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뜨거운 열기가 한바탕 휩쓸고 간 대전의 공기도 서늘해졌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증명하듯 하나둘 이성을 찾았으니까.
영혼 바쳐 불태울 위대한 이상을 보았다면 다음은 그를 이루기 위한 현실을 논하는 게 순리.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사람들이 시세를 논했다.
“페르디난트 폐, 아니. 아직 즉위하시지 않았으니, 이건 또 아닌 듯한데···”
“그냥 편하게 공이라고 부르시오.”
성급한 조슈아였다면 분위기에 휩쓸려 폐하라고 부르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벌써 제위에 미친 것처럼 보일 이유가 없다.
실제로도 그에게 제위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기도 했고. 제위면 어떻고 왕위면 어떤가. 어디, 시골 영주라도 상관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높은 뜻과 함께 나아갈 동료다.
호칭 때문에 버벅대는 필립을 보며 부드럽게 말한 이유였다.
“알겠습니다. 페르디난트 공, 공께서 자격이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사자혼께서도 증명하셨고, 조금 전 우리 모두 불타오른 연설로도 증명하셨지요. 여기서 더 따질 자는 없을 겁니다. 혹시 있나? 있으면 지금 나오게!”
대전사라도 된 것처럼 나오기만 하면 쪼아서 죽여버리겠다는 듯, 살기등등하게 외치는 필립. 그에게 돌아온 건 장난기 섞인 야유였다.
“우우! 오늘 처음 봤으면서 충신처럼 구는 간신은 물러가라!”
“맞다! 왜 우리가 따질 거로 생각하냐!”
“충심을 바치는데 만난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다들 불만은 없다니 다행일세.”
어느새 이야기를 주도하는 필립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각자 한 지역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영주들도 그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북방 특유의 문화 덕분이었다.
유능한 자를 기꺼이 인정하는 건 제국의 다른 지역이라고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유능함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 부족한 게 많은 특성상 이래저래 서로 엮일 일이 많았고, 루트비히의 중재로 싸우기보다 대화를 먼저 할 수 있던 상황 덕분이다.
영주들 사이에서 필립은 루트비히의 뒤를 잇는 중재자이자 해결사로 이름 높았다.
그 사실이 지금, 그가 대화를 주도하는 데 생길 수도 있던 반감을 지웠다.
“보시다시피 다들 불만은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우리가 인정했다고 적들도 인정할 리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을 만들겠지.”
“예. 조슈아는 코웃음이나 치고 말지도 모르지만, 아이메홉 대공은 다를 겁니다.”
파펜하임의 말에 필립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그들의 성향은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물론 파펜하임과 조피처럼 외부로 드러낸 성향과 진심이 다를 수도 있지만,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조슈아가 난폭하고 막시밀리안이 음험한 건 말만 호전적으로 하던 파펜하임 부부와 달리 행동으로 몇 번이나 증명됐으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조슈아가 된 것 같아서 조금 불편하지만··· 어차피 승패는 전쟁에서 갈릴 겁니다.”
“음? 자네는?”
“페나에서 온 에밀 페나라고 합니다.”
“아, 그 돌아온 탕아?”
“크흠, 탕아라니··· 딱히 탕아 소리 들을 정도로 인생을 막살지는 않았습니다.”
에밀이야 영지에 머무르던 시절에도 사고 같은 건 친 적 없다.
단지 녀석이 영지에 머물러달라던 어머니의 간곡한 청까지 거부하고 떠난 게 문제였다.
작은 영지라지만 나름대로 인망 있던 영지가 페나다.
그곳의 안주인이 멀리 간 아들 때문에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신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탕아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사정을 다 알면서도 나온 말이었기에 반 정도는 농담이었지만, 반 정도는 진담이기도 했다.
“아무튼, 전쟁에서 갈린다는 건 우리 모두 잘 안다네. 중요한 건 전쟁까지 가는 과정이 아니겠나?”
“그 과정, 생각보다 길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루트비히가 전사하고 조피도 의식불명이다.
