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8화 (410/497)

눈사태

말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굳이 말에 탈 필요가 없다.

물론 륜스이도 장거리를 이동할 때면 피로를 생각해서 말에 타곤 하지만, 1km 조금 넘는 거리를 달릴 때는 두 다리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빠르다.

앞에 적이 있고 싸워서 돌파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평생 온갖 환경에서 온갖 무기를 쥐고 싸운 륜스이였기에 기승 전투도 수준급으로 잘하긴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강해질 때는 두 발을 대지에 붙였을 때다.

페가수스나 유니콘처럼 존재 자체가 신비인 생명체가 아니라면 그의 거력을 말이 감당할 수 없으니까. 매번 공격할 때마다 말이 힘에 휘둘려 휘청일 테니까.

말 위에서는 힘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 애꿎은 말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그렇기에 륜스이는 하마 했을 때가 더 강하다. 그 사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일검이었다.

멍하니 적이라는 말을 외치던 오크의 목을 벤 검은.

“위험할 수 있으니 밖으로 고개 내밀면 안 된다. 알았지?”

“사부님, 출발하기 전에 열 번은 말씀하셨어요!”

“이게! 사부님한테 버릇없게 그럴 거야?”

“힉, 미안! 에이, 나도 빨리 크고 싶다! 같이 싸우게!”

성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많이 말하긴 했다.

륜스이가 휘두르는 검을 막을 자가 있을 리 없고, 있다고 한들 그를 뚫고 마차를 상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머리 좀 내민다고 다칠 일도 없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는 없다.

그가 겪은 수많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강자가 어처구니없는 운명의 실수로 유명을 달리했던가.

누군가는 휘몰아치는 창검의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고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깨져 죽었다.

다른 누군가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막아내고도 뒤에서 잘못 날아든 아군의 화살에 뒤통수가 뚫려 죽었다.

륜스이쯤 되는 노련한 강자라면,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그리 어이없게 죽을 일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또 다르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차로 공격이 가는 일은 없게 할 테지만,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그런 이치를 구구절절이 풀어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혹시라도 다치는 아이가 나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제 스승만 믿고 위험한 시대에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이니만큼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따듯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건만, 아직 어린 녀석들에게는 너무 지루했나 보다.

잡아먹을 것처럼 벤을 노려보는 아디라만 빼면 다들 질린 기색이었다.

“너는 크고 나면 내가 쓸 검을 만들어야지.”

“히히, 그렇죠? 제가 사부님 검은 백 개, 천 개 만들어 드릴게요!”

“다 쓰지도 못하겠다, 녀석아.”

륜스이는 마차 안에서 들리는 벤의 너스레에 픽 웃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첩첩이 펼쳐진 괴물의 진형이 뒤늦게나마 습격을 인지하고 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무리 정예 부대라도 움직이는 속도는 한계가 있다.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판단으로 움직이니 어찌 빠를 수 있겠는가.

군대의 강함이란 그 수많은 사람에서 나오는 법이고, 쉬이 변하지 못하는 바위처럼 단단한 경직성이 만드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조건 좋은 것은 없으니, 이런 급습에는 그 숫자가 오히려 약점이 된다.

륜스이는 저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위험한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일단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대군은 아무리 그라고 해도 쉬이 상대할 수 없으니까.

“제대로 진형을 갖추기 전에 돌파하지.”

“예!”

“페르디난트, 너도 들어가 있는 게 어떠냐?”

“좋은 밥 먹고 왜 헛소리야? 안 들어가. 내가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잘난 사람 따라갈 능력 정도는 있거든?”

가난하니 뭐니 해도 아우스터리츠는 거대한 백작령이다.

그런 백작령의 후계자를 위해 만들어진 마차는 제작자의 온갖 고심이 들어간 명품이었다.

나무 외벽 안쪽으로 얇은 철판을 바르고 다시 안으로 나무 외벽을 붙인 삼중 구조.

효율 문제가 있어 마차 전체에 마법을 걸 수는 없더라도 바퀴와 축대에 마법을 걸어 높인 신뢰성. 말이 흔한 북방에서도 고르고 골라 뽑은 명마까지.

