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수도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으레 사제가 되길 꿈꾸는 법이다.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늘 그들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사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세계에서 사제가 가지는 특별함 때문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서 교육이란 가진 자의 전유물이다.
읽고 쓰는 법은 물론이고 무기를 다루는 기술, 몸을 키우는 기술, 무언가 만드는 기술까지 모두 폐쇄적으로 전수된다.
그런 세계에서 사제는 신분과 인종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 한 길이었다.
사제가 되는 데는 혈통도 필요 없다. 오래도록 자기들끼리 노하우를 공유하며 만든 카르텔에 들어가 있을 필요도 없다.
오직 믿음, 믿음과 성품만 있으면 된다.
더구나 사제의 지위는 귀족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딱히 귀족보다 낮다고 할 수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낮은 자에게도 숙이지만, 높은 자의 고개도 숙이게 할 수 있는 특별한 신분이라고 할까.
없는 자라면 누구나 선망할 직위였고, 가진 자라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일이 사제다. 하지만 엠마가 사제가 되려고 했던 건 그래서가 아니었다.
“다들 당황스러운 거 알아요. 당장 저부터도 당황스러운 데요.”
엠마는 그저 그녀를 돌봐주는 수녀님이 너무 좋았고, 사제님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세상에서 사제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나선 전장, 처음 겪는 대규모 전쟁에 이상하게 흘러가는 전황까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나무 방패를 끼고 몽둥이를 휘두른 건, 그렇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서였다.
사실 활동적이지도 않았고 운동 신경이 좋지도 않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 그녀에게는 생각보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참아낼 수 있던 건 그래서였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이 버려진 아기를 기꺼이 사랑으로 키워준, 어머니이자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물론 노력한다고 없던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니다.
다행히 어떻게 사제가 될 수는 있었지만, 간신히 합격선에 턱걸이 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게, 엠마라는 사람의 한계였다.
“누구도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
엠마의 말에 사제들의 얼굴로 불만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당연히 당황할 수 있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누구나 싫은 법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제다.
그들에게 당연한 일은 오직 신의 뜻에 따르는 것 하나뿐. 다른 모든 일은 절대로 당연하지 않다. 당연해서는 안 된다.
사제는 그렇기에 귀족과 당당하게 맞서 평민을 돌보라고 권고한다. 때로는 협박도 불사할 정도로.
사제는 그렇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를 거두고, 먹이고, 키운다.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이를 버려두는 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아니니까.
본래 그런 사람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했으니 좋은 반응이 나올 수 없다.
엠마는 그런 사제들의 감정을 느끼며 웃었다.
당장 그녀도 당연한 한계를 넘어, 당연하지 않은 영역에 닿은 사람이었으니까. 같은 어머니를 모시는 형제, 자매의 진취적인 모습이 흐뭇할 수밖에.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당연한 채로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방에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풋풋한 얼굴의 소녀 사제부터, 평생 사제로 살아온 늙은 주교까지. 모두 엠마의 말에 공감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내리신 이유가, 당면한 한계에 당연하게도 무릎 꿇으라는 건 아닐 겁니다. 아니, 틀림없이 아닙니다.”
엠마는 지금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 쓰는 일은 딱 다른 사제들 하는 만큼만 한다. 읽고 쓰는 데 지장이 없고 이런저런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정도. 무언가 대단한 지식을 담아 책을 쓰거나 할 수준은 절대로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다른 사제들보다 조금 못하다. 성전을 몸에 받고도 엠마의 전투 센스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덕분에 대성당의 사제들이 그녀를 가르치느라 꽤 고생했다. 자꾸만 무식하게 힘으로 때려 부수려고 해서.
하지만 그녀에게도 남들과 다른 게 있었다. 분명히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엄마고 아빠였던 수도원 사제들에게 배우고 익히며 갈고닦은 성품.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엘리안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싸우는 마음이었다.
“낯설고 거대한 전장, 강하고 많은 적이 우리가 주춤할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부족함조차, 우리가 주춤할 이유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막힌 상황,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모두를 살리려 했던 마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부족함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던 마음.
오직 어머니 엘리안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주저할 줄 모르는 그 마음이 성스러운 전쟁으로 화해 주변을 밝혔다.
