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화 (417/497)

눈사태

4월은 눈보다는 비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3월조차 눈이 오면 날씨가 이상하다는 말을 듣곤 하건만, 4월에 오는 눈이 이상하지 않겠는가.

이 땅이 북부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러하리라.

한참이나 남쪽의 알리아타는 말할 것도 없고 중부라고 할 수 있는 제국 본토나 서쪽의 이종족 연합, 동쪽의 소왕국에서도 4월의 눈은 이상기후란 표현이 어울리지만.

겨울만 넉 달, 특별히 추운 해라면 다섯 달까지도 이어지는 북방에서 4월의 눈이란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물론 초대 따위 한 적 없는,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의외로 기술이 좋군?”

“듀 오싸!”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뜻이 통하는 것 같다.

핀은 짧은 격돌 이후에 흡족한 기색이 역력한 상대를 보며 웃고 말았다.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터무니없도록 크다고 해야 할 190cm의 대검과 2m는 될 것 같은 글레이브의 충돌은 승자 없이 끝났다.

사실 승자가 있기도 힘들었다.

양쪽 다 온 힘을 다해서 횡으로 크게 휘두른 게 전부였으니까. 힘을 싣는 기술의 차이가 없다면 큰일이 일어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물론 승자도 패자도 없는 충돌이었다지만 아주 미세하게나마 손해 본 자는 있었다. 핀은 그게 자신이라는 사실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이런 거군. 스승님이 휘두르는 검의 느낌은.”

“흐바아?”

격돌 이후 각자 한 걸음씩 물러난 상황, 핀은 대검을 허공에 몇 번 휘두르며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본래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상대는 키만 2.4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다. 핀도 190cm에 달하는 거구였지만, 역시 눈 오크 중에서도 건장한 상대에 비하면 자그마한 체구일 수밖에 없다.

신장이 그 정도 차이 나면 체중은 거의 1.5배에서 2배는 차이 난다.

이족 보행 생물은 위로 길어질수록 거기 맞춰서 전후좌우의 너비도 두꺼워지니까. 예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래로 실리는 체중을 버티기 위해서라도 두꺼워지는 게 정상이다.

기본적으로 체중을 지탱하는 기관이 네 개나 되기에 길이가 늘어나는 것에 부담이 적은 사족 보행 생물과는 다르다.

그런 상대와 동수를 이룬 것이다.

아주 조금 밀리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잊기로 한 핀이 활짝 웃었다. 석상을 깎아 만든 것 같은 그의 평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나는 기쁘다. 정말로 기쁘다.”

“시 데 야벳!”

많은 사람이 말렸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눈 오크와 비교하면 신체 조건에서 불리하다.

별의 영역에 든 절대적인 강자들이야 유불리를 논할 의미가 없겠지만, 그 아래에 있는 범인들은 어쩔 수 없다.

신장이 주는 거리와 체중, 근력의 이점은 전투에서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가장 중요한 요소 정도는 됐으니까.

물론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게 해주는 게 무기긴 하다.

맨몸으로 자신보다 훨씬 큰 상대와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한들 압도적인 기량 차이가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겨루는 건 작은 사람도 큰 사람을 이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자주라는 말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변도 아니고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이길 사람이 이겼을 뿐이다.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칼에 찔리고 베이면 죽으니까.

그래도 모두 말렸다. 승산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눈 오크와 인간은 일대일로 싸워 이기기 어려우니까. 상대는 그 눈 오크 중에서도 특별한 강자인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핀은 당당하게 동수를 이뤘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을 위해 피 흘릴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게 기쁘다. 당장 지금 살지 죽을지도 모르지만, 살아야 한다면 아우스터리츠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그 또한 아우스터리츠를 위해.”

짜증이 잔뜩 어리기 시작한 상대의 얼굴을 보며 핀이 픽 웃었다.

처음에는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짜증 내고 있었다. 그나마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보지 않는 건, 아마도 이 또한 놈들의 문화라서가 아닐까.

이제는 희미해진 전통이지만, 전전 결투가 생생하게 살아있던 시기에는 제국도 그랬다.

싸우기 전에 자기소개하는 상대를 방해하는 건 무례 중의 무례. 이기더라도 온갖 비난과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당당하게 결투하러 나온 걸 보니 상대도 그 비슷한 문화가 있다고 유추한 핀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라 듣기는 싫은데, 멈출 수도 없어서 잔뜩 심통 난 상대를 보며 웃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 살고 죽는 것만 한 축복이 무인에게 또 어딨을까. 무인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놈과 당당하게 겨룰 수 있으니 그 또한 기쁜 일이고.”

