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화 (375/497)

비터스위트 피날레

륜스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섰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낯선 이에게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그는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싸워야 했다. 그때마다 손가락 한 마디, 걸음 하나에 삶이냐, 죽음이냐가 갈렸으니까.

본래 대등한 상대와 싸운다는 게 그렇다.

가늘기 그지없는 실 하나에 의지해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걷는 것과 비슷하다. 좌로 기울어도 죽음이요, 우로 기울어도 죽음이라.

척추를 타고 생존 본능이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고 심장이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자 미친 듯이 쿵쾅대며 온몸에 혈액을 공급한다.

한계까지 커진 동공이 다가오는 위험은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들고 귀가 쫑긋 서서 시야 밖의 위험을 대비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의식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선다. 어디가 삶이고, 어디가 죽음인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전투의 안개 속을 헤쳐 나가기 위해.

“반리합일인가··· 이걸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자신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

생사의 경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여주는 육신과 정신의 반응은 때로 무인을 중독시킨다.

어찌 아니 그럴까.

수년을 홀로 칼 휘두르는 것보다, 강적과 목숨을 걸고 한 번 겨루는 것에서 더 강렬한 고양감과 성취를 얻으니 실로 많은 이가 적을 찾아 헤맨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당장 륜스이도 한때는 일부러 죽을 자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죽기 위한 동기는 다른 곳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느껴지던 강해지고 있다는 감각을 떨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익숙한 느낌이 지금 륜스이의 온몸을 가득 채웠다. 존재할 수 없는 이치의 합일에 맞섬으로써.

“생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좋은 길이군.”

“그렇지?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 다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저 멀리서 들리던 비명과 포효가 녹아 없어지고, 사람의 일은 저희와 상관없다는 듯 유유히 바람 따라 흔들리던 들꽃이 아스라이 흐려진다.

푸른 하늘은 어느샌가 무엇도 없는 공간으로 변하고 제 군주의 시간을 벌기 위해 기꺼이 스러졌던 기사들의 무구도 공간 속으로 흩어졌다.

이치를 넘어,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한 자의 의식이 서로 이어져 만든 명정 상태 속에서 륜스이가 가만히 검을 들었다.

천천히 다가오며 무너지는 공간의 붕괴를 보면서.

“길은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고민한 적이 있지.”

“네가? 아니, 너라면 당연한 건가.”

샤일록은 륜스이의 말에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마법사보다도 오히려 무인 쪽이 더 죽음에 가깝다. 네크로맨시를 연구하는 자들은 조금 다르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죽음을 생각할 일은 많지 않다.

본래 마법사는 싸우는 자가 아니라 연구하는 자, 연구를 현실로 끌어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장 샤일록부터가 그런 성향이었다. 전투를 딱히 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전투라는 게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가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싸워서 탈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싸우는 대신 회유하거나 거래하는 편이 현명한 행동이다.

반면에 무인은 다르다.

“아무래도 난 사정이 조금 특별하니까.”

“하긴, 세상에 누가 있어 과거로 돌아오겠나. 하하! 이거 내가 비밀의 공유자가 된 셈이군?”

“엘리안은 이미 알고 있다만.”

“뭐야, 나 말고도 아는 놈이 있었다고? 김새는구먼. 그래서, 자네는 어땠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샤일록은 새로이 얻은 깨달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륜스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공간 그 자체가 침식하듯 무너져내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서로의 의식이 이어져 만들어진 이 공간에서, 시간이란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느려지기도 하고 인지조차 못 할 정도로 빨라지기도 하는 법.

얼마나 빨리 대응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대응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할 따름이니 급할 건 아무것도 없다.

“글쎄··· 난, 날 그다지 안 좋아했다네. 무인이냐, 마법사냐는 별로 상관없지. 내가 죽음 가까이서 걸었던 건, 그저 죽음을 바랐기 때문이야.”

그를 사랑하던 이는 모두 죽었다.

가혹한 세계가 내려친 운명의 망치를 끝내 피하지 못하고, 그렇게들 스러져 갔다. 그저 무력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륜스이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저주하고, 세계를 저주했다.

이 낯선 세계로 자신을 부른, 알 수 없는 이를 증오했다.

하지만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목이 터지라 소리쳐도, 분노하고 절규하고 포효해도 아무것도 없는 이가 할 수 있는 건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죽음으로 나아갔다.

