴 저도 좋아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동생만 생각하던 아디라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그녀가 동생을 챙겨주는 일은 많았지만,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챙겨주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딘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에 아디라는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륜스이는 가만히 미소 지어 주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로비에만 있을 수는 없지. 다른 곳도 가 보자꾸나.”
“네에!”
활기찬 아이들의 대답을 시작으로 두근거리고 행복한 탐험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륜스이와 아디라 곁을 빙빙 돌면서 들르는 곳마다 감탄했다.
“우아, 형! 화덕이 엄청 많아!”
“맞아! 빵도 구울 수 있나 봐!”
주방에서는 다섯 개나 벽에 붙은 냄비 거는 화덕과 빵 굽는 화덕을 보고 뛰어오를 듯 기뻐했다. 아마 여기서 만든 음식을 먹는 상상이라도 한 게 아닐까.
정작 륜스이는 화덕의 형태를 보고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멋진 주방, 어? 어딘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좀 비효율적이라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네? 이보다 좋은 화덕도 있어요?”
아이의 질문에 륜스이는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 집에 설치된 화덕은 전형적인 개방형 화덕이었다. 연기도 많이 나고 땔감도 많이 드는 형태의.
다른 사람들에게야 이것도 멋진 주방으로 보이겠지만, 륜스이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있지. 만약 이 집을 사면 화덕은 전부 교체해야겠구나.”
“그러면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눈치 보며 하는 말에 륜스이는 맑게 웃었다.
심지어 그 말을 들었는지 다른 아이들까지 순식간에 조용해져서 걱정되는 표정을 지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지난번 집 가격만 들어서 걱정이 많아졌구나. 여기는 훨씬 싸니 걱정할 것 없다. 적어도 화덕 정도는 백 개를 바꿔도 괜찮을 정도니까.”
“우와! 화덕을 백 개나요? 그러면 맨날 배 터지게 빵 먹을 수 있겠다!”
“바보야, 진짜 화덕 백 개를 만든다는 게 아니잖아.”
조용히 안도하는 아디라와 떠들썩하게 환호 지르는 아이의 반응이 교차했다. 그 모습을 보며 륜스이는 확실히 주방은 좀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화덕은 로켓 스토브였다.
더 적은 땔감으로 더 강한 화력을 내고 연기까지 적은. 땔감 가격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연기는 확실히 적은 편이 좋다.
륜스이라면 모를까 화덕을 쓰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을 테니까.
“자, 주방 구경은 이 정도면 됐지? 다음은 응접실로 가 보자꾸나.”
“응접실? 그게 모에여?”
“손님을 맞는 방이지. 넓고 편하단다.”
“와! 보고 싶어여!”
평생 자그마한 초옥이나 나무집에서 살던 아이들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살아본 벽돌집이라고 해봐야 다 무너진 폐가였고.
당연히 응접실이 뭔지도 몰랐다.
륜스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응접실이 뭔지 설명해 주고 아디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면 가 볼까?”
“히히, 네!”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단아한 바닥을 밟아가며 조금 걷자 금세 저택 오른쪽에 있는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아무런 가구도 없이 구석에 벽난로만 쓸쓸하게 그들을 맞았다.
“이게 응접실이에여? 아무것도 없어여!”
“안 편할 것 같은데···”
차마 반박은 못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벤의 모습에 륜스이는 피식 웃었다.
언제 팔릴지도 모르는 집에 가구를 들여놓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도 이사할 때면 집에 있는 가구를 모두 챙겨가는 게 보통이었다.
“여기에 탁자와 소파가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려무나. 바닥에는 카펫을 깔고 벽난로에도 불을 붙여야지. 탁자 위에는 간식거리도 놓고, 같이 할만한 게임 같은 것도 두고. 어떠냐? 멋질 것 같지 않으냐?”
륜스이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누군가는 쿠키 따위의 먹을 것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륜스이가 말한 게임이 뭘지 생각했다. 하지만 느끼는 감정은 모두 같았다.