란덴부르크는 당연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제국 전역에 우리는 얻어맞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호구라고 광고할 생각이 아닌 이상 그건 필연이다.
하지만 형국이 문제였다.
당장 북방이 조슈아 세력을 노리고 서부로 남하하면 동쪽의 아이메홉 대공은 어찌한단 말인가.
사양 한번 없이 고맙다고 뒤통수부터 후려칠 이웃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 숨을 고르면서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다. 어쩌면 황태자 암살 사건 이후로 쭉 이어졌던 냉전이 계속될지도 모르고.
에밀의 말은 그 냉랭한 예측을 단번에 부정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에게 륜스이가 에밀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이메홉에 미리 가 있던 친구들이 있소.”
“친구··· 라고 하셨소?”
파펜하임의 의제지만 륜스이는 공식적으로 제국 관직이 없다. 제국 영주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자니 무려 별의 영역에 든 자 둘과 싸워 물리친 초인 중의 초인이다.
작정하고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운 건 아니라지만, 별의 이름이 어디 저잣거리 약장수 이름인가. 하물며 륜스이와 충돌한 두 별은 각자 제국 최강과 이종족 연합 최강을 논하는 자.
어떤 핑곗거리를 가져와도 륜스이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덕분에 륜스이를 어찌 대우할지는 꽤 곤란한 문제였다.
정작 그는 그런 사소한 일은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친구고 공적으로는 안코나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위 계승 전쟁에 외력을 빌리는 걸 좋게 볼 사람은 없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랬다.
하지만 조슈아가 이미 이종족 연합을 끌어들였다.
이제 그들이 싫다고 외국의 도움을 거부할 수 없어졌다. 높은 뜻만 남기고 덧없이 무너져 역사책 속 한 줄 기록이 되기 싫다면.
새삼스럽게 그 차가운 현실을 느끼자 표정이 굳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륜스이는 다소 무거우면서도 반 정도는 포기로 흐르는 분위기에 작게 한숨 쉬었다. 그리고 선언했다.
“그 친구들의 정보를 쓰는 것과 별개로, 이제 다들 알았을 거요. 고고하게 북방의 힘만으로 이기겠다는 말이 통할 시기는 지났다는 걸.”
“조슈아··· 그 개잡놈 때문에!”
“딱히 조슈아만 욕할 건 없소. 조금 전 말한 그 친구들 정보대로라면 아이메홉 대공도 같은 족속이니까.”
“같은 족속이라니, 설마!”
필립이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친 것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륜스이는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동부 소왕국들을 윽박질러서 지원군을 불렀다고 하오. 벌써 여럿 아이메홉으로 들어왔다고 하더이다.”
“허··· 그래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인성과 별개로 그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겠소?”
폭압적인 성격과 별개로 휘하를 제대로 장악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조슈아와 막시밀리안 대공은 다르다.
벌써 수십 년 전부터 동부에 뿌리를 내린 그는 완벽하게 제 영지와 세력을 장악했다.
거슬리는 자는 음모로, 전쟁으로, 암살로 모두 처리해버리고.
이 시대에 전문 첩보 조직과 방첩 조직을 운용하는 건 알리아타 정도다.
사실 알리아타라고 통틀어 말하는 것도 민망하다. 그런 조직을 가진 건 기껏해야 안코나와 로란체, 에오메르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정보를 여전히 상인이나 용병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의지하는 북부가 서부 사정에 어두운 것도 당연했다.
전투력과 별개로 역량의 차이를 느끼는 사람들을 륜스이가 부드럽게 달랬다.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너무 상심할 것 없소. 어차피 아이메홉 대공 정도가 아니면, 전문적으로 정보 수집이 가능한 건 알리아타밖에 없을 테니.”
“아니, 그게 좀 자존심 상한단 말이오···”
“자존심 상할 게 무에 있소.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르고, 발전하는 것도 다른 것을. 대신 여러분에게는 대륙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기병이 있잖소.”
