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355/497)

경고

겨울의 절정을 견디는 산은 싸늘하기만 했다.

차갑기 그지없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꾸역꾸역 걸음을 옮기는 리카르도가 죽을 맛인 이유였다.

“사, 사부님!”

“왜 그러느냐?”

“추, 추운데요?”

“겨울인데 추운 게 당연하지. 얘야, 겨울에 너무 안 추우면 그게 더 문제란다.”

바람 불 때마다 귓불이 떨어지는 것 같건만, 사부님은 자신과 달리 여유롭기만 했다.

물론 륜스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몸에 걸친 옷이야 두꺼운 옷을 있는 대로 차려입은 리카르도보다 얇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않은가.

“뭔가 치, 치사한 것 같아요!”

“뭐가?”

“사, 사부님은 하나도 안 추우신 것 같아서요!”

“이 정도가 무에 그리 춥다고?”

리카르도는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멍청하게 큰 공동으로 찬 바람이 숭숭 들어가 천장을 식혔다. 입속이 싸늘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다문 녀석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으아, 눈도 왔잖아요!”

“눈은 또 왜? 겨울에 눈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당연하지 않거든요!”

알리아타는 대체로 따듯한 편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체로 연중 살기 좋은 날씨를 유지한다. 여름에도 륜스이가 느끼기에 30도를 넘는 날이 드물고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눈 오는 날 같은 건 안코나에서 평생 살다시피 한 리카르도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하필 안코나 모험가들도 겨울에는 춥다고 활동을 자제하기에 아쉽게도 녀석은 눈 볼 일이 없었다.

그 억울한 마음을 담아 녀석이 덜덜 떨리는 입으로 투덜댔다.

“으, 으어 안코나에선 한 번도 눈 안 왔잖아요···”

“그야 안코나는 따듯하니까. 하지만 다른 곳은 눈 오는 곳이 더 많단다. 더구나 여긴 산이지 않으냐. 산은 아래보다 더 추우니 당연히 눈이 오지. 이 정도로 그렇게 벌벌 떨면 어쩌느냐. 아직 약하구나, 제자야.”

리카르도는 사부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아니, 정말로 아버지였다. 잘 풀려봐야 뒷골목 깡패, 안 풀리면 양아치 정도로 쓰레기처럼 살다가 죽어갈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줬으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사부님이 너무 얄미웠다.

곱게 휘는 눈매도, 장난기를 잔뜩 머금고 빛나는 푸른 눈동자도, 당장이라도 손가락으로 튕기고 싶은 분홍색 코까지.

문득 리카르도는 부들부들 떨던 올리버의 마음이 이해됐다.

“사부님은 터, 털이 있잖아요! 전 털이라고는 머리털밖에 없다고요!”

“흠, 이차성징도 왔으니 거기 말고도 있을 텐데?”

“아, 그런 말이 아니고요!”

밉살맞게 웃으며 제자를 신나게 놀려먹던 륜스이가 갑자기 말을 세웠다.

“그렇게 추우면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도록 하자.”

“예? 벌써요?”

“녀석, 겨울 산은 해가 빨리 떨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네가 이리 추워하지 않느냐. 아, 그런데 제자야.”

“예?”

륜스이는 나약한 제자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물론 든든한 털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그가 추위를 덜 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양이는 추위에 강한 동물이 아니다. 메인쿤 같은 장모종 일부는 추운 곳에서도 잘 산다지만, 기원이 열사의 사막인 동물이다 보니 대부분 추위에는 좀 약했다.

더구나 륜스이의 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윤기 나는 짧은 털이 전신을 덮은 그가 얇은 두루마기 한 벌로 추위에 거뜬히 견디는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네가 이 정도로 추워 죽겠다고 여기는 건 더 추운 걸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단다.”

“더 추운 곳도 있다고요?”

“그럼 없겠느냐? 제국의 북방은 일 년의 반이 겨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고향도 그 비슷하고. 겨울이 그리 길진 않으나 만만치 않게 추웠지.”

“세상에···”

“흠, 여름에는 종종 바닥이 녹아 흐르기도 했단다.”

당장 그의 고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영하에 걸치는 수준을 못 버텨서야 그의 고향 땅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심지어 여름에는 아스팔트가 종종 녹아내릴 정도였고.

여름이면 영상 40도를 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고향을 생각하니, 새삼 그런 정신 나간 동네에서 용케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들이.

평생 거기서 산 사람에게야 딱히 대단한 것도 없었지만, 륜스이의 말을 듣던 리카르도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녀석은 입을 쩍 벌리고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 사부님···”

“음?”

