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321/497)

반도의 주인

다들 축 처진 꼴이 보기 싫어서 잘난 척하고는 있었지만, 카를도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로란체 육군이 전쟁 치를 일이 무에 그리 있겠는가.

이 성벽에 달라붙은 인원이 딱히 육군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씨발! 올 테면 와봐!”

지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지긋지긋하게 당한 경험 덕분인지 포격이 시작하기 전에는 왁자지껄하게 웃을 여유도 있었다.

다들 베테랑처럼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단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그 허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 겪을 때의 충격은 더 이상 없지만, 반대로 지겹도록 겪어봤으니 아는 것도 있다. 포탄에 맞으면 사람이 베이거나 찢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터져버린다는 사실 따위가 그랬다.

사실 정확하게 성벽 위에 있는 병사를 노리고 포탄이 날아들 확률은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없다시피 하다는 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언제나 설마 하는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나쁜 쪽으로.

카를은 얼마 전에 상체가 아예 날아가 버린 전우의 잔상을 애써 지워내고는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욕으로 공포심을 몰아내며 악에 받쳐 소리쳐댔다.

“미친놈아! 그런다고 너한테 안 가!”

“알 게 뭐냐! 아무튼 오라고!”

“진짜 미친놈인가? 포탄에 뭘 오라 가라야!”

“아, 내 맘이야! 어?”

주변에 있던 친구가 기겁해서 그를 뜯어말렸지만 카를은 개의치 않았다.

이럴 때 용기를 보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는 평소에 딱히 나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없을 때는 욕을 한 사발 퍼부으면서도 나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날아오는 포탄의 방향을 보고 멍청한 소릴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저게 저리로 가면 안 되는데? 가, 각하! 피하십쇼!”

구형 탄이라 탄속이 그리 빠르지 않아서일까. 어지간한 사람 정도로 크기가 커서일까.

어쩌면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 덕분인지도 모른다.

날아오는 거대한 포탄이 홀로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카를의 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것의 방향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를 쪽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안전한 내성의 심부에 틀어박혀 있어도 괜찮지만 가장 위험한 격전지에 나와 있는 로란체 공작, 프란체스코에게 날아가는 포탄을 보며 엉겁결에 외쳤다.

그저 외쳤다.

일개 병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날아오는 포탄을 막을 수도 없었고, 달려가서 프란체스코를 구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포탄은 무정하게도 정확하게 로란체 공작을 짓뭉개기 위해 날아갔다.

“어?”

감히 누구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쇳덩어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미친 짓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란체인의 자랑이자 긍지인 필리포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게 가능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 사실을 카를은 검의 옆면으로 포탄을 비스듬히 튕겨내 위로 보낸 남자를 보고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멍청한 소리는 그 깨달음에 따라온 덤이었다.

“로란체는 죽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솔직히 사방이 시끄러워야 할 전장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할 법한 거리.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진 공기를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 가슴은 뜨겁게 불타오르며 쿵쾅댔다.

뭐라도 하라고, 멍청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무슨 짓이라도 하라고 재촉하면서.

“으아아아아아! 로란체여, 영원하라! 공작 각하 만세!”

벅찬 감정이 포효가 되어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카를이 참지 않고 내지른 감정은 곧 태풍처럼 주변에 있던 다른 병사들까지 휩쓸었다.

“로란체여 영원하라!”

“죽지 않는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순식간에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병사들은 두 눈에 힘을 줬다. 지친 팔다리에도 한껏 힘을 줬다.

그들은 이제 날아드는 포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고 다른 전장에서는 다시 죽음이 두렵고, 다치는 게 두려운 소시민으로 변할지 몰라도 지금 이곳.

로란체를 지키는 이 전장에서만큼은 모두 여느 정예병 못지않은 최고의 전사였다.

그렇기에 버틸 수 있었다.

다시 날아든 포탄에 강타당한 성벽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순간에도.

“무너진다! 옆으로 빠져! 휘말리면 바로 죽는다! 살아남아야지!”

“빠지고 나면 바로 다시 붙을 준비해!”

“거리만 충분하면 안 죽는다! 쫄지 마!”

한 군데가 아니었다.

한계의 한계까지 봉착한 성벽이 차례대로, 무너지며 속살을 드러냈다. 하지만 병사들은 두려워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지금 그들은 일개 소시민이 아니라 도시를 지키는 전사였으니까. 전사의 심장을 가졌으니까.

“좋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오래도 필요 없다, 병사들이여!”

바로 조금 전에 비참하게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았는데도 기죽지 않은 젊은 공작의 목소리가 그들의 투지에 기름을 부었다.