몇 달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천재라도 몇 달 만에 엄청난 강자가 될 수 없다. 물론 발전의 속도가 가장 빠를 초보 시절이니, 변화는 크겠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오래도록 무언가 해 온 사람에게도 몇 달은 변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오래 해왔다는 건, 그만큼 낙인처럼 해 온 방식이 몸에 박였다는 뜻. 그쯤 되면 몇 달로는 아주 작은 것 하나도 바꾸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몇 달은 긴 시간이다.

충분히 자신의 길에 정진해 온 인간, 경계를 넘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단 한 걸음만 앞둔 인간에게는.

핀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증명할 것이다.

“말이 너무 길었군. 그렇지?”

“야!”

본래 이렇게 길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거늘, 아이들과 어울리며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하는 핀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말하자, 상대도 목소리로 짐작했는지 기쁘게 대답했다.

“그러면 이제 죽자.”

“도어!”

전투의 열정과 흥분으로 가득한 포효를 들으며 핀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검을 처음 쥐는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취하는 자세.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자세. 하지만 그렇기에 오랫동안 파훼법이 연구된 자세이자 누구나 익숙하게 대처하는 자세.

상단이었다.

“나는 정식 제자는 아니지만··· 뭐, 제자라고 해도 된다고는 하셨지.”

칼끝은 하늘로 시선은 적으로.

평생 수도 없이 취한 자세지만, 느낌이 다르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속에서 뿜어져 나온 혈액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진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머리를 적시는 생사결의 흥분이 의지가 되어 움켜쥔 손으로 향한다.

분명히 수도 없이 행한 베기였지만, 한 번도 행한 적 없는 베기이기도 하다.

지금 핀이 준비하는 건 그런 검이었다.

“와라.”

“크아아아!”

삼엄한 기세에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시.

둘 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피가 너무 뜨거웠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뜻은 통한다는 듯, 포효하며 달려드는 상대를 핀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다.

분명히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고 있을 터인데, 느리게만 보였다. 천천히, 천천히 가까워지는 상대의 모습은.

태어나서 몇 번 경험한 적 없는 명정 상태.

정신과 육신이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했을 때, 죽음을 앞두고 삶을 갈구하는 본능이 인지를 초월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그 시간 속에서 핀은 스승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짧게 만났고, 달리 부르기에는 너무도 고맙고 위대한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나쁜 것이지.’

‘예? 나쁘다고 하셨습니까?’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 때문에 종종 무서운 사람으로까지 오해받는 핀이 아이처럼 높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말을 너무도 존경하는 사람에게 들었기에.

하지만 그는 핀을 놀리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그리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처음 검을 배울 때는 단 한 번의 베기에도 열과 성을 다한다. 자신이 바르게 하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지.’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던 것이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습관처럼 벤다.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습관··· 습관이 되는 건 좋은 것 아닐까요?’

‘아니지.’

신비한 푸른 눈동자로 마주 보며 한 말은 잊을 수 없었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휘영청 밝은 달 때문이 아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밤바람 때문도 아니고 딱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 때문도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심장이 찔리는 말이 너무도 아팠기 때문이다.

‘싸운다는 게 무엇인가. 승자는 살고 패자는 죽는다. 한 생명체로서, 싸움이라는 건 살면서 경험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충격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예. 그렇습니다.’

‘한데, 어찌 아침밥 숟가락 들듯 늘 하던 대로 하려는 게냐. 네 목숨이 그리도 무가치한 것이더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목숨은 누구나 소중하다. 핀의 목숨도 마찬가지, 정말로 소중하다.

기사로서 주군을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죽을 각오 정도는 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핀이 아침밥 숟가락 들듯 검을 휘두른다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의 시종일관 다른 바 없는 검술.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가장 완벽한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천 번을 베도 같은 검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른 법이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하면···’

‘천 번을 베도, 만 번을 베도 같은 검은 기계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당장 어제 잠을 덜 자고, 더 자고에 따라 달라지고 오늘 밥을 더 먹고 덜 먹고에 따라 달라지는 게 사람이다. 하루 살면 그 하루만큼 바뀌는 게 또 사람이다.’

머리 위로 비죽 솟은 귀는 언제나처럼 쫑긋댔지만, 그걸 보는 핀은 언제나처럼 귀엽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던진 말에 흠뻑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한때는 나도 그런 검을 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검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사람을 알고, 나를 알수록 생각이 변했다.’

