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과 방랑 사이에서
아스라이 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부르는 것 같은 소리는 미묘하게 거슬렸다.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크진 않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느낌으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버럭 화내면서 일어났다.
“아, 시끄러워!”
“어? 정신 차리셨네? 와! 아저씨가 일어났어!”
“엥? 누구냐, 너?”
“히에에엑! 아저씨가 기억을 잃었어!”
낯선 꼬마의 모습에 페르디난트가 묻자 난리가 났다.
꼬마는 위에서 방방 뛰고, 다른 꼬마 하나는 웃기지도 않는 민간요법 비슷한 걸 한답시고 손을 주물럭대고 다른 꼬마는 아예 뺨을 때리려고 들었다.
그 난리 통 속에서 불쾌한 기억에 사로잡혔던 페르디난트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엥? 아저씨가 화도 내!”
“얘야, 갑자기 올라타서 뺨 때리려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화내지 않을까? 그렇지, 벤?”
“오··· 그건 그런 듯? 그보다 기억나셨어요?”
“없던 기억도 생기겠다, 이 녀석.”
대충 나무를 짜서 만든 틀 안에다 풀을 마구 채워 만든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르디난트가 허리를 일으켰다.
우르르 달려들어서 찍어누르는 꼬마들 때문에 시도에 그쳤지만.
“안 돼요!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한대요!”
“나 환자 아닌데?”
“오··· 우리 동네 의사 아저씨 말이 맞았어!”
“그건 또 뭔 헛소리냐?”
“남이 끌고 온 환자 중에 자기가 환자 맞다고 인정하는 사람 없다고 했어요! 의사 아저씨가요!”
생각해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정말로 환자가 아니었다. 인정하자니 세계의 진리가 방해하고, 부정하자니 제 진실이 거부하는 상황.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서 고민하던 페르디난트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멍청한 생각인가 싶어서.
“어이쿠, 됐다. 이 녀석들, 난 정말 환자 아니니까, 몸 좀 일으키자.”
“진짜 안 아파요?”
“그래. 전혀, 하나도 안 아파. 완전히 건강하다고.”
“근데 왜 기절했어요?”
“기절? 내가 기절했어?”
“히에에에엑! 아저씨가 또 기억을 잃어버렸어!”
난리가 나서 좁은 방을 우당탕 뛰어다니는 아이들 등쌀에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 페르디난트였다.
다행히 소란은 순식간에 그쳤다. 갑자기 들려온 굵은 목소리로 인해.
“이 녀석들, 아픈 사람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다.”
“쿨랍담 아저씨! 아저씨가 죽였어!”
“안 죽였다. 애초에 난 인사밖에 안 했잖으냐.”
“으앙! 아저씨가 페르디난트 아저씨를 죽였어!”
대체 어떻게 되먹은 집인지 천장이 통째로 들렸다.
애초에 워낙 작은 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천장을 들어서 옮긴다는 발상은 대체 어느 미친놈이 했단 말인가.
덕분에 페르디난트는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없이 쿨랍담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 어···”
“놀랐다면 미안하군.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얼어붙은 페르디난트를 보며 쿨랍담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종종 륜스이 일행이 오면 치던 장난이었지만, 이 정도로 기절할 줄은 몰랐다.
사실 이건 쿨랍담이 파라디소를 세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너무 친숙해져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이제 파라디소에서는 아주 작은 아이들부터 나이 먹은 노인들까지, 누구도 오거를 봤다는 것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게 말하면 순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어리숙한 오거를 놀려먹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정도.
덕분에 쿨랍담이야 늘 하던 감각으로 장난쳤을 뿐이다.
하필 장난의 대상이 오거 때문에 트라우마까지 생긴 제국인이라 문제가 발생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아니, 그. 후, 후아.”
진솔한 사과에 페르디난트는 힘겹게 심호흡했다.
지금 천장을 들고 사과하는 오거가, 그의 불쾌하고 괴로운 옛 기억 속 오거와 다르다 건 분명히 알고 있다.
애초에 북방 동토에 사는 온몸이 털투성이인 오거와 외모부터 다르지 않은가.
더구나 눈앞의 오거는 사람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다. 그 괴물은 사람 말은 고사하고 제 놈들끼리도 의사소통이 되긴 하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고.
어딜 어떻게 봐도 다른 사람이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합리적으로 움직이지만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자꾸만 태업하려는 심장을 욕하면서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얼마나 그랬을까, 간신히 침착해진 페르디난트가 힘겹게 대답했다.
“후··· 괜찮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긴 했지만, 기절한 건 제 잘못이니까요.”
