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9화 (461/497)

집결

대륙이 꿈틀대고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대륙에서는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다. 물론 작은 규모의 영지전이나 국지전은 꾸준히 일어났다.

하지만 만 단위, 십만 단위의 대전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평화가 길수록 뒤따르는 전화도 커진다던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휘말릴 대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그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누구나 알아차렸다.

휘몰아치는 시대의 폭풍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는 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다.

작은 날갯짓으로 폭풍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인 그들이었으니까.

“좋구나.”

“뭐가 좋습니까?”

요한은 누구보다도 존경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노인을 바라봤다.

젊은 시절 고된 삶을 보내다가 교리를 의심하며 마을을 떠난 자. 아무것도 아닌 육신을 이끌고 온갖 괴물과 도적, 재난이 횡행하는 세계를 횡단한 자.

그 뒤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인은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무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다룰 수 있는 신비는 무엇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검술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함정을 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경멸 섞인 시선을 보냈으리라.

하지만 지금 노인을 보는 요한의 눈동자에 담긴 건 존경이었다. 마법사로서 초인의 영역에 발 디딘 그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한 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누굴 존경할까.

“다가오는 미래가 좋지.”

“그렇군요.”

“약속된 구시대의 파멸이 좋고 신시대의 강림이 좋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좋은 건.”

조용하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요한은 알고 있다. 저 목소리 안에 숨은 감정이 얼마나 뜨겁게 끓어오르는지. 어찌 모를까. 당장 그부터가 노인과 같거늘.

“진실이다.”

“진실, 진실입니까···”

“진리라고 해도 좋겠지.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죄인들은 스스로 쌓은 업보가 몸을 태울 때, 울부짖으며 깨닫게 될 것이다. 도나르 라이히가 숨긴 것을.”

노인의 말간 눈이 너른 평원으로 지나 하늘로 향했다.

평생 일족의 가르침을 쫓아 방황하고 또 방랑했다. 작은 의문이 그의 시작이었다.

진실로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면, 그들의 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신이 실존한다면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시지가 따르는 단 하나의 가르침조차 공허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평생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 헤맸다.

저 북쪽의 눈보라 치는 설원에 남쪽의 반도, 이종족 연합의 비옥하고 푸른 땅부터 소왕국들이 아웅다웅하는 곳까지.

어린애 손목도 비틀지 못할 몸으로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어떤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너무나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쓸쓸하게 죽으려고 돌아온 제국, 잔인하고 모질게 굴던 고향에서 그는 찾고 말았다.

그의 평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황혼이 올 것이다. 그리고 긴 밤이 오겠지.”

“그를 위하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래. 오랫동안 참으로 고생 많았다, 요한.”

시작의 땅, 시지.

수많은 시지가 시지(始地)를 그들이 시작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을 찾았으니, 어찌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시지는 단순히 그들이 시작한 땅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황혼의 의지를 만들었다.

진정한 시지를 위하여 싸울 자들을 모았다. 수백 년의 모멸과 핍박 속에서 한을 품은 자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그저 이어지기만 했던 자들이 모였다.

요한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였다.

노인은 요한이 자신에게 온 걸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신께서 점지한 운명.

“피가 흐르겠지.”

“저희가 바란 대로.”

“그래. 불신자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바다가 될 것이다. 대지가 그 죄 많은 종자들의 피를 흠뻑 마셨을 때, 비로소 오시리라.”

황혼의 의지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최고 수준의 정보력을 아는 자들이나 드물게 이름만 아는 정도. 그나마도 그들이 생각하는 황혼의 의지는 극단적인 테러 단체다.

아니다.

황혼의 의지는 방향을 못 잡고 아무나 죽이는 테러 단체 따위가 아니다. 덧없는 이상에 목숨만 바치는 어리석은 집단도 아니다.

황혼이라는 위대한 목적이 있으니, 그들은 공허한 폭도가 될 수 없다. 돼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위대한 황혼을 위하여.

황혼의 의지라는 이름을 받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정의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아득하도록 먼 옛날, 우리가 처음 이 땅에 발 디뎠을 때부터 안배하신 대로.”