“사부님 고향은 혹시 지옥인가요?”

륜스이는 녀석의 질문에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호젓한 산길, 찬 바람 부는 계절에 맑은 웃음소리가 봉우리마다 울려 퍼지는 어느 저녁의 단상이었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카르도는 모험가 경력이 벌써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당연히 야영에도 꽤 능숙한 편이었다. 아마 여행이라는 걸 좀처럼 할 수 없는 시대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야영에 능숙한 또래는 좀처럼 차기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평생 풍찬노숙한 륜스이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뭔가 몇 번 문지른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자그마한 연기를 솔솔 풍기는 나무판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와···”

“녀석,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이러는구나. 그리 신기하냐?”

“네. 전 이십 분은 낑낑대야 불 나오던데요···”

활에 나무 막대를 끼워 비벼서 불을 피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긴 했다.

비숙련자는 이십 분 아니라, 이백 분을 그것만 잡고 매달려도 불을 못 피우곤 할 정도로.

그리 생각하면 어쨌거나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점에서 리카르도는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그야 요령이 부족해서 그렇지.”

“으··· 그 요령 좀 빨리 생기면 좋을 것 같아요.”

“글쎄다. 요령 생길 때쯤이면 네가 불 피울 일도 없어질 것 같은데.”

륜스이는 능숙하게 불판에서 연기만 피우는 불씨를 부싯깃으로 덜어내고 후후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잉걸불이 덩치를 불리며 제대로 된 불로 변했다.

거기다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밀어 넣으며 그는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제자에게 대답했다.

“지금이야 막내라서 네가 불씨부터 만드는 모양이지만, 좀 능숙해지고 나면 아마 다른 녀석이 하겠지.”

“어?”

“원래 신입 모험가가 들어오면 불 피우는 것부터 시키는 건 뜻이 있어서다.”

“예? 무슨 뜻이요?”

“살아남으라는 뜻.”

모험가는 용병과 또 다르다.

기본적으로 용병은 무리 지어 움직이는 게 기본이다. 최소 단위라고 해도 열 명은 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중간 정도만 돼도 수십, 수백은 충분히 넘는다.

작정하고 독립적으로 전쟁 대행 사업을 하는 용병단은 아예 천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당연히 생존 기술은 그다지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반면에 모험가는 많아도 열 명을 잘 안 넘는 규모로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소수로 움직이다 보니 사고가 나면 홀로 고립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다양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불 피우는 것, 식수를 만드는 것, 쉘터를 만드는 것까지 전부 신입에게 시키는 건 유사시를 대비해서지. 뭐, 고참들 귀찮아서도 있지만.”

“아···”

“그러니 충분히 배운 녀석에게 더 뭘 시킬 필요도 없단다. 네 녀석도 신입이 오면 괜히 도와준답시고 일 뺏어서 하지 말거라. 공포로 머리가 완전히 마비됐을 때도 반사적으로 나올 정도로 몸에 박아둬야 하는 게 생존법이니까.”

사실 리카르도는 지금까지 선배들이 움직이기 귀찮아서 죄다 시켜 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륜스이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게 다 뜻이 있어서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잡일을 많이 하는 대신 그가 불침번 서는 순번은 무조건 처음이거나 마지막이었다. 가끔은 아예 일어나지 말고 푹 자라고 하는 날도 있었고.

나름대로 배려받은 것이다.

“아, 그렇다고 너무 감동하지는 말고. 잡일 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도 사실이니까.”

“감동이 갑자기 막 사라지는데요.”

“사라지라고 한 거다. 어차피 불침번을 초짜한테 맡기면 불안하잖냐. 그러니까 제일 편한 시간대에 맡기는 거지. 괜히 중간에 깼다가 꾸벅대서 대형 사고 터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짜게 식은 리카르도의 시선에 륜스이가 맑게 웃었다.

그는 이 사실을 엘레나에게 처음 들었다. 정확하게 리카르도처럼 감동했고 또 실망한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런데 사부님.”

“응?”

“그··· 튀링겐에서는 왜 그러신 거예요?”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좀 정확하게 물어보거라, 인석아.”

오랜만에 떠오른 추억에 부드럽게 웃던 것도 잠시, 조심스럽다 못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게 묻는 리카르도에게 륜스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냄비를 꺼내 기름을 좀 뿌리면서 반문했다.

“아니, 한참 분위기 좋았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왜 굳이 그런 일을 하셨나 하셔서요.”

“하늘을 벤 거?”

“예.”

륜스이가 무역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회담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애초에 군사를 일으키는 목적이 무엇인가.