삶을 바라면서도, 죽고 싶은 양가적 감정을 끌어안고 강함이란 환상을 쫓아 한 걸음씩 걸었다. 핏빛 수라도를.

“재밌군. 그 시절의 자네랑 만났다면··· 정말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는데.”

“무리다. 죽고 싶었던 거지, 삶과 죽음의 어딘가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싶었던 게 아니니까. 더구나 그때의 나는··· 퍽 낭만적이었지. 강적에게 베이는 걸 꿈꿀 정도로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천천히 가까워진 공간의 붕괴를 보며 륜스이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칼을 높이 들었다.

몇 번이고 보여줬던 별 부르는 검, 낙성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샤일록은 무인이 아니라 마법사지만, 륜스이가 취한 자세를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이전의 검과 지금 륜스이가 휘두르려는 검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뭐지? 뭔가 힘이 없어진 것 같은데.”

“그렇게 보이나?”

“아니, 무섭게 보이는군.”

빙긋 웃으며 나눈 대화에서 샤일록의 안목이 드러났다.

필살의 의지가 사라진 낙성에서, 샤일록은 더 무서운 것을 보았다. 범인이라면 눈치채기는커녕, 륜스이가 약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샤일록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알아챘다.

본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이, 시간을 되감아 과거로 돌아온 끝에 손에 쥔 것을.

“딱히 무섭지도 않으면서 말은.”

“하하! 어느 정도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것도 사실이야. 정말 무섭군.”

륜스이는 아이처럼 말갛게 웃는 샤일록을 보며 마주 웃었다.

삶도 죽음도 결국 내가 있기에 겪는 것.

륜스이는 자신을 찾지 못해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지구의 평범한 직장인이 자신인가, 이계의 검성이 자신인가.

평생 투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평화 속에서 살아온 현대인과, 굴러떨어진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해 검을 쥐고 휘둘러 온 검사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늑대와 양이 같은 동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륜스이는 언제나 서로를 물고 뜯고 싸웠다.

사람의 피를 뒤집어쓸 때면 옛 자아가 지독한 혐오감에 몸서리쳤다. 특히 무고한 이를 베었을 때, 그는 그저 사고라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날 때부터 투쟁의 장에서는 약한 것이 죄라고 배우지 못했기에.

반대로 따듯한 곳에서 사람의 정을 느끼며 정착했을 때면 낯선 세계에서 자라난 수라가 그를 괴롭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태어나, 죽음을 벗 삼아 큰 수라는 평화나 안정을 배우지 못했기에.

“평생 내가 미웠네. 세상도 미웠고 누군지 모를 신도 미웠지.”

“흠··· 역시 우린 통하는 게 많은 것 같은데.”

“옛날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 말은 이젠 밉지 않다는 건가?”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굳이 표현하자면··· 그리 밉지는 않다 정도인가.”

륜스이는 쓰게 웃었다.

너무도 많은 극단적인 경험이 사람을 바꿨다.

하지만 그 지옥 같은 나날이라고 하여 사람의 정이 없었겠는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통해 과거로 돌아온 륜스이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고자 했다면 다른 많은 길이 있었으리라.

모험가 같은 건 집어치우고 적당히 항구 노동자로 살 수도 있었다. 조금 더 꿈을 가져보자면 현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해서 학구적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고.

매 순간,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아디라와 아디나 자매로부터 이어진 인연이 그 사실을 륜스이에게 알려줬다.

“달리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네. 세상은 결국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겠나?”

“오, 멋진 말이야! 그리고 옳은 말이군!”

샤일록은 숫제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뜻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이 인지하는 세계는 결국 내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러니 살아있는 이라면, 그가 인지하는 세계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검과 마법의 세계에서 태어난 수라도, 지식과 과학의 세계에서 태어난 현대인도 결국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저 륜스이 자신일 뿐이니, 분리해서 생각하려던 것부터 틀렸다.

“대화가 즐거워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이리됐군.”

“아쉬워, 자네와 나눈 인연이 이리 끝나야 한다는 게.”

어느덧 지척에 도달한 공간 붕괴를 바라보며 륜스이가 빙긋 웃었다. 샤일록도 그 미소를 받아 부드럽게 웃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던 문제를 두고 고뇌하며 평생을 보낸 자 사이에 동질감이 흐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서로 뜻한 바가 다르니, 어깨를 두드리며 갈 길 찾아 떠날 수는 없다.

