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대의 여명
밤안개는 힘이 강하다거나 속도가 빠르다고 쓸 수 있는 검술이 아니다.
초인적인 인지 능력을 요구하지만, 단순히 그것만 있다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밤안개가 뚫는 건 상대의 검기(劍技)도 아니고, 방어구도 아니다.
공격이 거의 성공한, 도저히 회수할 수 없지만 회수할 필요도 없는 순간의 절묘한 심리를 노리고 꿰뚫는 공격.
밤안개를 구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당연히 차분한 마음이다.
맞으면 죽는 공격을 거의 허용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렇기에 밤안개는 철저하게 재능있는 자만 다룰 수 있는 검이었다.
“이거 대단하구나. 상상도 못 했어. 페나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니?”
“네.”
아디라는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들끓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검이 불필요한 필살의 찌르기, 실패하면 죽음만 기다리는 비기를 쓰고도 아디라는 레오나르도를 이기지 못했다.
본래 방패를 쓰는 사람이라서일까.
레오나르도는 오른손으로 검을 내려치면서도 아무것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방패를 쥔 것처럼 비스듬히 몸을 가리고 있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찌르기에 맞서 그는 왼손으로 막대를 막아냈다. 다급하긴 했는지 제대로 걷어내지는 못하고 팔뚝으로 받아낸 수준이었지만.
결과는 누가 어떻게 봐도 아디라의 패배였다.
그녀에게는 다음 공격을 할 여력이 없었고, 레오나르도가 같은 공격에 다시 당해줄 리도 없었으니까.
배운 시간이 짧아 바닥이 얕다는 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하하, 선생님이 져버렸네.”
“네?”
“음, 그렇잖니. 실전이었다면 팔과 목이 한 번에 뚫리면서 죽지 않았을까?”
아디라는 사람 좋게 웃는 레오나르도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실전이었다면?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지?
복잡한 생각이 마구 떠오르고 한편으로는 화까지 났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검술이 모욕받는 것 같아서. 대결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녀의 대답이 무섭도록 무겁고, 시리도록 차가운 건 그래서였다.
“아니요. 실전이었다면 선생님은 방패도 드셨을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
“오늘은 무승부로 하자. 다음에 다시 승부를 보는 거야.”
부드럽게 휘어지는 레오나르도의 눈 속에서 단단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아디라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치졸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꽤 화난 것 같았다. 단지 레오나르도는 교사로서 학생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아디라는 그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좋아졌다. 검술에 진심이고, 가르치는 데 진심이라는 느낌이라서.
“알겠어요. 그래도 이건 확실히 해야겠네요. 오늘은 제가 졌어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음? 무승부로 하는 거 아니었니?”
“아니요. 진 건 진 거니까요. 진검이라는 가정을 하면 선생님은 방패가 있었을 테니 제가 졌겠죠. 가정을 빼고 순수하게 일어난 일로 평가해도 선생님은 제 공격을 막으셨으니 진 거고요.”
레오나르도는 어떤 오기나 분노도 없이 담백하게 사실만 말하는 아디라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조금 전, 아디라의 검이 찔러 들어오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륜스이가 이 아이에게 가르친 검술은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다.
비기나 오의라서 안된다는 문외한이나 할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지 아디라가 사용하는 기술은 타인에게 검술이란 이런 것이라고 예시로 보여주기 적합하지 않았다.
일단 지나치게 간결하다.
서로 검을 쥐고 하는 싸움이라는 게 본래 일합 승부가 되기 마련이라지만, 수준이 너무 높고 동작은 작다.
안에 담긴 전투 교리는 극단적이고.
한평생 검과 별 인연이 없던 사람은 보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 하리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아, 우아! 선생님이랑 비긴 거야?”
“쟤가 자기가 졌다고 했잖아.”
“그래도 팔은 때렸잖아! 대단해!”
동작이 크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제 또래가 어른에게 공격을 성공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탄했다.
먼 곳의 별보다 가까운 곳의 등불이 때로는 더 밝고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륜스이가 지나치게 멀고 지나치게 높은 별이라면 아디라는 아이들에게 바로 옆에 있는 등불 같았다.