실체 없는 명예와 의미 없는 영광 따위에 혼이 팔리지 않았다면,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이는 힘 싸움이었고.

결국, 이익이 없다면 전쟁도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튀링겐 측 분위기도 변할 수밖에.

현실적으로 산맥을 넘어 안코나를 정복한다고 한들 점령을 유지하기 어렵다.

공동체에 제대로 된 소속감이 없거나, 소속감이 의미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 차이가 난다면 모를까, 안코나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니까.

아마 일시적으로 정복해봤자 끔찍하게 고생할 것이다.

수시로 테러가 발생하고 상인은 비협조적이며, 도시의 활동은 있는 대로 위축되리라는 건 정치를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야 무엇을 위해 고생해가면서 산맥을 넘어 남하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남정을 생각한 건 튀링겐 변경백의 입장이 모호해서였다.

“그걸 설명하려면 우선 그 친구들 처지부터 말해야겠구나. 이야기가 길어지겠어. 어차피 시간이야 많으니 설명해주면 되겠지.”

륜스이는 빠르게 육포며 야채를 냄비에 넣고 볶아냈다. 맛있는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벌렁거리는 제자의 코를 보며 한차례 웃은 그는 차분하게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튀링겐은 제국 내에서 입지가 영 애매하다.”

“애매··· 하다고요?”

“그래. 선제후급으로 크고 강대한 것도 아니고 어디에나 널린 귀족 영지 수준으로 약한 것도 아니지. 바로 그게 문제다.”

리카르도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의 생각에 영지는 크고 강할수록 좋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적당히 강한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튀링겐 정도라면 그래도 충분히 강한 것 아닌가?

륜스이는 순식간에 만든 잡탕 볶음 비슷한 걸 은 식기에 덜어내며 무심하게 설명했다.

“앞으로 다가올 황위 계승 전쟁에서 튀링겐이 아예 중립을 표방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선제후급은 돼야지. 난세에는 가만히 있는 것조차 힘이 필요한 법이니까.”

휘몰아칠 대전쟁 속에서 가만히 있겠다는 건 그 자체로 거대한 모험이다.

최후의 승자에게 밉보일 가능성은 물론이고, 언제 상대에게 붙을지 모른다는 의심의 시선을 시종일관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 가만히 있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정면에서 뚫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전후에 재편될 질서에서 도저히 배제할 수 없는 존재로 남을 힘이.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튀링겐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아.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편들자니 지나치게 무게감이 강하다.”

“무게감이 강하다고요?”

“그래. 내가 쉽게 말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변경백이다. 선제후를 포함해도 제국 전역에서 단 여섯 있는 작위지. 그만한 힘도 있고.”

“어, 그게 문제가 되나요?”

강한 게 문제라는 말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갔다. 강하면 좋은 거 아닌가?

너무 복잡해진 생각에 어질어질해 보이는 리카르도를 귀엽게 바라보며 륜스이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힘이 강하다는 건 적당히 생색만 낼 수 없다는 거다. 대충 셋 정도로 추려진 황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아예 멸문한다는 거지.”

“그건 약한 귀족도 비슷하지 않나요?”

“아니지. 귀족의 씨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미한 가문은 적당히 가주가 책임지는 선에서 끝나겠지. 차후에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면.”

내전은 그 특성상 타국과의 전쟁보다 잔혹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도 거대한 전쟁에서 서로 죽고 죽인 사이에 쌓인 원한이 순식간에 사라질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그 거대한 권력 투쟁의 승자라고 안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상대측에 가담한 세력을 전부 씨를 말려놓을 수도 없다. 안 그래도 거대한 내전이 끝난 상황이다.

국가의 체력이 심하게 떨어져 있을 상황에서 가장 우수한 전투 집단을 전부 죽여버리고 나면 막막하도록 광활한 제국의 국경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땅은, 재산은 패자에게 몰수해 승자에게 주면 해결된다. 하지만 인재의 공백은 절대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법.

승자도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튀링겐은 어느 진영에 서더라도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패배하면 갈기갈기 찢겨서 먹잇감이 되겠지. 단순 가담자와 핵심 가담자는 다른 법이니까.”

“핵심이 아니라도요?”

“뒷짐 지고 구경만 해도 핵심이 되겠지. 관건은 네가 뭘 했느냐가 아니다. 네가 가진 게 얼마나 위협적이고 먹음직스러운가, 바로 그거란다.”

리카르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로소 륜스이가 먼 곳을 보며 종종 언급하던 난세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느껴졌다. 어떻게 해도 끔찍하게 당해야 한다니.