고개를 돌린 병사들에게 당당하게 칼을 뽑고 외치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방금 죽을뻔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으르렁거리듯 승리를 말했다.

“오늘 낮까지, 한나절만 지켜라! 살아남아라! 그러면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또한 로란체 공작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시대는 잔인해서 돈이 많은 이라고 사람을 보살피지 않았다.

가진 게 많으니 좀 나누면 좋지 않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도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용감할 수 없다.

죽거나 다치면 결국 제 인생만 망가지고 끝나니 왜 용감하게 싸우겠는가.

지금 도시를 지키는 병사들이 투지를 보이는 건 그들의 등 뒤에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형제가,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망치면 가장 먼저 그들이 끔찍하게 살해된다는 걸 알아서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이 없을 수는 없다.

여기서 죽거나 다치면 도시를 지키더라도 한 인간의, 가족의 인생이 모두 망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프란체스코는 그 불안을 모두 지워버렸다.

“앞으로 로란체를 위하여 싸우는 자가 다친다면 평생 부족함 없이 살 것이요, 죽는다면 그 가족이 평생 부족함 없이 살 것이다. 나 프란체스코 로란체가 가라앉지 않는 진주의 이름에 맹세하노니, 이는 진주가 가라앉기 전까지 지켜지리라!”

“오오오!”

“프란체스코 각하, 만세!”

카를은 정신없이 무기를 흔들며 함성 질렀다.

성벽은 무너져 군데군데 구멍을 드러냈다. 적은 다가오고 있다. 심지어 숫자조차 어마어마하도록 많다.

반면에 아군은 지쳤다.

포격에 지치고 습격에 지쳤다. 수는 적고 막을 곳은 많다.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조건 따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싸우고 싶을 따름이었다.

“다 내려가지 마! 성벽으로도 오잖아!”

“1, 2, 3, 4대대만 내려가서 막아! 나머진 성벽에 남아라! 어차피 위든 아래든 어디가 뚫려도 우린 끝이야! 전부 막아야 한다고!”

아수라장이 펼쳐졌지만, 병사들은 칼같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며 륜스이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프란체스코를 바라봤다.

“능숙하시군요.”

“평생 해온 일이니, 능숙해야지요.”

“음?”

“전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래를 말하는 거지요. 상인으로, 정치인으로 평생 살면서 느낀 건 사람을 움직이는 건 정당한 대가라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게 중요하지요.”

프란체스코는 피식 웃으며 칼을 내렸다.

그 얼굴은 조금 전에 병사들의 전의를 고취한 사람답지 않게 퍽 씁쓸해 보였다.

“저는 잘 싸우지 못합니다. 검술에는 젬병이라서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제 다음은 싸우는 사람들의 영역이군요.”

륜스이는 많은 부분이 생략된 프란체스코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지도자다.

많은 통치자가 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달콤한 보상을 말한다.

하지만 그건 약탈로 벌어들일 금화 주머니나, 노예로 팔아버릴 포로처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반면에 프란체스코는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부담이 될 법한 보상을 말했다.

병사 본인의 인생을, 남겨진 가족의 인생을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아마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는 정말로 말한 대로 행할 것이다.

스스로 상인의 방식을 논하고, 정당함을 논했으니까.

그런 남자에게 륜스이가 해줄 수 있는 건 간단했다.

“충분히 잘 해주셨습니다. 이제 다음은 맡기시지요.”

륜스이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성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저 멀리서 거대한 공성 병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신시대의 상징인 대포가 아니라, 공성탑이나 운제 따위의 조금 더 전통적인 병기가.

그는 장한 용기를 보여준 병사들을 위해, 기꺼이 정당한 보상을 외친 프란체스코를 위해 선물을 주기로 했다.

“뭐, 뭐야!”

“미친놈인가?”

“아냐, 어제 그놈이다! 혼자 강 건너온 놈!”

륜스이의 명성은 대체로 알리아타 북부에 널리 퍼진 편이었다.

소문이 느린 시대의 특성상, 직접 그와 싸워야 했던 로란체 사람들과 륜스이와 함께 살아가는 안코나 시민들을 제외하면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새로이 탄생한 별의 이름 정도는 알려졌지만, 정작 신상에 대해서는 엉망진창으로 알려졌다.

누군가는 동대륙에서 온 사신이라며 떠들어댔고, 다른 누군가는 아예 키가 10m는 되고 일검에 배를 조각내는 거인이라고 떠들어 댈 정도.