자신들도 닿을 수 있는 등불.
레오나르도는 열정적인 아이들의 반응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 더 다른 아이를 불렀다.
반응이 좋은 건 좋은 거고, 어떤 걸 가르칠지는 보여줘야 하니까.
“자, 그러면 아디라는 선생님과 나중에 한 번 더 겨뤄보기로 하고 다른 친구가 시범을 보여줄까? 벤이랑 베르너는 어떻니?”
“좋아요!”
“해보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아디라의 뒤를 이어서 벤과 베르너가 앞으로 나왔다.
륜스이의 제자들은 이미 도장에서 몇 번이고 겨뤄봤다.
그런 만큼 쉬이 승부가 나지 않았고, 박진감 있는 대결이 연출됐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빠르게 검을 대신한 막대가 서로를 노리고 오갔다. 땀방울이 비산하고 뜨거운 열정이 충돌하며 공기를 덥혔다.
그야말로 검술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대결이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아까보다 더 달아올랐다.
아이들은 자신이 배울 것을 보며 환호했고, 어른들은 자식들이 배울 것을 보며 감탄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제야 안심하고 륜스이를 돌아보며 꾸벅 인사했다.
이번에도 저 위대한 검사에게 신세를 졌다.
륜스이는 그저 흐뭇한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아줬다.
신시대의 주역이 될 아이들이 첫걸음을 내딛는 현장이 그렇게 저물었다.
따듯하게, 부드럽게.
***
돌아오는 길에도 부두는 부산했다.
조명이 부실한 시대에 야간작업이란 위험천만한 일이다. 당연히 낮에 최대한 일을 해둬야 한다.
붉은 석양이 옷자락을 드리울 때쯤이 가장 바쁜 건 항구의 숙명이었다.
“좀 있으면 해진다고, 빨리 움직여!”
“아따, 빨리하고 있잖으요이. 겁나게 재촉하네, 진짜.”
“어휴, 네가 제일 느리다고. 이 새끼는 진짜 입만 살아서!”
“느리긴, 내가 제일 빨리하고 있고마!”
거친 말을 주고받는 인부들의 얼굴에는 의외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퇴근이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의 본능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륜스이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사부님. 저 아저씨들은 왜 화내면서 웃어요?”
“화내는 게 아니라서 그렇지.”
“그런데 말을 왜 저렇게 무섭게 해요?”
“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저렇단다. 하고 싶은 말을 놔두고 엉뚱한 말을 던져서 오해를 사곤 하지. 저 사람들이야 워낙 친해서 속에 담아둔 말을 듣지 않고도 이해하니, 웃는 게다.”
“헤, 부끄럼쟁이 아저씨들이네!”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정네들이 졸지에 부끄럼쟁이로 변했지만, 륜스이는 피식 웃기만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부끄럼쟁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따져 보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기쁨에 환하게 웃는 아이들에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학교는 어땠느냐?”
“멋있었어요!”
“재밌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서 쏟아지는 긍정적인 반응에 륜스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학교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무언가로 다가올 일은 거의 없다.
전근대 군사학교처럼 무자비한 커리큘럼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봐야 글을 읽고 쓰는 것과 간단한 산수, 체육 활동과 기초 미술에 음악 정도다.
하나 더 하자면 윤리 정도.
정말로 꼭 필요한 것만 조금씩 가르치는 셈이니 학습에 큰 부담을 느낄 일도 없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었다.
“친구가 엄청, 엄청 많아서 좋아요!”
“맞아! 안코나 애들이랑 전부 친구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세계에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고 같이 노는 건 꽤 어렵다.
많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를 도와 노동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공간적 제약도 꽤 있고 불안한 치안도 문제가 된다.
덕분에 친구라고 해봐야 동네의 몇 정도 사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또래를 천 명도 넘게 볼 수 있는 장소는 신세계였다.
“다들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이것도 사부님이 생각하셨다고 했죠?”
“그래.”
이사벨라는 어떤 자랑이나 과시도 없는 담백한 대답을 들으며 새삼스럽게 사부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또래보다 생각이 깊은 그녀는 이 학교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다.