바라는 것은 오직 강림.

그를 위하여 황태자를 죽였다. 헤르초크를 죽였다. 대륙의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자를 죽였다. 또 속였다.

그 모든 행위는 파종이었다.

정성스럽게 심은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웠다. 작고 여린 싹은 이제 불신자의 피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 과실을 맺으리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분께서는 진정 위대하시니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 시작이 오리라.”

시작한 땅이 아니다. 시작할 땅이다.

긴 방랑 끝에 마침내 찾은 진실을 곱씹으며 노인이 하늘을 바라봤다.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다. 눈부시도록 밝다. 하지만 곧 저물 것이다.

모든 질서가 무너질 황혼이 가까워졌다.

황혼은, 피처럼 붉으리라.

***

흐름이 뒤엉켰다.

정세가 폭주하고 있다. 엉망진창으로 흐르고 있다. 약속된 파멸을 향해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이메홉 대공, 막시밀리안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상황을 복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흐름이 이상했으니까.

북쪽에서 눈 오크들이 내려와 아우스터리츠를 습격하는 건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름대로 강력한 세력인 아우스터리츠가 공격받아 힘을 잃으면 그에게는 좋은 일이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어도 란덴부르크에 합류할 세력이니 당연하다.

사실 그는 아우스터리츠가 버티지 못할 줄 알았다.

상식적으로 일개 방백령이 그 정도 병력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미친놈이다.

순수한 인간 군대라도 규모가 수만이면 방백령 아니라 후작령이라도 상대하기 버겁다. 아니,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는 게 정상이다.

하물며 인간보다 더 강한 눈 오크의 군대가 그 정도 규모니 당연히 무너져야 했다.

그 당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쓸모없는 고민을 하는군.”

“멍청한 말은 하지 마라. 지나간 일을 그저 지나간 대로 받아들이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 다음에도 또 당할 수밖에 없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막시밀리안이 짜증 냈다.

좀처럼 드문 일이지만, 어차피 이 작자에게 감정을 속일 필요는 없다. 속일 수도 없고.

“너야말로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뭐지? 전쟁의 규모가 커진 것?”

“아니, 속도다.”

아우스터리츠가 눈 오크의 습격을 이겨낸 건 넘어갈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습격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저력이었지만 세상일이 본래 그렇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도 등 뒤로는 큰 칼을 준비해 날을 가는 법.

투쟁이 일상인 제국에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힘을 숨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힘으로 예상 못 한 승리를 거둘 수도 있고.

눈 오크의 습격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새삼 기분 나쁜 것도 없다. 막시밀리안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망나니 조슈아가 저지른 짓이었다.

“조슈아, 그 미치광이가 미친 짓을 저지를 줄은 알았지만··· 벌써 그럴 줄은 몰랐지.”

“아, 그 습격?”

하이브 마인드가 유쾌하게 되물었다.

막시밀리안은 그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작자는 워낙 강해서 그런지, 오래 살아서 그런지 매사 느긋한 감이 있다.

“그래. 어차피 다들 외력을 빌리는 건 예상했다. 그렇다고 불러오자마자 상대 세력의 중심부터 두들기는 건 예상 못 했지.”

정예병이 왜 정예병인가.

오랫동안 조련하고 전투 경험도 많기에 정예병이다. 달리 말하면 무슨 짓을 해도 단기간에 정예병을 만드는 건 어렵다는 뜻이다.

하물며 제국에서 정예 소리 들으려면 다른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진짜 정예 부대는 각자 군집 신비를 가지고 있다. 전통과 역사로 벼리고 또 벼려서 만드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제국 정예.

기습에 동원할 정도로 값싼 전력이 아니다.

조슈아는 그 비싼 전력으로 기습하는 미친 짓을 했다. 물론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미치광이 성질머리를 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적당히 기도 꺾을 겸, 되면 좋고 안 되면 만다는 생각으로 했겠지.”

“그런 것치고는 말을 잘 들었군? 그 녀석들도?”