“음? 그건 아니다. 자네가 기절한 건 내 잘못이지.”
페르디난트의 대답에 쿨랍담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대답했다. 명확한 부정으로.
“네가 오거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한 걸 보면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니겠지. 어쩌면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
문득 그 겨울날, 끔찍했던 상실 이후로 어떻게든 잊으려 노력했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를 생각하면 오거 앞에서 제 자식을 들어 올리던 남자가 생각났다. 그 남자를 생각하면 시지에 대한 악감정이 절로 피어올랐고.
페르디난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기사와 병사들이 죽고 다치면서 지키려 했던 자가 자식을 바쳐 살아남으려 했다는 게 역겹고 화가 났다.
그런 감정을 품으면 합리적인 생각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걸 알기에 피했다. 잊으려 했다.
기절한 바람에 아주 오랜만에 그 시절의 꿈을 꾸고 말았다.
페르디난트는 깨달았다. 잊지 못했다. 전혀, 하나도 잊지 못했다.
그날의 상실은 여전히 그의 심장에 박힌 말뚝으로 남았다. 커다랗게 구멍 뚫린 심장은 지금도 뛸 때마다 피를 왈칵 내뿜고 있다.
그냥, 그랬다.
“맞나 보군. 후···”
복잡해진 얼굴을 보며 쿨랍담이 한숨 쉬었다.
이전과 다른 오거, 다른 사람, 다른 종족과 어울려 가는 오거를 만들어오면서 가장 어렵고 곤란할 때가 이런 순간이었다.
오거에게 친인을 잃은 자는 필연적으로 복수심을 품게 된다. 물론 인간에게 부모 형제를 잃었다고 세상 인간 모두에게 복수하려고 드는 자는 거의 없다.
그게 옳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오거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종족 전체를 증오하는 것도 바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게 아니지 않은가.
상실이 부른 맹목적인 분노나, 증오는 언제나 가장 넘기 힘든 벽이었다. 이성과 거리가 먼 감정이기에 설득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오거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지. 당사자도 아닌 내 사과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
“그건 아니지요. 아까 기절한 게 제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그 아이가 죽은 게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사과, 받는다고 기쁘지도 않고 기뻐서도 안 됩니다. 직접 밝히셨잖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쾌했다.
놀라게 해서 사과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다. 장난이라고는 해도 당하는 페르디난트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전후 사정도 모르는 채 일단 미안하다고 하는 건 사과가 아니다. 애초에 받을 필요도 없는 사과를 받는 것도 거북한 일이고.
“무엇보다 저는 오거를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배고파 사람을 습격하는 건,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달리 말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사람이라고 다른 건 아니잖습니까?”
어차피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 되면 누구나 비슷하다.
사람이라고 성인군자처럼 기꺼이 아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다.
보통은 손에 뭐라도 쥐고 누구라도 털러 나간다.
다 그런 법이다.
죽음에 맞서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살아남고자 하는 건 생물의 본능이니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생존에 금기는 없으니까.
“제가 미워하는 건···”
문득 제 앞을 막아선 남자의 등이 생각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아이를 두 손에 쥐고 들어 올린 이유를, 페르디난트는 아직도 모르겠다.
동시에 아비의 손에 들려 웃던 아이의 얼굴도 따라 생각난다.
불안과 공포로 시작한 관계는 인간적인 신뢰와 사랑을 거쳐 낯선 감정으로 끝났다. 아직도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너무 아파 잊으려 노력할 뿐.
“시지입니다. 아니, 하··· 아직은 미워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륜스이와의 약속을 떠올린 페르디난트가 무겁게 대답했다.
바로 얼마 전에 본 누구보다도 빛나던 아이와 그때 죽어야만 했던 아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운명에 맞서 싸우는 시지와 가축처럼 굴종하며 제 자식을 바치는 시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페르디난트는 괜히 어지러워지는 기분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사과는 받았습니다. 앙금 따위 없으니, 지금은 혼자 있게 해주십시오.”
세상에 다시 없을 난제를 받고 고뇌하는 것 같은 페르디난트를 쿨랍담은 가만히 바라봤다.
낯선 젊은이다.
륜스이에게 대강 사정은 들었지만,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친구였다. 모순적이라고 해야 할까.
권위적이면서 소탈하고, 냉철하고 이성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보고 있자니, 왜 륜스이가 이 친구에게 기대를 거는지 알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터무니없도록 무거운 핏줄 이상의 자질이, 이 젊은이에게 있었다.
아직은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래. 일단 가보겠네. 얘들아, 너희도 환자 그만 괴롭히고 나와라.”
“에? 아저씨랑 더 놀고 싶은데!”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법이다.”