한 세대에 한 명도 많다고 하는 성녀의 기적이 모두의 마음에 불을 피웠다.
“그러니 여러분, 망설이지 맙시다. 이 전장에서 사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만 생각합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제가 됐습니까? 무엇을 위해 엘리안님을 믿고, 무엇을 위해 삽니까?”
이 세계에서 신을 따름에 이유를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단 신을 따르기로 했다면 순명하는 것이 도리이나, 따르는 이유는 스스로 찾는 게 이 세계의 규칙이었다.
많은 신이,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존재 이유를 가지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이었다.
엘리안의 말은 이 자리에 모인 사제들에게 처음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작은 손으로 묵주를 만지던 그때와 성경을 펼치던 그때. 처음 당신의 말씀을 듣고 감동했던 그때와 비로소 사제가 되고자 결심했던 그때.
그 많은 처음 속에서 그들은 왜 사제라는 짐을 짊어지려고 했던가.
사제가 없는 이에게 유일한 출셋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인식에 불과하다.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더 험하고 괴로울지언정 용병이나 모험가가 되는 길도 있다. 물론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길은 있다.
더구나 사제가 귀족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현실의 사제는 귀족에게 아쉬운 소리를 달고 사는 게 보통이었다.
품에 안은 이가 많으니,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다.
신분의, 인종의 벽을 넘어 출세한다고 해도 어중간하다.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지만, 반대로 누구에게라도 무릎 꿇어야 할 수도 있다.
사제란 가장 높은 자지만, 동시에 가장 낮은 자니까.
그렇기에 뜻을 온전히 부귀영화에 둔 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 여기 모인 이들도 그렇다.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저는 믿습니다. 엘리안 님의 첫 번째 아들딸인 여러분이, 다른 엘리안 님의 아들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모든 걸 바치리라는 걸.”
병사들이라면 함성이 나왔을 때다.
하지만 엠마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사제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크게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성호를 긋거나, 묵주를 들어 기도했다.
목소리로 전달하지 않아도 그들의 뜻은 충분히 엠마의 마음으로 와닿았다.
그녀는 형제, 자매의 마음에 따듯하게 달아오른 심장의 온기로 다시 외쳤다.
“그러니 여러분, 아무리 어지러운 곳이라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게 어디라도, 우리는 사제의 일을 합시다.”
게오르크는 연인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처음 엠마와 만났을 때는 이런 인연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도 B급에서 도통 벗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신경이 한껏 예민할 때였는지라, 대뜸 실눈 여자라고 해버렸으니까.
물론 그게 잘한 짓은 아니었지만, 전날 밤에 실컷 마신 후유증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아침 먹는 남자에게 좀 무섭게 생겼다는 말은 싸우자는 뜻이다.
덕분에 둘은 신나게 투덕댔다.
그러다 보니 친해졌고, 친해지다 보니 같이 의뢰를 해결하게 됐고, 이제는 연인이 됐다.
“저는 또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관대하고 따듯한 우리의 어머니께서, 사람이 이토록 덧없이 죽어가는 모습에 슬퍼하시리라는 걸!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으리라는 걸! 그러니 여러분.”
게오르크는 늘 같이 다니다 보니 절로 깨닫게 됐다.
엠마에게는 언제나 의문이 있었다는 걸. 그녀가 엘리안을 정말 믿고 따르는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가슴 어딘가에는 늘 묻고 싶어 했다는 걸.
언제나 그녀는 알고 싶어 했다.
왜 그녀가 버려져야 했는지. 나아가 왜 세상에는 그리도 불행한 사람이 많은지.
아마 그 답은 앞으로도 찾을 수 없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깨달은 것 같았다.
엘리안이 내려준 아름다운 기적만큼이나 환한 엠마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망설이지도, 물러나지도 않으리라는 걸.
“갑시다. 가서 사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시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자녀들을 지키고, 치료합시다.”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엠마가 전장의 중앙을 가리켰다.
북 알리아타 연방의 중앙이 아니다. 남에서 올라온 알리아타군 진영과 북 알리아타 진영의 사이, 이 모든 대사건이 시작한 곳이었다.
“어? 거기가 아닌, 아닌데?”
“맞아.”
“엥? 진짜로?”