밖에서 직접 말달리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안정성과 안전함을 이 마차가 제공한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네가 누구도 다치거나 죽지 않게 지켜준다고 했잖아?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강한 사람이 하는 말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겠냐. 그리고.”

페르디난트도 통치자의 길을 걷는 만큼 무의미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거칠지만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무한히 충성하는 제국인, 그중에서도 북방 남자들을 잡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마차 안에 들어가 벌벌 떠는 것 따위, 선택할 리 없는 길이다.

안에 있는 애들 반응을 보니 떨기보다는 어디 소풍에라도 나온 것처럼 즐거워 보이는 게 우습긴 하지만.

“저 안은 좁아. 애들 사이에 끼여서 가긴 싫다고!”

“아저씨가 뚱뚱한 거거든요!”

“뚱뚱하다니! 나처럼 늘씬한 미남자가 어딨어?”

“사부님이요!”

“어··· 그래, 네 사부님. 륜스이가 좀 늘씬하긴 하지. 잘··· 잘 생기기도 했고.”

혈전을 앞두고도 웃음기 가득한 부드러운 공기가 일행 사이로 흘렀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쁜 일을 앞두고 짓는 웃음은 언제나 든든한 친구가 되어 힘을 보탰으니까.

륜스이는 정겨운 목소리를 들으며 기사들에게 당부했다.

“절대로 진형을 무너트리지 말게. 돌발 변수가 있어도 대처는 내가 하겠네. 자네들은 오직 앞으로, 성으로 달려가게나.”

“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디라, 너도 마찬가지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말거라.”

“네!”

“내가 위험해 보여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말이다.”

륜스이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디라의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륜스이는 결국 웃어버렸다. 조금 더 엄하게 말하려고 했건만, 역시 귀여운 제자만 보면 마음이 너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부쩍 커버린 꼬마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육구와 손가락 틈으로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즐기며 따듯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편이 륜스이와 제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나를 믿거라.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누구도 날 해칠 수 없다. 내가, 검성이다. 그렇지?”

“네! 사부님은 최강이에요!”

“최강까지는 모르겠지만, 날 죽일 사람이 없긴 하지.”

“사부님 뜻대로 할게요.”

“오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는 제자에게 웃어준 륜스이는 칼을 다시 고쳐 쥐었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질풍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와 함께.

“그럼, 다들 잘 따라오너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나간 륜스이에게 단단하게 구축한 적진이 보였다.

가장 먼저 목숨을 끊은 눈 오크는 촉수처럼 밖으로 뻗어둔 적의 경계망에서도 일부다. 그곳을 격파하는 건 여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데아렛 앙그렙!”

“앙그렙!”

“시끄럽다.”

륜스이는 수만에 달하는 동족들에게 모두 들리길 바라는 것처럼 소리치는 경계병을 베어냈다.

두부라도 베는 것처럼 어떤 저항감도 없이 거대한 태도가 공간을 가르는 순간, 질긴 털가죽과 강인한 근육, 단단한 뼈가 동시에 끊어졌다.

단 일검에 속절없이 비스듬히 아래로 흘러내린 상체 아래로 하체만 외로이 남아 피를 뿜어낸다. 실로 잔혹한 광경이었지만 륜스이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작정하고 피를 보기로 한 밤, 이 정도는 그저 시작을 여는 효시에 불과하다.

“허··· 이래서 건물이 통째로 잘린 건가.”

“혼자서 천을 베는 게, 정말로 되는 일이군요.”

페르디난트와 핀은 륜스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냈다.

지금 륜스이는 수많은 적을 뚫어내면서도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 아니 막히는 게 다 무언가, 아예 아무것도 없는 곳을 편하게 달리는 것 같았다.

쉴새 없이 공간을 가르는 태도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편안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멈추지 않는 걸음을 보면, 산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물론 정말로 륜스이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눈 오크들은 마르지 않는 투쟁심 하나로 혹한 그 이상의 혹한 속을 뚫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활화산 같은 그들의 투지는 그저 강한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 정도로 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끝없이 길을 막았다.