“알았어요. 어휴, 아저씨. 힘내세요!”
“맞아! 밥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시고요! 기분 나쁠 땐, 맛있는 거 먹으면 좀 나아져요!”
시끌벅적하던 작은 방은 아이들이 나가자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소리가 잠든 공간에서 페르디난트의 힘 빠진 목소리만 홀로 남아 쓸쓸하게 부유했다.
“아저씨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라고···”
어지럽고 복잡한 기분이다.
스스로 중얼거린 것처럼 아픈 것도 아닌데, 아픈 사람처럼 휘청대는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쿨랍담이 미처 천장을 다시 올려놓지 않아서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복잡한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푸르기만 한 하늘이 괜히 매정하게 느껴졌다. 이 또한 미혹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페르디난트는 푸념 섞인 목소리로 다시 중얼거렸다.
“천장 좀 닫아두고 가지. 바람 들어오잖아.”
공허한 목소리와 함께 번뇌도 봄바람에 날려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었다.
젊은이의 고민과 함께 산맥에서의 낯선 오후가 무정하게 흘렀다.
***
몸이 아픈 건 아니었기에 한동안 천장 뚫린 집에 누워있던 페르디난트는 배가 고파오자 밖으로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걸음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굳이 나 힘들다고 동네방네 알릴 것도 아니고.
“오··· 신기하네.”
그렇게 나선 걸음, 여러모로 낯선 풍경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제국도 어지간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살지만, 주류는 인간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인간이 거의 6에서 7할 정도. 일정 주기로 집마다 방문해서 인구 조사하는 시대가 아니니 정확하진 않지만, 체감상 대충 그 정도였다.
반면에 이곳은 국왕부터가 오거라 그런지, 인간보다 이종족의 숫자가 많았다.
처음 보는 작고 털 많은 종족부터 제국 건국 초기에 거창하게 싸운 여파로 서쪽 국경 지대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놈이나 드워프까지.
실로 다양한 종족이 조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종족이라면 역시 오거였다.
“어? 어··· 이거.”
“어이구,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양반인가 보네! 지갑째로 아래에 내려놔 보소!”
“아, 알았다!”
인간 기준으로는 10인분 정도 될 것 같은 거대한 빵을 손에 쥔 오거가 손에 지갑을 들고 머뭇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손에 쥔 빵부터 놓고 지갑을 연다는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페르디난트는 이어서 벌어진 일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편견 가득한 자신을.
“자, 앞으로는 물건 살 일 있으면 미리 지갑부터 주면 되우. 그럼 우리가 알아서 물건값만큼 꺼내 가니까.”
“알았다! 고맙다!”
“에이, 나야말로 빵 사줘서 고맙지! 오거 양반들은 아주 많이 먹어서 참 좋아! 암, 좋고말고! 에잇, 기분이다! 옆에 빵도 하나 들고 가쇼.”
“하나 더? 나, 돈 없다!”
“없긴, 보니까 많더만. 그보다 서비스니까, 돈 안 내도 되우. 가져가서 기분 좋게 먹고, 다음에도 여기서 사가면 된다우!”
뻔한 상술이었지만, 오거는 감동했는지 눈이 글썽거린다.
구경하는 페르디난트로서도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신체 크기가 심할 정도로 다른 종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제는 역시 물건의 크기가 아닐까.
집 같은 주거 시설이야 어차피 사는 사람만 편하면 괜찮지만, 공유할 수밖에 없는 물건은 어느 쪽에 맞춰야 하는지 곤란하다.
반드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는 화폐는 그런 물건의 대표였다.
여기서는 평범한 사람에게 맞춘 것 같았다.
사실 이곳에서 자기들끼리만 살 것도 아니고 주변의 다른 세력과 교류하자면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다.
오거 사이즈 동전을 대체 누가 쓸 수 있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지도 못할 테고, 들 수 있어도 주머니에 넣는 대신 등에 이고 다녀야 할 물건 따위, 누구도 돈으로 쓰고 싶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화폐의 시장 가치에도 문제가 생긴다.
금속 본연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오거만 무지막지하게 큰돈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빵 하나 사는데, 밀 서너 포대 값 지불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작은 동전을 집어 건네기에 오거의 손가락이 너무 굵다는 점이다. 덕분에 머뭇대는 오거가 내민 지갑에서 빵 팔던 아주머니가 알아서 빵값을 가져간 게 조금 전 페르디난트가 본 광경이었다.
“알았다! 앞으로 여기서만 산다!”
“호호, 그럼 좋지! 그럼 가서 맛있게 잘 먹으슈! 친구들한테 얘기도 많이 해주고!”