게오르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엠마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엠마는 바쁘게 말하던 와중에도 게오르크의 말을 용케 듣고는 작게 속삭였다.
기적을 통해 귓가에 전해지는 엠마의 목소리에 게오르크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지만, 엠마는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얼굴을 한 엠마에게 게오르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야 네가 가는 데라면 어디든 따라갈 거니까.”
원래는 아군의 중심, 북 알리아타 연방의 정중앙에서 가장 사제다운 방식으로 싸우라고 할 생각이었다.
사제는 모두 능숙한 전사이자, 기적으로 적을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주문 폭격자지만, 그런 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오직 사제만 할 수 있는 것, 사제가 누구보다도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옳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전열에서 날뛰는 사제는 물론 강하다. 전신에 기적을 두르고 무겁고 튼튼한 철퇴를 휘두르는 사제는 어지간한 기사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기사가 하면 된다.
원거리에서 쏟아내는 공격 기적은 어지간한 마법에 밀리지 않는다.
최고 수준의 기적은 지진을 일으키고 해일을 부른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도, 사제가 쏘는 공격 기적은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마법사가 하면 된다.
그러면 사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마워. 우리, 돌아가면 결.”
“떽!”
“어?”
“돌아가면 같은 말 금지. 결혼 같은 말도 금지. 전장에서 그런 말 하는 놈은 꼭 죽는다고.”
게오르크가 펄쩍 뛰면서 하는 말에 엠마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다가 풋 웃었다.
낯설고 괴로운 전장,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그래. 그러면 가자.”
“어? 진짜 가?”
“가야지. 내가 지금까지 뭐 하러 잘하지도 못하는 연설을 했겠어. 아까 내가 가는 데면 어디라도 따라온다고 했지? 믿을게?”
엠마는 게오르크에게 한 번 웃어주고는 거침없이 사제 무리의 가장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에 닿는 수많은 형제, 자매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가 힘차게 외쳤다.
“사제의 본분을 다합시다.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됩시다. 찾아오는 이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쉼터가 됩시다. 그리고.”
엘리안의 사랑이, 믿음이 빛이 되어 엠마의 온몸을 감쌌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둥글게, 공간을 밝힐 뿐이었던 기적이 이제는 능숙하게 형태를 이뤘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의 갑옷과 방패, 철퇴를 든 엠마가 두 진영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대체 어떻게 숨겨둔 건지, 그곳도 시체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이 전장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요새가 됩시다. 이 땅의 모든 이를 지키는.”
결국 엠마가 내린 결론은 사제라면 사제다운 일을 하자는 것이다.
사제의 가장 큰 본분은 사람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 이 거칠고 끔찍한 전장에서 그들만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누구보다도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당신께서 진정 바라는 바는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 엠마의 믿음을 증명하듯 성전이 충만하게, 아름답게 타올랐다.
“게오르크, 우리가 움직이면 카테리나 씨한테 좀 가줘.”
“뭐?”
“가서, 우리를 따라 서서히 뒤로 물러나 달라고 좀 전해줘. 그 정도만 말해도 알아들으실 거야.”
어디까지라도 따라가니, 마니 한 게 조금 전인데 곧바로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다니. 게오르크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그녀의 생각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연인은 이 전투에서 요새가 되길 자청했다.
사제가 있어야 할 곳은 마땅히 진영의 중앙. 사방으로 기적의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엠마가 누구도 없는 전장의 중앙으로 가겠다고 하는 건, 단순한 생각이 아니다. 이 전장에서, 진영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자 모두를 지키겠다는 의지.
엠마의 뜻이 그렇다면 게오르크로서는 따를 뿐이다.
“좋아, 그러면 우리는 중앙으로 갑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자라도 좋습니다. 다른 군주를 섬기는 자라도 좋습니다. 적은 죽은 자요, 아군은 산 자니! 우리는 산 자를 지킵니다!”
지휘부를 향해 달려가는 게오르크의 뒷모습을 애틋한 눈으로 잠시 바라본 엠마가 외쳤다.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을 담아, 위대한 어머니께서 내려주신 기적을 담아.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든든하게 받쳐주는 형제, 자매의 외침을 등에 업고 엠마가 질주했다. 방향은 전장의 중앙, 목적지는 산 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체의 바다.