무기를 단단히 쥐고, 거칠게 전투 함성을 토해내면서. 슬그머니 찾아와 발목을 잡아당기는 두려움을, 등을 밀어주는 전우애와 투쟁심으로 쳐내면서.

하지만 덧없다.

“솔직히 내가 이런 생각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불쌍할 지경인데.”

“혹시라도 성에 들어가서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난리 납니다.”

“알아, 핀 경이니까 하는 말이야. 아무렴 내가 괴물 놈들에게 다치고 죽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런 실언이나 할까. 그리고 솔직히 그 친구들은 지금 이 광경을 안 봤으니까 화내는 거고.”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륜스이의 전투에는 무인이라면 참을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대체 얼마나 멀리 보고 있는 걸까.

질주하는 말보다도 앞에서 달리면서 휘두르는 검에서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중심이 흔들리지도 않았고, 나아가는 길은 올곧기만 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아름다운 합이었다.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이 스스로 칼날에 몸을 던지는 모습은 경이였다.

무의 극한에 다다르면 모두 이렇게 되는 걸까?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신을 영접한 신도가 된 것 같아서.

“빨리 속도나 내세요! 지금까지 많이 봤잖아요!”

“아니, 봐도 봐도 신기하다니까?”

“앞으로도 많이 볼 거니까, 달리기나 하시라고요!”

아디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을 때렸다.

륜스이에 대한 경외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 아디라다. 하지만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가운데에서까지 그런 감상에 빠지진 않는다.

사실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아예 처음 본다면 모를까, 륜스이가 누구보다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왜 저리 호들갑인지.

“에잉, 내가 한참 어린 꼬마한테 타박이나 당하고! 그래도 내가, 어? 이 동네 대장인데!”

“아직은 아니지요.”

“핀 경까지 그러기야? 와··· 주군보다 새 친구라 이거지?”

“그저 옳은 말을 할 뿐입니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할 여유가 있을 정도로, 륜스이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할 일은 놀랍도록 없었다.

앞에서 길을 뚫는 륜스이가 너무도 완벽하게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끊어냈으니까.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평소 보여주는 무위만으로도 무인지경처럼 대군을 가르고 달려나갈 수 있을진대, 오늘 륜스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근데 저건 어떻게 하는 거래?”

“뭐요?”

“아니, 칼에 닿지도 않았는데 죄다 토막 나는 거.”

“검기요? 저도 잘 몰라요. 전 그쪽으로는 둔해서요.”

사실 지금 륜스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아디라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녀가 알기로 검기는 칼날의 예기를 극대화하는 기술이다.

기에 둔한 아디라는 아직 구사하지 못했지만, 이사벨라가 몇 번인가 보여줘서 알고 있었다. 륜스이도 시범으로 보여준 적이 꽤 있었고.

하지만 이미 본 적이 있기에, 더 경이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 법이다.

그녀가 아는 검기는 저런 기술이 아니었다. 강철을 끊어낼 수 있을지언정, 칼날이 닿지 않는 공간을 가르지는 못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를 적게는 예닐곱 마리에서 많게는 열 마리가 넘게 토막 내는 모습은 알기에 더 경이로웠다.

영원히 닿지 못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들 긴장하거라. 아무리 내가 길을 뚫는다 해도 여긴 전장이다!”

“네! 죄송합니다!”

“끙, 알았어! 핀 경, 긴장하자!”

“전 원래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일행에게 주의 준 륜스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만든 진영은 거대한 벽과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는 놈들이 잠이 덜 깬 틈을 타 너무도 쉽게 돌파했다. 진영의 중앙에 해당하는 이곳까지는, 어려움 따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리 없다.

야음을 틈탄 기습이라고 한들, 이리 쉽게 뚫릴 놈들이라면 그 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허덕댈 리가 있겠는가.

시대에 따라 그 강함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적어도 지금 그들은 제국의 3대 세력이다.