“애기! 애기 많이 한다!”
“재밌네.”
오거 쪽은 누가 봐도 여러모로 부족하다.
말이 어리숙한 건 기본이고 생각도 좀 어린 것 같았다. 륜스이에게 들은 바로는 실제로 지능이 그리 높은 건 아니라고 하고.
익히 들었던 만큼 그리 놀라운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오거가 평화롭게 약탈 대신 거래하는 모습이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겠지만, 일단은 알고 있었으니까.
페르디난트의 흥미를 끈 건 빵 팔던 아주머니 쪽이었다.
제국이었다면, 아니 제국 아니라 다른 어느 장소라도 가게 주인에게 지갑을 통째로 맡기는 손님은 없다.
지갑에서 얼마나 빼갈 줄 알고 그리한단 말인가.
당장 제국에서는 제빵 업자에게 밀가루를 맡기고 받는 빵으로도 빼돌렸니, 아니니 하면서 시비가 벌어지곤 했다.
하물며 돈을 맡긴다? 칼부림이나 안 일어나면 다행이다.
“나 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오거. 오거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상인이라.”
어디 가서 말하면 미친 소리 하지 말란 말이나 들을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딱히 이곳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장 곳곳에서 여러 종족이 각자 특성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보여줬다.
그 모든 활동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신뢰.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기꺼이 상대에게 제 것을 맡기는 일이 자주 보였다.
위정자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다.
아무래도 좁고 작은 사회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다. 한 인간으로서는 그저 신기한 걸 넘어서서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고.
갑자기 허기를 느낀 건 그때였다.
무언가 달라는 것처럼 강렬한 공복감이 들었기에 페르디난트가 입맛을 쩍 다셨다.
“일어났다길래 가 봤더니, 그새 나왔군.”
“어? 왔나?”
마침 솔솔 풍기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륜스이가 서 있었다.
언제나 터무니없도록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페르디난트의 눈이 향한 곳이 달랐다.
아무래도 얼굴보다는 손에 들린 음식으로 눈이 가는 건 배고픈 사람의 본능인가.
륜스이도 녀석의 시선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아침 먹고 나서 아무것도 안 먹은 녀석이 어딜 그리 돌아다니나.”
“그러니까 뭐라도 사 먹으려고 한 거지.”
“일단 먹어라. 먹으면서 이야기라도 하지.”
페르디난트는 어쩐지 제안을 받아들이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륜스이의 손에 들린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였다. 기름에 튀긴 무언가는 역시 거절하기에는 너무 맛있는 음식이 아닌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 페르디난트를 보고 륜스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
“시장 바닥에 서서 먹을 생각이냐. 좋은 곳이 있으니, 따라와라.”
당장 배가 고팠던 페르디난트로서는 괜히 심통이 났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륜스이를 따라갔다.
그렇게 꽤 오래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 바깥의 어느 산이었다. 그것도 꽤 높은 봉우리.
“헥, 헥! 배고픈 사람을 어디까지 끌고 온 거야!”
“이왕 먹을 거면 더 맛있게 먹는 게 낫지 않나. 여기서 노을 보며 먹는 저녁도 별미니 잠자코 먹어라.”
“쳇, 내가 배고파서 참는다.”
륜스이에게서 뺏어가듯 낚아챈 접시를 들고 적당한 바위에 앉은 페르디난트가 툴툴대면서도 포크로 튀김을 찍었다.
그러고는 곧장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돼지고긴가?”
“돼지고기지.”
“그래.”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에 음식을 쑤셔 넣던 페르디난트가 문득 노을을 바라보며 입 열었다.
“안 묻나?”
“어차피 가만히 기다리면 말해줄 텐데? 굳이 물을 이유가 없지.”
“하여튼, 댁이랑 대화하면 늘 지는 기분이라니까.”
괜히 투덜댄 페르디난트가 슬그머니 옛 기억을 풀어냈다.
추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괴롭고 아파서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그렇다고 잊고 싶지는 않은 미소를 떠올리면서.
륜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젊은이의 고뇌와 노인의 침묵이 교차하는 저녁은 노을이 예뻤다. 온 세상을 가득 메운 붉은 빛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왜 그랬을까. 그 남자는 왜··· 왜 그랬을까.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아직 어리군. 그리고 생각이 짧아. 독선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뭐?”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어느새 군청색으로 변하고, 빛나는 별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 무렵이었다.
참을 수 없는 말에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젊은이가 벌떡 일어섰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올려보는 노인의 시선을 받으며.
아름다운 밤, 불온한 공기가 봉우리로 흘렀다.
한 인간의 파멸인가, 부활인가.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