그렇게 됐다.

“더 기다릴 시간은 없는 것 같으니··· 받아보게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못 박힌 것처럼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검이 아주 조금이나마 움직인 순간.

절대로 양립할 수 없던 두 자아가 손잡던 순간.

륜스이는 가만히 제 안에서 피어오르는 온기를 느꼈다.

으레 초월적인 깨달음은 인연을 가볍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이 어찌 그리 쉽게 가벼워질 수 있을까.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던 건 오랜 벗의 따듯한 다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뭔지도 모를 힘의 작용이지만, 아버지이자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건 새로이 만난 아이들의 아름다운 생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에서 인연으로, 오랜 겨울을 넘어 봄빛으로 물든 끈이 한 사람의 삶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침내 오랜 미망에서 벗어난 노인이 그 온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던 검이 그 온기를 담아 아래로 내려오던 순간, 다가오던 모든 것이 갈라졌다. 무너지던 공간도, 멈춘 듯 느리게 흐르던 시간도.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의 합일이 부른 완전한 검이었다.

“이··· 건?”

샤일록은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시작은 보았으나 과정은 보지 못했다. 단순히 빠르거나, 느린 것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조금 전의 공간에서, 샤일록이 보지 못할 것은 없다.

분명히 그러했을 터다.

마치 중간이 잘려 나간 채 도입부에서 곧장 완결 난 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에 그가 다시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무서운 사실을.

“설마··· 공간만 가른 게 아닌 건가.”

“노리고 한 건 아니라서 좀 민망하긴 하군.”

“하!”

샤일록의 공간 붕괴에 대항하는 방법은 마주 공간을 깨든, 가르든 하는 것뿐이다. 그 외의 어떤 방법도 소용없다.

세계 제일의 방패나 갑옷으로 막아낸다?

얼마나 튼튼한지도 상관없다. 얼마나 뛰어난 주문이 걸렸는지도 상관없다. 공간 그 자체가 조각조각 뜯어져 나가 붕괴하는 데에는 어떤 신비나 기적, 권능도 막아줄 수 없다.

일단 맞아준 다음 부활하거나 재생하는 방식도 쓸 수 없다.

륜스이의 검에 베인 자가 베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샤일록의 공간 붕괴에 무너진 자가 온전했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결국 같은 수준의 공격이 필요하다. 그것 말고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

당연히 샤일록은 륜스이도 공간을 베어내서 막을 거로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시간, 시간에 닿았나···”

가슴을 길게 가로지르는 검상에서 끝이 느껴졌다.

샤일록은 생각해 둔 수십 가지 대비책을 모두 쓸모없게 만든 일검에 허탈하게 웃었다. 절대로, 누구도 닿을 수 없던 영역에 닿은 검이라니.

“딱히 알고 한 건 아니라네.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가서 닿은 게 아니라, 시간이 내게 와서 닿은 것에 가깝군.”

“그조차 놀랍고 대단한 일인 건 알고 있겠지? 딱히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조롱처럼 들리잖나.”

륜스이는 샤일록의 씁쓸한 목소리에 역시 쓰게 웃었다. 딱히 조롱할 생각은 없었지만, 역시 그렇게 들릴 소지가 다분한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정말로 우연의 산물에 불과한 것을 높이 말할 이유가 없었다.

두 세계의 삶이자 세 번째 삶의 인연이 이끈 곳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닿았으니까.

순리와 역리의 합치 속에서 의식이 어딘가로 향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시공조차 가르며 샤일록을 벴다.

물론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두 세계에서 세 번의 삶을 거치며 륜스이라는 사람이 쌓아 올린 것이 피안에 닿아 나타난 결과물이 조금 전의 일검.

시공조차 베어 가른 그 검에는 한 사람의 분노와 슬픔, 행복과 즐거움이 모두 닿아 필멸자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니.

“조롱은 아니었네. 부지불식간에 닿았다고 하나, 그 또한 내 검이지.”

“그래서, 이름이 뭔가? 이 샤일록을 죽인 최후의 기술 이름 정도는 듣고 가야지.”

본래 샤일록에게 시간은 영원에 가깝도록 주어졌으리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피해 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까.

능히 세계 최강을 논할 수 있는 그의 실력을 생각하면 영원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해의 거처에 틀어박혀서 갈등을 피했다면, 틀림없이 그랬으리라.