어르고 달래는 식이지만, 그래도 기병은 북부의 자랑.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환해졌다. 륜스이는 그 모습을 보며 하던 이야기에 쐐기를 박았다.
“이제 외력을 빌리는 건 선택이 아니오. 동부와 서부가 일시적으로나마 손잡은 지금은.”
“하···”
정보에 어둡다고 하지만, 이들도 생각이 있다.
눈사태에 기습까지. 크게 휘청인 북부를 두고 굳이 저들끼리 싸울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예상을 증명하듯 불과 얼마 전에 비보가 전해졌다.
조슈아와 아이메홉 대공이 동서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전서응을 쓰는 제국의 정보 전달 속도는 전신이나 전화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마냥 느리지도 않았기에 이들도 지금은 전부 알았다.
정식으로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전서응이 매달고 온 편지의 내용이 장례 도중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으니까.
“여러분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소. 조력을 빌미로 제국 정치에 알리아타가 개입하는 걸 염려하실 터.”
“잘 알고 있구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위 계승 전쟁으로 사람이 우르르 죽고 나면 제국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크고 넓은 땅은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저력을 품고 있다. 언제고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은 외부 세력이 딴죽 걸지 않을 때나 가능하다.
작정하고 사사건건 귀찮게 굴면 아무래도 회복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게 강력하게 부상하는, 전통과 저력까지 있는 알리아타라면 걱정하지 말라는 게 무리다.
륜스이는 그 무리를 권했다.
“이 자리에서 알리아타 연방 총리의 대리자로서 선언하겠소.”
“총리 대리?”
“그 정도 권한까지 가지고 있소?”
알리아타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적어도 이전처럼 왕정 국가로 남을 수 없다는 건 자명했다.
에마누엘레의 죽음으로 알리아타 왕가의 맥이 끊긴 상황에서 누가 왕이 된단 말인가.
안코나는 애초에 공화정이다. 로란체는 봉건 영주를 두고 있지만, 안코나를 두고 로란체가 왕이 되는 건 무리다.
다른 영지는 말할 것도 없다.
파라디소는 연방의 일원으로 합류했지만, 오거를 왕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은 없다. 적어도 대부분의 알리아타 국민은 그렇다.
군소 영지는 힘도, 능력도 부족하다.
그런 상황에서 알리아타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겁기만 했다. 국가 체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어찌 무겁지 않을까.
륜스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연방제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제국으로 오기 전에 미리 위임받았소. 적어도 이곳에서 나는, 알리아타 연방 정부를 대리하오.”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울고 웃고 때로는 칼까지 뽑으면서 다시 전쟁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알리아타는 거기 사는 이들의 뜻을 모아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각 영주의 재산권과 행정권을 존중하되, 외교권과 군사권, 사법권을 연방 중앙 정부에 위임하는 형태로.
륜스이가 보기에는 이것도 퍽 불안정한 근대 국가 수준의 공화정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안코나의 예가 있으니 거부감도 적었다. 어차피 민주정을 도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니, 이 정도가 최선이기도 했고.
지금 그는 초대 총리 마르가리타와 의회의 의지에 따라 알리아타를 대변한다. 그 놀라운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 륜스이가 선언했다.
“여러분이 수락한다면 우리는 페르디난트 아우스터리츠 라이히의 우방으로 참전하겠소.”
“아니, 참전해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하던 게 아니잖소.”
“일단 이게 먼저니, 말해둔 거요.”
륜스이의 지적 능력은 본래 안코나를 제외하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세인들이 주목하는 건 그의 놀라운 무력이었지, 행정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의 전쟁을 거치고 뒷수습을 도우며 다들 알아차렸다.
륜스이의 행정 능력이 그 무력에 비할 만큼 대단하다는 걸. 이제 륜스이에게 미래에서 온 것 같은 혁신적인 시야와 그걸 현실로 바꿀 실무 능력이 있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알리아타의 관료들 사이에서는 그랬다.
지금 륜스이에게 이런 권한을 준 이유였다.
“그 대가로 무리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소.”
다가올 전쟁은 알리아타에는 일종의 예방 전쟁이다.