륜스이는 그런 제자를 보며 시대를 논했다.

아직 조금 이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조금 더 멀리 볼 때가 됐다고 느꼈으니까.

“태풍 부는 들판에 홀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나무가 있더냐? 난세란 그런 거지.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휘청대다가 쓰러질 튀링겐에 활로를 제시한 셈이란다.”

“아···”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문제라고 했지? 그러면 충분히 강해지면 될 게 아니냐. 알리아타 교역은 제국을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는 아니지만, 일개 변경백령을 선제후 수준으로 만들 힘은 있다.”

튀링겐과 험악해진 분위기는 위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륜스이가 직접 튀링겐에 찾아와야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제국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강력한 무인인 그보다 더 좋은 사절은 없었으니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어차피 우리도 내전이 끝나고 나면··· 제국의 계승 전쟁에 개입해야 할 게다.”

“예? 또요?”

황당하다는 듯 묻는 제자의 말에 륜스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봤다.

시대는 피를 바라며 휘몰아치건만, 먹을 부은 듯 단아하게 검은 하늘에서는 별이 아름답게 빛났다.

천지는 불인인가.

인간성이 없는 자연이 사람의 비극을 슬퍼하기 바라는 건 무리라지만, 그래도 때로는 아쉬워지곤 했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니까. 제자야, 내전이 끝나면 원한이 하늘에 닿을 듯 쌓이는 법이다. 그걸 어찌 해소해야 하겠느냐?”

“어···”

리카르도는 답을 생각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륜스이는 그런 제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순후하고 올곧은 성정을 증명하는 장면이었으니 나쁠 게 무에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한다. 스스로 비정해질 필요는 없으나, 비정한 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릇 영웅이라 하면 시기와 질시 속에서 스러지는 법이니, 그는 제자가 그리 비참한 미래를 맞이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영웅이 될 소질로 충만한 제자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는 담담하게, 약속된 미래를 읊었다. 신화 속 예언자처럼.

“밖으로 돌리는 게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지.”

“밖으로 돌리다뇨?”

“다른 국가를 친단 말이다. 자국민끼리 싸워서 생긴 원한을, 타국과 싸워 생기는 원한으로 덮는 거다. 내전으로 잃은 재산을, 타국에서 뺏어와 충당하는 거지. 이 얼마나 쉬운 방법이냐?”

장기적으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지만, 사람은 본래 현명하지 않다. 선하지도 않다.

더구나 제국은 가뜩이나 정복이라는 헛된 영광에 눈먼 이로 가득하니, 달리 바뀔 미래조차 없다.

“좋은 분위기에서 회담을 끝내고 굳이 하늘을 벤 건 그래서다. 우리가, 너희와 대등하게 설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일개인의 무위가 전쟁을 결정할 수는 없다.

륜스이의 단천검은 놀라운 검이지만, 하늘을 벨 수 있을지언정 사람은 천 명 베기도 어렵다.

하늘은 갈라진들 하늘이고 베어진들 하늘이라 저항하지 않지만, 사람은 살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로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가 베어 가르는 륜스이의 의지를 방해한다.

아무것도 아닌, 평생 농투성이로 살던 범인을 베는 것조차 그리 어려울 진데, 평생 자신을 갈고닦은 이들의 높은 뜻과 기술이 막아서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륜스이의 지고한 경지를 보이기에 단천검처럼 좋은 것도 없다.

전장엔 나서는 이는 하늘을 베는 검을 보며 승리를 확신하고, 적으로 맞서는 이는 움츠러들고 무너질 터.

이제 막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이들에게 륜스이는 경고와 동시에 손 내민 것이다.

알리아타의 강함을, 륜스이의 강함을 보여줌으로써.

“돌아가면··· 피바람이 불겠구나.”

적이 될 수 있던 이를 아군으로 만들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결전뿐.

륜스이는 서글픈 목소리로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읊조렸다.

“바람이 있다면, 그저 전사의 피가 다 흐른 후에 시민의 피가 흐르면 좋겠구나.”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하하 호호 웃으며 손잡는 미래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허무맹랑한 걸 바라기에는, 륜스이가 지옥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이 난세가 누구의 피도 흐르지 않고 끝날 리 없다는 걸 확신할 정도로는.

리카르도는 슬퍼 보이는 륜스이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젠가,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정말로 누구도 다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공허한 바람이 모닥불 빛을 타고 은은하게 퍼지는 밤.

차마 너무도 먼 아름다운 평화를 말하지 못하는 노회한 스승의 소박한 꿈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상 바라보는 젊은 제자의 꿈이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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