“네··· 엄청, 엄청 멋질 것 같아요.”
“행복해여···”
벌써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의 귀여운 반응에 륜스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말만으로 환상을 만들고 그곳에 빠질 수 있는 건 아이들의 특권이다. 보통은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환상보다 현실을 생각하게 되고 꿈보다 당장 눈앞의 생계를 보게 되니까.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그토록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꿈꾸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새삼 리카르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을 잘 키웠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이 녀석들은 아직도 겁먹은 소동물처럼 눈치만 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따듯하게, 소중하게 대해주다 보면 언젠가 마음을 열었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아, 저도 좋아요. 거기서 아저씨랑 같이 앉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책임감에 치여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던 아디라는 륜스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언제나 륜스이에게 자기 욕심을 말하는 건 어째선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륜스이는 발그레하게 물든 아디라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손을 잡아줬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소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나저나 여기도 벽난로는 좀 고쳐야겠구나.”
“여기도요? 왜요?”
“저런 건 연료만 많이 먹고 별로 따듯하지 않거든.”
지난 삶에서 륜스이가 늘그막을 보낸 페나 영지는 제국 최북단에 위치했다.
야만족이 사는 동토의 땅보다는 덜했지만, 그곳도 겨울이면 어지간히 추웠기에 난방 도구는 이곳보다 훨씬 발전했다.
‘온돌을 만들 줄 알면 좋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고···’
사실 전근대 난방 도구 중에서는 온돌만큼 좋은 것도 찾기 힘들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고, 잘못하면 사고가 난다는 것만 알았기에 그는 아쉬움을 떨치고 페나에서 쓰던 난방 도구를 떠올렸다.
“로켓 매스 히터가 좋겠지.”
“그게 뭔데요?”
“벽난로보다는 훨씬 따듯한 물건이지. 열기도 오래 가고.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밤새도록 따듯하니, 바꾸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정말요? 그럼 당연히 바꿔야죠!”
사실 차지하는 공간도 별 차이 없었다.
직접 열을 방사하느냐, 둘러싼 타일과 금속 통을 통해 방사하느냐 정도의 차이였지.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예 온돌을 깔 생각을 하며 응접실 구경은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
“자, 계속 여기만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2층도 가 봐야지.”
“2층? 2층에도 뭔가 있어요?”
“바보야, 오면서 못 봤냐? 창문도 있고 그랬잖아!”
다시 투덕거리는 아이들을 달래 2층에 도착하자 작은 로비가 있었고 그 뒤편으로 방이 늘어서 있었다.
“와··· 방이 엄청 마나여!”
“진짜, 진짜 많다!”
“이 방은 다 어디 써요?”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제 방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하는 모습이 퍽 재밌었다.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마음 한편으로는 이 방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애써 자신을 달래는 것 같았다.
실패와 상실에 익숙하고 좋은 건 남에게 가는 일이 익숙한 아이들은 일부러 기대하지 않는 법을 익혔다.
기대가 클수록 마음이 더 쓰라렸으니까.
물론 사람 마음이 그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대는 아이들을 찾아왔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배반했다.
륜스이는 이제 아이들에게 기대의 의미를 본래대로 바꿔줄 생각이었다.
때로는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뤄질 수도 있는. 행복의 전조 같은 감정으로.
“적어도 나 혼자 쓰진 않겠지? 당연히 너희가 여기서 지내야지.”
“우아아아! 형! 형, 들었어? 여기가 우리 방이래!”
“방이야 넘치도록 있으니 원하는 곳으로 골라 보거라. 아, 혼자 있기 싫으면 같이 지내도 괜찮다.”
“네! 빨리 가 보자! 제일 좋은 방은 내 꺼!”
한 무리의 비글 떼처럼 왁자지껄하게 방으로 달려가는 모습에서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등에서 보이는 건 미래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이었다.
여전히 옆을 지키는 아디라와 함께 느긋하게 아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방으로 들어서며 륜스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아디나와 같이 써야지?”