‘어떻게,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참을 수 없어서 나온 질문이었다.

사막에 떨어져 며칠이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한 자가 오아시스를 찾듯 절실한 심정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다 안다는 듯, 부드러운 눈으로 던진 답은 그런 의미에서 달콤했다. 황홀했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가장 강해지는 길은 사람의 길이다. 비인외도를 걷는 자, 강해질 수 있을지 모르나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는 없다.’

‘아···’

‘언제나 같은 검, 습관에 매몰되어 마음도 없는 검을 휘두르지 말아라. 일검에 일생을 담아라.’

“예.”

어느샌가 잡아먹을 듯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적 같은 건 보이지도 않게 됐다.

5살에 처음 검을 잡고 수십 년, 작은 아이는 어느새 자식까지 둔 어른이 되었고 그만큼 많은 것을 잊었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의 설렘, 처음 목숨 걸고 싸웠을 때의 두려움과 처음으로 어깨에 칼이 놓이고 바르게 살겠노라 맹세하던 때의 다짐.

삶에 침식되어 하나둘 쓸려나간 것들, 쓸려나간 줄도 모르고 괜찮다고 살아온 것들을 스승의 조언으로 비로소 손으로 그러모은 지금.

눈앞의 적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 있었다.

“보르세 두 파!”

목숨을 건 전투에서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름 모를 눈 오크 장수가 목이 터지라 포효했다.

자신을 보라고, 네 적이 여기 있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핀의 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안주해 버린 지난날의 자신이었다. 게으름이었고 만족이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신을 겨누며 높이 들어 올린 칼로 한 알씩 삶이 모여들었다.

낭비해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서 손으로 그러모은다고 한들 흘러버리지만, 그 또한 핀이 걸어온 길.

삶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의지를 따라 칼날에 서린 순간, 벼락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칼날이 떨어졌다.

“죽어라!”

“크아아!”

날붙이가 부딪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만인의 시선 속에서 전장을 울렸다.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폭음에서 날카롭게 갈린 칼날과 칼날이 서로 긁어대며 나는 끔찍한 소음, 두 무인이 삶을 담아 내지른 기합까지.

교차하는 소리 속, 침묵하는 의식 속에서 핀은 죽였다.

당연한 습관에 매몰된 자신을, 관성적으로 어제처럼 행동하던 자신을.

동시에 핀은 살렸다.

처음 칼을 잡던 시절의 순수하던 자신을, 하루하루 조금씩 더 강해지고자 고민하고 변화하던 자신을.

떨어지는 칼날이 자신을 베어 가르고, 다시 자신을 살리는 순간.

인생을 담은 검이 신비에 닿았다.

“허··· 이걸 맞고도 살아있어? 너도 신비에 닿았구나.”

“그르르···”

핀의 삶을 담은 검은 강했다.

더 크고, 더 강한 눈 오크가 휘두른 더 큰 무기를 밀어냈으니까. 끝내 놈의 몸통을 사선으로 베어냈으니까.

범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뛰어넘어, 그의 검이 마침내 신비에 닿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과연 신비의 땅에서 온 눈 오크라고 해야 할까. 놈은 일반인이라면, 아니, 다른 눈 오크라도 즉사했을 상처를 입고도 죽지 않았다.

대신 붉게 물든 눈으로 으르렁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송이 따라 반사되는 햇빛에 유독 하얗게 빛난다. 쩍 벌어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간다.

눈 오크가 트롤처럼 선천적으로 재생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니, 틀림없이 신비였다.

“오냐, 끝까지 해보자.”

“크아아아!”

이성이 반 정도 날아가 버린 놈의 신비는 눈 오크의 염원이 어떤 건지 보여줬다.

살아남는 것. 척박하기 그지없는 동토, 약하면 죽고 뺏겨야 하는 그 땅에서 그들의 염원은 결국 생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한 신비였다.

칼에 맞아도 재생하고 며칠이고 눈 속에 파묻혀도 얼어 죽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면 붙이고 두려움은 광기로 몰아낸다.

그야말로 야성 그 자체, 자신을 끝없이 깎아내고 또 두드린 끝에 닿은 핀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닮았다.

최초의 자신을 찾아간다는 점에서는.

핀은 그 사실에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하늘을 향한, 검이라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삶이 무서운 기세를 뿜어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놈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듯.

“오너라.”

담담하게 던진 말은 틀림없이 놈에게 닿지 않았다.

들리긴 했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뜻이 통하면 그걸로 그만.