휘하에 거느린 귀족까지 합치면 이 거대한 제국이 가진 힘의 3분의 1이 그곳에 있다.

이 괴물들은 그 강대하고 거대한 세력을 궁지에 몬 놈들이다. 절대로, 이렇게 맥없이 뚫릴 리 없다.

그리 생각하고 대지를 박차는 두 다리에 힘을 더 줬을 때였다.

예상이라기보다는 예언이라고 말해야 할 륜스이의 직감을 증명하듯 신비를 보는 눈에 이상 현상이 비쳤다.

시간을 되감아 해 질 녘이 된 것처럼 온 하늘이 신비로 붉게 물드는 모습에 륜스이가 사자처럼 포효했다.

“조금 흔들릴 게다!”

“예?”

마차 안에서 흘러나온 의문 가득한 질문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태양이라도 된 것처럼 어둠을 살라 먹으며 빛나는 불꽃에 대항해야 했으니까.

륜스이의 푸른 눈동자 위로 온갖 아름다운 빛깔의 신비가 휘몰아쳤다.

어떤 한 사람의 신비로 만들어진 주술이나 마법이라면 이러지 않았으리라. 술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그들 하나하나의 개성이 다양한 색깔이 되어 신비를 비추는 눈 위로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붉은빛이었지만, 뜯어보면 너무도 다채롭고 많은 신비는 막기 어려워 보였다.

수없이 많은 술자의 의지가 모였기에 갖출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크기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구조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천벌 같았다.

하지만 륜스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천벌 따위는 없다는 걸. 신의 심기를 거슬려 받는 신벌은 있을 수 있으나, 그가 아는 의미의 천벌 같은 건 없다.

절대적인 선이 없거늘, 누가 있어 천벌을 내리겠는가.

절대자는 있으나 선하지 않고, 선한 이는 절대자가 아니다.

“무고한 자의 영혼을 쥐어짜 만들어낸 불이로구나. 역겨우니, 꺼져라!”

휘몰아치는 수많은 의지와 신비가 감싸고 있는 핵심이 보였다.

아무리 몸집을 부풀리고 장식을 덧댄다고 한들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막을 수 있다. 벨 수도 있다.

륜스이는 하늘 높이 검을 들었다.

달리면서 취한 자세로도 삼엄한 기세가 일어났다. 그가 걷는 한 걸음 한걸음에 역사가 바뀐다. 누구라도 이 모습을 본다면, 절로 머리에 떠오를 생각이었다.

“해를 부르고 싶었다면, 스스로 불탔어야지. 어찌 무고한 자를 태운단 말이냐.”

형형색색의 신비 너머로, 포로로 잡힌 이들의 고통과 절규가 보인다.

부정적인 감정은 힘이 된다. 때로는 사랑이나 평화 따위의 긍정적인 감정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신비가 된다.

그렇기에 그 힘을 쥐어짜 쓰는 이들은 늘 있었다. 그리고 륜스이는 그런 자들을 보면 늘 베었다. 도의가 아니었으니까.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평생 의롭게 살지는 못했으나, 의를 외면한 적 없고 협사로 살지는 못했으나, 악을 방관한 적도 없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휘청이며 걸어온 삶이었지만 중심만은 지켰기에 그는 가장 높은 곳에 닿을 수 있었다.

그 드높은 기상을 담아, 내려친 칼을 따라 별이 떨어졌다.

가짜 태양을 깨부수며.

“너희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눈과 얼음만 끝없이 이어진 곳으로.”

풍요로움을 바라는 것은 산 자의 본능이나, 그를 위해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하고 고통을 쥐어짜는 건 도리가 아니다.

무도한 이들의 염원이 만든 때아닌 태양이 하늘과 함께 베어 갈라졌다.

영원한 온기로의 바람이 형형색색의 불꽃으로 깨져서 쏟아졌다. 비처럼 내리는 아름다운 빛 속에서 륜스이는 달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켜야 할 이들이 있는 곳으로.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

하인리히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 녀석이 영지를 떠나고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어제부터 하루 사이에 휘몰아친 온갖 참사를 듣고도 평소와 같을 수는 없다.