성전의 거대한 힘이 엠마의 다리에 깃들자 순식간에 개미 떼처럼 모여있는 시체 무리에 도달했다. 동시에 그녀의 믿음이 거대한 철퇴가 되어 무리를 분쇄했다.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꺼져라!”
여전히 엠마는 무술에 능하다고 할 수 없다.
안코나 최강의 무인이자 최고의 교사인 륜스이에게 조언받고 교단의 선배들에게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았지만, 기술적으로는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그녀는 정교한 거리 조절이 뭔지 잘 감을 잡지 못한다.
1mm도 안 되는 짧은 간격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싸움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못한다. 그 정도 간격을 인지할 수 없으니까.
상대를 유인해서 끝내 허점을 만드는 심리전 같은 건 이해할 수도 없다.
엠마는 언제나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바른 사제지만 그건 사제로서의 이해였지, 무인으로서의 이해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온 대륙에 이름 떨치는 강자들에 비해 절대로 부족하지 않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시여, 오늘 당신의 품으로 가겠나이다!”
“부디 가여운 어린 양들에게 빛을 주소서!”
정교한 거리감? 있으면 좋다. 하지만 없어도 아무 상관 없다.
타고난 신력? 이 또한 있어도 좋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된다.
사제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신을 향한 믿음과 약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사람 서넛을 합친 것보다 거대한 철퇴가 되어 단번에 열도 넘는 시체를 분쇄하는 엠마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오직 믿음이 있다면 어떤 난관도 사제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사람의 부족함은 신이 채워준다. 하지만 부족한 마음은 그 어떤 강대한 신격조차 채워줄 수 없으니, 사제로서 엠마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세상을 떨쳐 울리는 강자가 되는 것으로.
“어머니께서 함께하신다! 성녀께서 함께하신다!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오직 지키는 것만 생각하라!”
당장 내일 눈 감을지도 모를 나이의 추기경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온 전장을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거대한 포효에 사제들이 엠마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 틈을 벌리며 질주한다.
암운으로 가득한 전장, 어둠을 가르고 공간을 넓히는 빛의 구름은 그들이 따르는 신이 누구인지 보여줬다.
“쿠아아아아!”
“시끄럽다, 짐승아!”
물론 시체 무리라고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모두 일어났다고 생각한 시체 무리의 중앙에서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포효와 함께 거구의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지난 습격에서 본 것과 종은 다르지만, 덩치는 비슷한 거대 괴수의 등장이었다.
물론 엠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천공신 엘리안이 그녀와 함께한다. 아무리 크고 강한 괴수라고 한들, 하늘만큼 클 것인가.
괴수가 보이자마자 크게 도약한 엠마가 손에 쥔 빛의 철퇴로 놈의 머리통을 찍었다.
“오, 오오! 신벌, 신벌이다!”
시체가 됐다지만, 여전히 강철보다 단단한 놈의 두개골이 한 번에 으스러진다. 썩은 눈알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오고 길쭉한 혓바닥이 입 밖으로 늘어진다.
일반적인 생물이라면 치명상이었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시체였기에 머리가 뭉개지고도 아가리를 벌려 엠마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하지만 놈의 뜻이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이 전장에 있는 모든 이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찬란한 빛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거대하고 강렬한 벼락은 어지간한 저택보다도 큰 놈의 몸뚱이를 모두 뒤덮으며 전광을 뿌렸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벼락이 마침내 끝났을 때, 모두의 눈을 가리던 빛이 사그라졌을 때, 놈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까맣게 변해 바람 따라 흩어져 날아가는 잿가루만이 그런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따르는 사제들의 함성 속에서, 엠마가 손을 높이 들었다.
“신께서 원하신다!”
그들의 신이 원한다.
죽은 자를 모두 재로 만들기를, 산 자가 다치고 죽지 않기를.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따듯한 어머니, 엘리안이 바란다.
신과 직접 소통하는 자, 성녀의 확신 가득한 외침에 사제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으스러져라 손에 쥔 무기를 쥐었다. 입이 마르도록 기도를 읊조렸다.
그리고, 외쳤다.
“신께서 원하신다!”
믿음으로 쌓아 올린 요새가 전장의 정중앙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