한결 더 커진 것 같은 몸으로, 막는 건 무엇이든 부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놈을 보며 핀이 웃었다.

그리고 검을 내리쳤다.

삶을 향한 갈망과 갈망으로 쌓은 삶이 부딪치는 순간, 역사의 천칭이 크게 흔들렸다.

***

“싸우고 싶으냐.”

“예···”

“그래도 아직은 안 된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무에 그리 아쉬운지 깊기만 한 한숨.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랑에라도 빠진 줄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디라가 얼굴을 붉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었다.

륜스이는 사랑스러운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하는 일이었지만, 제자는 늘 부족하다는 듯 그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더 해달라는 것처럼.

“언제고 너도 홀로 설 때가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 말려서도 안 되고.”

아디라가 무인으로 홀로 서는 날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시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붙잡을 생각은 없다. 영원히 품에 끌어안고 있는 건 그에게도, 아디라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제 길을 걸어야 하니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제 두 다리로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까.

아디라가 한 명의 어른으로서 서는 걸 막는 건, 도리가 아니다. 스승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너는 빼어난 아이니, 잘하겠지. 좋은 사람이니 바른길을 걸을 게다. 나는 믿는다, 언제고 네가 크게 자랄 사람이라는 걸.”

“사부님···”

“마음 약해지게 그리 보지는 말고. 녀석, 이런 말에 감동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구나.”

짐짓 엄한 목소리로 제자이자 딸을 다그친 륜스이는 잠깐 내려준 작은 가르침에 그를 스승처럼 따르는 젊은이를 바라봤다.

벌써 마흔 줄도 넘었으니 젊은이라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살아온 시간만 구십도 훌쩍 넘은 륜스이가 보기 젊은이였다.

확실히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르침을 청할 만큼은 잘했다.

본래도 기술적으로 크게 부족한 부분은 없었고 육신은 한창 절정을 달릴 시기. 지금이 핀이 무인으로서 가장 강한 시기다.

그런 핀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마음이었다.

어느샌가 관성처럼 부르짖게 된 충성과 입으로만 떠들게 된 향상심은 다른 여느 사람처럼 그를 붙잡는 족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족쇄를 끊고 나온 핀은 자신이 준비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다.

“어이쿠, 승부가 벌써 나는구나.”

“예?”

“다음 합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릴 게다. 보아하니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눈 오크 놈도 신비에는 닿았다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광전사처럼 달려드는 눈 오크의 글레이브가 폭풍처럼 주변을 찢어발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장에라도 핀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뒹굴 것처럼 위태로운 광경, 하지만 륜스이의 생각은 달랐다.

여전히 핀은 중심을 지키고 있다.

상단에서 시작하는 륜스이의 검은 본래 위태로워 보인다.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필살의 검이라지만, 몸통을 훤히 드러낸 자세가 위태롭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더 긴 무기와 상대할 때, 상단이 가지는 약점은 어떻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장병기를 상대할 때, 단병기의 전략은 피하거나 막는 게 우선이니까. 공격적인 자세는 정석이 아니니까.

위태로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륜스이의 눈에는 보였다.

수없이 몰아치는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선 바위섬처럼, 휘몰아치는 칼날에 위축되지 않고 필승의 찰나를 노리는 핀의 마음이.

아니나 다를까,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 슬슬 움직여야겠구나.”

“네? 움직이신다고요?”

“네 검술 친구를 구해야지. 저리 잘 싸워놓고 죽어서야 억울해서 눈이라도 감겠느냐. 무엇보다 제자가 죽는 꼴을 스승이 두고 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으냐.”

거의 사람 팔뚝만 한 글레이브의 칼날이 부러져 허공을 유영하고, 아래로 떨어진 대검의 칼날이 눈 오크의 손목과 함께 몸통을 베어낸 순간.

륜스이는 아디라에게 유쾌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첨탑을 박찼다.

“금방 돌아오마!”

첨탑에서 성문의 앞까지 엄청난 거리를 뛰어내린 륜스이의 칼날이 횡으로 공간을 가르는 순간, 폭풍이 휘몰아쳤다.

쏟아지는 화살 비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폭풍은 겨울을 닮았다.

물론 적이라고 조용히 있지는 않았다.

곧바로 답변이라도 하듯 도끼가 날아들었다. 공간을 가르며 날아오는 궤적 뒤로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뚫고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났다.

인사하듯 날아드는 봄빛 도끼와 겨울빛 칼날이 교차하는 순간, 전쟁의 나팔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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