당연히 아랫지방의 병사들은 륜스이 페나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날 알았다면 저런 건 쓰지 않았을 터인데.”

륜스이는 대군의 앞에 홀로 서서 정신을 집중했다.

난데없이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져 한 번 삶을 살고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사는 남자.

싸움이라고는 평생 해본 적도 없다가 덜컥 검을 쥐고 마모되고 메마르며 망가졌다가 비로소 완성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

홀로 세상과 싸워야 했던 남자의 삶이 검에 실린다.

한 사람이 평생 느낀 좌절과 고통, 절망이 칼에 얹히고,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다시 또 그 위로 얹히니 그 검을 무엇에 비할까.

“저건···”

다가오는 적도, 그걸 지켜보는 아군도 륜스이를 보며 전율했다.

그저 칼을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서 있을 뿐인데 온몸의 신경이 미친 듯이 비명 지른다. 지금 무언가 일어난다고, 재앙이자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들의 기대를 증명하듯 륜스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지를 가리키던 검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수평을 이뤘다. 그대로 나아가기 시작한 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던 호선이 완성되는 순간.

앞을 가로막던 것이 갈라졌다.

“저게, 하늘을 가르는 검···”

급조했다지만 두꺼운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가죽을 덧대 어지간한 투석기 정도는 버틸 수 있던 공성탑이 속절없이 사선으로 베였다.

쐐기에 강철을 두르고 지붕에도 얇게나마 철판을 두른 파성추도 비스듬히 갈라졌다.

거대한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거기 탔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아래에 있던 병사들과 떨어지는 병사들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전장에서 프란체스코는 멍하니 륜스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높고 큰 뜻이 능히 하늘에 닿으니, 세계 제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구나.”

스스로 만든 아비규환을 앞에 두고도 홀로 고고한 남자를 보며 프란체스코는 ‘제일’이라는 말의 뜻을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문득 가여워졌다.

저런 남자를 평생 쫓아갈 필리포가.

“우아아아아!”

“최고다!”

“검성! 검성!”

다른 어디보다도 륜스이를 아는 이가 많은 땅이었으니만큼, 병사들은 정확하게 그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뜨거운 목소리를 등에 업고 꼿꼿하게 서서 적을 보는 모습이 신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프란체스코가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도 가지. 저런 남자가 성을 지키고 있는데 적에게 뚫릴 수야 없지 않겠나.”

“예, 각하!”

대답에 격정이 담긴 걸 느낀 프란체스코가 쓰게 웃었다.

가능하면 냉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해야 하는 호위들까지 격정에 사로잡히게 하다니. 과연 놀라운 남자였다.

물론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굳이 내려갈 필요도 없는 자신이, 무너진 성벽의 틈을 메우려고 하는 것도 심장이 들끓어서라는 걸.

격정적인 군주는 사랑받지만 신뢰받지 못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짐짓 냉정하게 말했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지금 그는 불타고 있었다.

위대한 검사가 만든 풍경에, 사랑하는 도시를 지키고 싶은 바람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앞으로 나가서야 방해만 되겠지. 자네들은 날 지키지 말고 알아서 틈을 메우게.”

“가, 각하!”

아무리 가슴이 뜨거워졌어도 본분만은 잊지 않은 호위들이 기겁해서 소리쳤지만, 프란체스코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게. 지금 내 곁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자네들과 멀어도 가까워도 나는 보호받고 있다네. 로란체 시민들에게.”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과 함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아군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일검에도 끝내 꺾이지 않은 적이 최후의 강습을 시도하며 내는 소리였다.

그렇게 각자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움이 시작됐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기나긴 싸움이었다.

***

대체 몇 명이나 죽였을까.

딱히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높이의 이점은 절대적이다.

카를은 또 한 명을 칼로 내려쳤다.

“크악!”

“이런 썅!”

돈이라면 어디 가서 안 밀리는 로란체답게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칼도 저급품은 아니다. 나름대로 질 좋은 철로 대장장이가 신경 꽤 써서 만들었다.

하지만 온종일 이어진 격전에는 버티지 못했다.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한들 칼은 칼이니까.

제 몸과 같은 재질의 갑옷이며 무기와 부딪치다 보면 부러지는 게 그 숙명이니까.

“나, 무기 부러졌어!”

“너도냐? 나도 그런데?”

“그딴소리 듣고 싶어서 한 말 아냐. 아무거나 달라고!”

“아오, 아무거나 주워 써! 옜다!”

끄트머리가 부러져서 창이 아니라 봉이 된 무기를 마구 내려치던 친구는 카를의 외침에 짜증 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줬다.