“네. 아무래도 걔는 저랑 같이 자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 아직 어릴 때는 가족이랑 같이 자는 게 좋지.”
“저기···”
아디라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하려다 흠칫하며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륜스이는 말끝을 흐리는 아디라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 그게 가끔 같이 자도 되나 해서요.”
대상이 빠진 말이었지만 륜스이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디라에게 분명하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원래 나이를 많이 먹으면 누군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거든. 겉으로는 고독에 익숙한 척하지만 겪어보니 알겠더구나. 그거 다 허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22살 아니셨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륜스이는 물끄러미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22살이 됐지만, 여전히 그는 노인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고쳐야 하나 생각도 해봤지만, 딱히 불편한 건 없었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두기로 했다.
하루아침에 변할 것 같지도 않았고.
딜런이나 엘레나처럼 원래 알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젊은 적 모습도 나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 시절의 모습과는 꽤 달랐다.
달라야만 했고.
백수(百壽)를 넘어서 어린애처럼 징징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고, 이제 다른 곳도 봐야지.”
슬그머니 말을 돌리는 륜스이를 따라 아디라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2살이면 어떻고 122살이면 어떤가.
그저 그녀의 따듯하고 자상한 고양이 아저씨이기만 하면 됐다.
“진짜 넓다!”
“맞아! 여기서 놀면 엄청 재밌겠다!”
“이런, 여긴 노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 될 터인데.”
“네?”
순식간에 방을 모두 돌아본 아이들을 데리고 집 뒤편의 정원으로 나간 륜스이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보기는 좋다만, 여기는 너희를 위한 훈련 장소로 만들 생각이다. 도장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도 더 가르칠 생각이고.”
“와! 그럼 우리 이사하면 검술 배우는 거예요?”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당연히 배워야지.”
꽤 잘 꾸며진 정원이었지만, 처음부터 이곳의 용도는 정해져 있었다. 이 집을 구매 후보로 꼽은 이유가 이 정원이었으니까.
륜스이는 지난 삶에서 시작을 너무 어렵게 했다.
그나마 엘레나의 도움이 있었기에 어찌어찌 검술도 배웠지만, 그녀의 검술은 거대한 태도를 쓰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기를 버릴 수도 없었다.
순수 진은으로 검신을 만든 태도는 전설적인 마법 물품을 제외하면 어디에 가도 최고의 명검 대우를 받을 무기였다.
무기에 사람이 맞출 필요가 있을 정도로.
“도장 만드시려고요?”
“오냐. 너희도 그렇지만,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냐.”
어렵게 시작한 륜스이조차도 다른 모험가 지망생에게 비교하면 좋게 풀린 편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 있었고 장비도 좋은 데다, 멘토가 되어줄 사람도 만났으니까.
그는 꿈을 품고 모험가가 된 젊은이들이 덧없이 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 그 시절에는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워 보고도 못 본 척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가능하면 더 많은 젊은이가 가능성을 피울 수 있기를.
다시 시작하는 삶에서 노인이 품은 작은 꿈이었다.
“나는 사람이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구나. 꿈을 위해 걷는 길에서 허무하게 쓰러지지 않으면 좋겠고.”
“네···”
정이 물씬 풍기는 말에 아디라는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단지 가여워서 내민 동정이 아니라, 조금 더 넓고 큰 뜻으로 자매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륜스이의 뜻대로 자기도 뭔가 꿈을 찾아서 이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소녀가 처음으로 꿈을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꿈이라는 걸 생각해도 된다는 것도, 그걸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면 오래, 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으이, 마! 니, 그래 물렁하게 넘어가면 안 된다니까?”
“무슨 일이냐.”
“아니, 좀 들어 보그라! 임마가 글쎄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아나?”
“애들도 있다. 목소리 좀 죽여라. 이제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통 좀 그만 만지고.”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되길 원하던 소녀의 바람은 부지불식간에 깨졌다. 정원에 감돌던 따듯한 분위기는 갑자기 들려온 괄괄한 목소리로 인해.
작은 행복을 위협하는 전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