어차피 전쟁이 벌어지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자국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자 결정한 것.
문제는 어느 쪽에 붙는가였다.
알리아타에 들어오는 정보만 놓고 보면 계승권을 가진 세 세력 모두 호전적이었으니까.
조슈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황제가 되면 전쟁부터 일으킬 놈이다. 사정이 어떻든 피를 더 많이 보는 선택을 할 게 뻔한 놈은 지지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조슈아 진영으로 참전했다가는 소모품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귀한 병력만 잃으리라. 그렇게 약해진 다음에 남는 건 침략일 테고.
의리나 도덕을 논할 상대가 아니니, 불 보듯 뻔한 미래였다.
막시밀리안이라고 다른 건 없었다.
노골적으로 소모품 취급은 안 할지 몰라도 기꺼이 가장 위험한 전장에 알리아타 군을 배치하는 게 눈에 선했다.
‘처음부터 같이 갈 수 없는 작자들이다.’
륜스이는 미래를 알고 있다.
조슈아가 같은 제국인을 아이부터 노인까지 제게 거스른다고 학살했다는 것도, 막시밀리안이 눈에 거슬리는 세력을 몇이나 음모로 몰락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어나지 않았지만 알고 있다.
사실 조피와 파펜하임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알리아타에서 봤을 때는 이 부부도 정복론을 부르짖는 호전적인 전쟁광이었으니까. 지난 삶에서도 불행한 사고가 있어서 경쟁에 탈락한 것 말고는 성품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
미래에는 안개가 꼈다.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연방은 자율권을 줬다.
이는 륜스이가 지금까지 돌아오고 걸어온 행보를 존중했기에, 신뢰했기에 가능했다.
지금 륜스이는 그 신뢰를 판돈으로 걸었다. 반드시 이기는 도박이었으니, 도박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했지만.
“그 무리하지 않는 선이 뭔지 묻고 있습니다, 페나 공.”
“관세 없는 완전 자유 무역. 조금 더 나아가면 훗날 제위를 계승하고 동맹이 되는 것. 알리아타가 원하는 건 이 정도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던 파펜하임과 형제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몰랐던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더 합리적인 내용이었기에.
“그 정도면··· 완전히 무리는 아니군요.”
“이게 무리라면 제국 간판이 울 것 같소만? 자유 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하니, 우리만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오. 동맹도 딱히 우리만 좋은 일이 아니고. 제국과 알리아타는 서로 보완할 것이 있잖소?”
경제학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무역의 효과에 대해 단편적인 인상 정도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시대다.
더구나 여기는 북방, 딱히 팔 게 없는 장소였다.
당연히 이곳에 사는 이들도 무역이나 경제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었다. 최소한 상인을 세금 뜯을 곳간 정도로라도 생각하고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중부와 비교하면.
“보완입니까?”
“보완이오. 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항구로 뭔가 해보고 싶다면 막을 생각은 없소만, 인제 와서 하기에는 돈과 시간이 지나치게 들지 않소?”
“아···”
기본적으로 제국은 내륙 국가다.
동부에 송곳으로 찍은 것처럼 작은 해안 영토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딱히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 애초에 원해서 가진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결혼 지참금으로 딸려온 영토고 작은 어촌 수준에 육로로 연결조차 안 됐으니, 그걸로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시대는 바다를 향하고 있다.
앞으로 대륙 간 무역의 규모는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질 리는 없다. 알리아타가 누리는 너무도 달콤하고 큰 과실을 모두가 봤으니까.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알리아타가 제국에게 매력적인 동맹이 될 수 있는 이유였다.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완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해야겠군. 해양 세력으로서의 역량은 이미 말했으니, 넘어가더라도 육군만 봐도 그렇소.”
사람들의 안색이 굳었다.
자부심 높은 제국인에게 너희 군대는 부족한 것이 있고 우리와 함께하면 완성된다는 말이 좋게 들릴 리 없다.
하지만 륜스이는 태연했다.