카를은 그걸 쥔 다음 황당해서 투덜댔다.

“아니, 이걸 무기라고 줬냐?”

“아, 없으면 없는 대로 쓰라고!”

부러진 창대는 길기라도 하지, 녀석이 던져준 건 부러진 픽엑스 자루였다.

아래로 길게 뽑은 랑겟까지 부러져서 이제는 폴엑스였던 것으로 변한 몽둥이.

몽둥이라도 제대로 된 워 클럽 같은 건 충분히 무기로 쓸만하지만, 이런 물건으로는 제대로 타격을 가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은 여전히 바글바글했고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으아아! 뒤져! 뒤지라고!”

“켁! 컥!”

당장 수가 없어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의 머리통을 마구 후려친 카를은 다시 한번 쌍욕을 내뱉었다.

투구를 두들기다 보니 그나마 남은 막대기까지 부러진 것이다.

손잡이만 덩그러니 손에 쥔 그는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어쩌라고···”

다행히 그가 뭘 어떻게 해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긴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금까지 징그럽게 몰려오던 적군이 빠지기 시작했으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을 넘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건지, 아침부터 해가 떨어져 어두워진 지금까지 계속 몰려오던 적이 드디어 물러났다.

카를은 그 모습을 보며 주저앉고 말았다.

“사, 살았나···”

“살았지, 새끼야! 미친놈! 미친놈아!”

“기운도 넘치네, 나 때릴 힘이 남았냐? 이 새끼, 이거 제대로 안 싸웠구만?”

“친구 놈이 미친 짓을 하는데 안 때리게 생겼냐!”

“미친 짓이긴 했지···”

륜스이의 경이로운 검은 대부분의 공성탑을 베었다.

그렇다. 대부분이었다.

범위의 밖이었는지 가장 왼쪽에 있던 공성탑은 용케 살아남아 돌진했다. 개미 떼처럼 가득한 적병과 함께.

대체 무슨 불굴의 의지를 담은 건지 성에 배치된 포격에 두들겨 맞아 중간중간 벽이 뚫리고 기둥도 일부 부러지면서도 탑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 탄 병사들도 마찬가지.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눈에 핏발이 서서 꾸역꾸역 탑을 밀고 들어왔다. 누군가는 포탄에 상체가 터져나가고, 누군가는 화살에 눈이 꿰뚫리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 의지가 빛을 발한 건지 성벽에 도착한 공성탑이 거대한 다리를 내리는 순간, 병사들은 공황에 빠졌다.

주요 전력인 기사들은 전부 무너진 성벽으로 돌입하려는 적의 기사들을 막기 위해 내려가 있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충격에 휘청대고, 먼지에 기침하면서도 가장 먼저 달려 나가 다리 앞을 가로막은 자가 카를이었다.

“하하, 근데 안 그러면 다 죽게 생겼었잖아.”

“그걸 왜 네가 하냐고, 미친놈아.”

“할 사람이 없으니까? 생각하니까, 좀 억울하네. 나쁜 새끼야, 좀 같이 가주면 어디 덧나냐? 아무도 안 나서면 좆되는 상황에서 꼭 친구를 그렇게 혼자 보내야 했냐?”

“난 너처럼 미친 새끼가 아니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리를 통해 우르르 몰려오는 적병을 가로막은 카를에게 가장 먼저 합류한 사람이 이 친구 놈이었다.

딱히 적을 막기보단 그를 구하려고 한 것 같았지만.

“후아, 그래도 잘 됐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이대로 더 버틸 수 있을까? 한 번 더 오면 힘들 것 같은데···”

이번 전투 내내 사자처럼 용맹하게 포효하고 싸우던 카를도 친구의 의문에는 답을 하지 못했다.

적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고 한 번은 막았다지만, 다시 공격이 시작되면 다음에도 막을 자신은 없었으니까.

믿었던 강 건너의 지원군은 오늘 온종일 뗏목을 만들고 띄우는 시늉만 하다 끝났다.

물론 갑자기 도하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고, 적이 지키고 있다면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은 법.

일부는 역시 안코나 놈들은 믿을 게 아니었다고 욕까지 했다.

“모르지··· 정말 모르겠, 어?”

억지로 안 된다는 말을 피하고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던 카를은 멀리서 하나둘 작은 불빛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고 하던 말을 잃었다.

반딧불 같은 불씨는 서서히 숫자를 늘려 수백 개에 달했다.

그게 뭔지 물어보려던 카를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서로 주고받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으니까.

대답은 불꽃과 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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