만들고 운영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건 오히려 중요하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는 아이들이 안코나에 가져다줄 이익을 생각하면 무조건 남는 장사니까.
정말 대단한 건 누구도 의무 교육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놀라운 발상을 떠올리는 창의성이었다.
그야말로 시대를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두 눈으로 본 이사벨라는 자신의 길을 찾았다.
“사부님.”
“오냐.”
“저도 사부님처럼 되고 싶어요.”
“나처럼? 검사가 되겠다고?”
“아니요.”
이사벨라와 오간 대화에 아이들과 륜스이 모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라도 륜스이 페나라고 하면 그 놀라운 검술부터 생각한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늘을 베는 검사를 두고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저도 사부님처럼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게도 뜻이 있겠지. 그 수단이 검은 아니라는 말일 테고.”
“네.”
“그러면 내가 해줄 말도 정해졌구나.”
륜스이는 걷다 말고 멈춰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는 그런 자세로도 또래보다 키가 작은 이사벨라보다 시선이 높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사벨라를 내려보며 따듯하게 말했다.
“네 뜻대로 하거라. 나는 네가 어떤 길을 걷더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네!”
륜스이는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논했지만, 무엇이 돼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아직 어리니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는 걸 강조했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스스로 시야를 좁게 만들어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확고하게 뜻을 정했다면, 그가 할 일은 믿고 밀어주는 것뿐이다.
그게 스승으로서 바른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사벨라는 륜스이의 부드러운 말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이사벨라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적에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컸으니 그 점에 불만은 없었다.
단지 언제나 몸이 약해서 집안에 누워만 있었기에, 그녀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 환상과 궁금증이 있었다.
“열심히 할게요!”
“오냐.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고.”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있다면 사부님 같은 분이 아닐까. 따듯하고 다정한, 하지만 언제라도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녀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륜스이에게 폭 안겼다.
그의 부드러운 털과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이사벨라가 시작을 끊자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모여서 륜스이에게 안겼다.
아이들에게 파묻힌 모양으로 륜스이는 모두를 품에 안고 웃었다.
시대의 변화를 부르는 게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아이들이야말로 그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다.
그야말로 여명, 그의 품에 신시대의 여명이 있었다.
***
아이들과 정을 나누고 돌아오는 길은 순식간에 끝났다.
따듯한 저녁과 편안한 휴식이 기다리는 집이 모습을 드러내고, 알게 모르게 피곤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 문을 열었다.
끊임없이 강조한 위생 의식 덕분에 우르르 손을 씻으러 몰려간 아이들을 두고 응접실에 들어선 륜스이는 흠칫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나도 입학식에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요. 입학식은 놓쳤지만 다른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륜스이는 굳이 돈 따위는 낼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엘레나는 그렇게까지 신세 질 수 없다며 식비 따위를 대고 있었다.
물론 이사벨라의 치료비로 재산을 모두 사용한 그녀의 지갑이 풍족할 리 없었기에 종종 모험가 길드에서 주는 일을 해서 벌어야 했다.
오늘도 하필 몇 주 전에 잡아둔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그녀였다.
“예. 그런데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오전 중으로 끝날 일 아니었습니까?”
“그게, 생각도 못 한 친구를 만나서.”
“친구?”
“응. 예전에 좀 크게 싸운 친구가 있었거든. 그런데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표정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하고 오느라 늦었어.”
빠르게 일을 마치고 합류할 예정이었던 엘레나가 보이지 않아 의아하긴 했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흠, 그렇군요.”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합니다만, 제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아니, 조금 미안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륜스이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엘레나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일은 혼자서도 척척 할 수 있다. 사실 말이 좋아서 어지간한 일이지, 그녀가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달리 생각하자면 엘레나의 말은 륜스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어렵거나 심각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친구가 사는 곳 근처에 오거가 나타났다고 해.”
“오··· 거 말씀이십니까?”
륜스이는 오거라는 단어에 표정이 굳었다.
그의 긴 삶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낙인으로 남은 과거가 기억의 늪에서 슬그머니 기어 올라왔다.
과거의 사슬이 현재를 침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