영혼의 나이로 치면 한참이나 어린 그의 형제들이 그러하듯.
“여러분의 기병은 강하오. 아마도 기병만 따지면 대륙 전역을 뒤져도 이곳처럼 강한 곳이 없겠지.”
“크흠, 잘 아시는구려.”
“하지만 전쟁을 기병만 가지고 치를 수는 없소.”
북으로 넓은 초원을 포함한 제국 북부는 전통적으로 기병이 강세였다.
중부도 물론 기사를 필두로 기병을 중요하게 여기긴 했다. 하지만 북부처럼 전체 병력의 최소 5할, 최대 전부를 기병으로 채우진 않는다.
채울 수도 없다.
조금 다른 의미로 반농반렵 문화권인 북부 기병은 그래서 강했다.
영지의 반을 차지하는 농지에서 필연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는 유목 기병을 받친다. 이 흐름이 망가지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하고 있소. 기병의 중요성은 여전하지만, 화약 무기를 바탕으로 보병과 포병의 중요성이 훨씬 커졌지.”
“그, 화약 무기가 그렇게 강하오?”
“강하냐, 약하냐로 표현하자면 강하오. 지금까지 존재했던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을 정도로. 물론 화기를 다루는 병종만 데리고 싸울 수는 없소.”
아직은 냉병기가 필요했다.
최소한 플린트락 머스킷과 총검, 조금 더 여유롭게 조건을 잡자면 후장식 소총이 나오기 전까지 총병은 홀로 설 수 없다.
포병이야 본래 아군의 도움이 필요한 병과고.
륜스이는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화기를 접할 기회가 없던 이들에게 알려줬다. 화기의 힘을.
“겨우 일주일 총 쏘는 법 배운 병사가 수십 년 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은 기사를 죽일 수도 있소. 그런 병사를 수천, 수만, 수십만까지 만들 수도 있고.”
“허···”
직접 보지 못한 물건의 위력을 듣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접할 기회가 없어 잘 몰랐을 뿐이지, 이들이 멍청하거나 무능한 지휘관은 아니다.
륜스이의 설명을 듣자 애써 부정했던 진실을 침음성으로 토해낼 정도로는 다들 유능했다.
“기병은 그래도 중요하오. 총은 배우기 쉽고 위력도 강하지만, 대신 장전 속도가 느리오. 포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륜스이가 본래 살던 곳에서도 20세기의 초반부까지 기병은 살아남았다.
본래 기병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파괴력도 아니고 지구력도 아니다. 두 다리로 달리는 인간은,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기동성이야말로 기병의 강점.
원하는 곳을 원하는 때에 공격할 수 있다는 건, 전술에서나 전략에서나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점이다.
“옆이나 뒤를 노리는 것만으로도 기병은 충분히 위협적이오. 총병이나 포병의 숫자가 적거나, 군집 신비까지 쓸 수 있는 정예 기병이라면 정면에서 싸울 수도 있을 테고.”
륜스이의 말에 영주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언젠가 기병도 변화의 물결에 밀려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오겠지만, 적어도 그때가 지금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비교적 편해진 영주들에게 륜스이가 쐐기를 박았다.
“완전, 그래서 완전이오. 적어도 현시대에서 대륙 어느 곳보다도 가장 강력한 화기와 총병, 포병을 보유한 알리아타가 가장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여러분과 하나 됐을 때.”
보병, 포병, 기병의 조합은 이미 증명됐다.
적절하게 다루는 세 병종의 조합이야말로 시대의 선택을 받은 정답.
륜스이가 그 진리를 아는 이 시대의 유일한 선지자로서 선포했다.
“우리는 완전해질 수 있소.”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선택의 공을 넘겼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않을 사람들에게.
“함께하시겠소?”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희망이 공기를 데웠다.
그 열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페르디난트가 륜스이와 손을 잡았다.
알리아타가 북쪽의 늑대들과 손잡은 날, 사방에서 전서응이 날아올랐다.
누군가의 탐욕과 누군가의 집착, 또 누군가의 꿈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