하지만 샤일록은 밖으로 나왔기에 맞이한 이 최후가 싫지 않았다. 기꺼웠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홀로 만족하며 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가 그런 것을 바라서 외도를 걸은 게 아니지 않은가.

세상 모든 이에게서 살아있기에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공포를 없애고자 마음먹고 외도까지 걸었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칩거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치열하게, 치밀하게 살다 가는 지금이 만족스러운 이유였다.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거짓 승리자로 사느니, 영광스러운 패배자로 찰나를 살다 죽겠다.

더구나 그에게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를 안긴 이는 실로 감탄할만한 적수였으니, 이 어찌 만족스러운 마지막이 아닐까.

륜스이는 마지막을 맞아 모든 걸 내려놓은 지금, 오히려 편안해 보이는 샤일록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다네.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어디 있었겠나. 그저 눈 감았다 뜨니 도달한 것을.”

“하하! 그런가? 좋군, 아주 좋아! 실로 지고한 경지에 어울리는 과정이로다. 그렇다면 자네,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뭔지 알 것 같군.”

긴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다가온 소멸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샤일록의 의복이었다.

평생 그와 함께한 아름다운 로브 자락이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는 것처럼 먼지로 화해 흩날리는 와중에 마법사 왕은 껄껄 웃었다.

원한다 하여 닿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 하여 닿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니, 륜스이는 문득 다가온 그 섬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자신도 신이니 인간이니 하는 범주를 넘어선 한 명의 초월자로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샤일록은 문득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허락해 줄 건가?”

“어려운 것도 없지. 마음대로 하게.”

륜스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샤일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없기에 눈 감았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눈구멍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일자로 가늘어지는 걸 보면 그 표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체 얼마나 오래 생각에 잠겼을까, 옷자락이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육신마저 반 정도 흩어졌을 때에서야 그는 눈떴다.

“사계, 어떤가?”

제대로 본 건 없다.

그에게 보인 건 과정을 건너뛰고 높이 들어 올렸던 칼이 아래로 내려와 있던 것뿐이니까. 행위를 두고 보면 그랬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물은 다르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지금, 샤일록은 륜스이의 일검에서 그가 살아온 삶을 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겨울을 맞아 발버둥 치다 평온한 봄을 맞았다. 느닷없이 끝난 봄에 이어 상상도 못 한 폭염으로 뜨거운 여름을 거쳐 고난을 보상받던 가을까지.

한 사람의 일생이 녹아 전해졌기에, 그는 기꺼이 납득했다.

이 마법사 왕의 시간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장절하고 아름다운 삶이었노라고. 멋진 사계였노라고.

“나는 보았지, 자네라는 사람이 살아온 궤적을. 아름답더군. 잘 버텼네. 잘 살았어.”

푸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샤일록은 이제 어떤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

륜스이는 가만히 자기와 비교해도 실로 오래도록 살아온 이의 말을 들었다.

“겨울 지나 봄이라. 지금 자네가 있는 곳을 생각하면 그맘때가 아닐까?”

“아마도.”

“어쩌면 언젠가 다시 여름이 오고, 가을도 올 테고 달갑지 않은 겨울도 오겠지만··· 자네는 잘 헤쳐 나가겠지.”

적으로 만났으나 벗으로 헤어지는 기분이었다.

륜스이는 샤일록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초월자였으니까. 기사로 거두어 함께 지내며 벗이 된 이와는 또 다른 느낌의 벗이다.

오랜 세월에 최후를 안겨준 벗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로 샤일록은 이름을 정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결국 자네의 것이 아니겠나? 누구보다도 강한 자네라면 지난 사계를 모두 잘 녹여내 다가올 사계를 넘겠지. 누구의 것이라도.”

“그래, 그런가··· 이름, 잘 받았네.”

그 짧은 순간에 놀라운 통찰력으로 륜스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 샤일록이었다.

륜스이는 이제 거의 다 사라진 샤일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초월자로서, 샤일록이 느끼는 기분을.

“고맙군. 나는 이제 가야겠어. 한세월, 잘 살다 갔으니 아쉬움도 없고 슬픔도 없다. 그렇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빙긋이 웃는 미소가 남았을 뿐.

마주 웃는 남은 이를 보며 그렇게 한 시대를 흔들었던 남자가 졌다.

모든 번민과 고뇌를 내려놓고 피안에 닿아.

극의 마지막을 알리는 운명의 커튼이 그렇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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