요새 함락 소식부터 눈 오크 군단의 진격, 아우스터리츠 성을 두고 벌어진 수성전까지. 불과 몇십 시간 만에 그는 부쩍 늙어있었다.

“이를 어이할꼬··· 어이할꼬···”

제국의 귀족, 그중에서도 영지를 이어받을 장남으로 산다는 건 강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약자라면 영지를 받을 수 없고, 받는다 한들 지킬 수 없다. 그러니 그는 평생 강하게 살아왔다.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닥친 재앙은 그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영지 사람들을 모두 모아도 부족할 숫자의 군대, 그것도 괴물의 군대가 나타나 습격한 상황을 누가 있어 감당한단 말인가.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방법을 찾았지만, 생각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친 생존자들이 제때 다른 영지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것 말고는. 그나마도 막연한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습격 사실을 깨닫고 자유민을 모아 군대를 만들고 이곳까지 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누구보다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한 영지의 통치자인 만큼 전쟁을 일조일석에 시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결국, 구원이 온다고 한들, 그때쯤이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놈들의 밥이 되어 뱃속에 들어갔으리라.

“아버지, 괜찮으세요?”

“음? 아델라이드냐?”

“침소에 드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오셨다고 해서 와봤어요.”

“내가 침소에 들 수 있겠느냐. 당장 내일 성이 떨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딸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아버지로 남고 싶었지만, 이런 순간까지 거짓말할 생각은 없다. 눈이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영지가 멸망을 앞두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러니 속여 무엇하겠는가. 그래 봤자 조금 더 비참해질 뿐이다.

“그래도 조금은 쉬셔야죠. 기운을 차리셔야 내일 무너질 걸 모레 무너지는 거로 바꾸실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구원이 올 수도 있고요.”

“구원은 무슨. 쯧, 그래도 네 말대로 힘은 내야지! 암, 이 땅의 수장인 내가 힘을 내야 병사들도 힘을 내지.”

적지 않게 나이 먹은 딸이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아장아장 걸으며 아빠라고 부르던 시절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그런 딸의 응원을 받으니 없던 기운도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문득 곁에 없는 손자가 아쉬워졌다. 이럴 때 녀석이 있었으면 든든하기라도 했을 텐데.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다 싶어서 픽 웃고 말았다.

“음? 갑자기 왜 웃으세요?”

“아니, 페르디난트 녀석이 생각나서. 없어서 아쉽다가도 막상 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뭐냐. 사람이 참 간사한 것 같아서 말이다.”

제 말에 어색하게 웃는 딸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불가항력으로 벌어진 비극에 평생 마음 아파하다가도 손자놈이 잘 크는 모습에 위안받는 것 같았다. 놈이 진실을 알고 떠난 다음에는 하루하루 말라가는 모습이 괴롭기만 했고.

인생, 오십 년도 안 되는 것이 무에 이리 굴곡이 많은지 하늘도 무심하기만 하다. 괜히 가슴이 시리는 느낌에 페르디난트가 억지로라도 웃어보려 할 때였다.

“여, 영주님! 영주님!”

“뭐냐! 내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했거늘! 잠깐, 혹시 다시 괴물 놈들이 공격하는 거냐?”

“그건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외부에서 사,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 무슨 헛소리야? 이놈이 술을 처먹었나? 괴물이 바글대는 마당에 사람은 무슨 사람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 진짜 오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사람이라는 표현을 보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아니다.

그러면 소수라는 뜻인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수만에 달하는 눈 오크가 진을 친 곳으로 대체 누가 온단 말인가.

하지만 절박한 표정으로 믿어달라 주장하는 병사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속는 셈 치고 병사와 함께 달려나갔다. 드높이 솟은 성벽으로.

처음에는 거침없이 대군을 가르며 질주하는 검사가 보였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란 이다지도 위대한 것인가.

본능에 따라 눈 돌린 곳에서 그는 보고 말았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고통스러운 얼굴로 영지를 떠났던 손자의 모습을.

탕아의 위대한 귀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