“일단은 놈도 황족이니까. 미래의 황제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지.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인망을 깎아 먹어서 그렇지, 라이히의 이름에 그 정도 힘은 있다.”

물론 단순히 이름값에 눌려 쫓기듯 떠난 건 아닐 것이다.

비룡 기사단과 용기사, 신목 수호자와 폭풍성의 이름이 그 정도로 약하진 않다. 정말로 가능성이 보여서 했겠지.

일단 조피가 의식불명이 됐다니,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본래대로라면 거기서 란덴부르크는 끝이다. 끝나야 했다.

그런데 페르디난트인지, 퍼디난트인지 하는 망할 애송이는 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옥새까지 들고서.

“아우스터리츠, 아우스터리츠에서 이 모든 게 시작한 건가.”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막시밀리안이 이견을 표하는 하이브 마인드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이 미친 괴물은 표면적까지 줄이는지 이제 사람처럼 작아진 채 그의 옆에 머물렀다. 물론 마법을 쓰는 건 아니라서 외모를 바꾸진 못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놈의 정신 제압에 당하지 않는 막시밀리안에게는 여전히 그 끔찍한 촉수가 그대로 보인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절세 미녀라도 발견한 것처럼 살갑게 군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절세 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절세 미녀가 사실은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발정 난 개처럼 헉헉대는 꼴이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그를 위로해주는 건, 신검만큼은 놈에게 당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취향이 독특하시군··· 이랬나. 망할 늙은이.’

다시 생각해보니 신검도 짜증 난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슬그머니 조롱이나 하고 떠나다니. 본래는 칼에 미쳐서 다른 건 관심도 없는 그 성정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심장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이브 마인드는 거북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막시밀리안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고양이다.”

“음? 륜스이 페나를 말하는 건가?”

“그래.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 놈은··· 역시 이상한 놈이다.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놈에게 닿아있다. 생각해 봐라. 놈이 행했던 일이 네가 앞둔 전쟁과 전혀 별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런가?”

막시밀리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하이브 마인드가 싫다. 하지만 싫은 놈이 하는 말이라도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기에 군주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리아타··· 인가.”

“지역으로 따지면 그렇겠군. 난 그놈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만 단위 전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없었다.

그러다가 불과 몇 년 전에 알리아타에서 대전쟁이 일어났다. 아니, 순식간에 거대한 전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아리아드나 대해전부터 시작해서 로란체 공방전에 통일 전쟁까지.

제국으로서는 남쪽의 작은 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영향이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아펜니노산맥이라는 천혜의 장벽 때문에 제국과 반도는 뭔가 하기 어려웠으니까.

알리아타가 세계 제일의 해군을 가진 것도 별 의미 없었다. 어차피 제국은 내륙 국가니 알리아타 해군이 세계 제일이든, 최약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국에 알리아타는 말하자면 섬이었다.

지도상에서는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교류하기 힘든 섬. 그게 알리아타 반도의 현실이었다.

관심이 없던 건 그래서였다.

“그래, 네 말도 틀린 건 아니군.”

“틀린 건 아닌 게 아니라, 옳은 거겠지.”

“아니, 거기까지는 너무 갔고.”

하이브 마인드는 백 년도 못 산 주제에 독사처럼 교활한 인간이 답답했다.

머리가 나쁘기는커녕 그조차 생각 못 한 음모를 꾸밀 정도로 비상한 인간이 이런 부분에서는 둔하니, 답답할 수밖에.

정작 막시밀리안은 사람 하나, 그것도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일개 무인이 이런 흐름의 시발점이라는 하이브 마인드가 노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지적은 의미 있었다.

“알리아타가 통일되고, 아펜니노산맥이 뚫렸지. 튀링겐이 부상하고 여기까지 왔다.”

“뭐, 생략된 게 많긴 하지만.”

물론 막시밀리안조차 어떻게 손대기 힘들 정도로 급변하는 정세가 순전히 알리아타 때문은 아니다.

당장 지금 그가 전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슈아, 그 미치광이 놈이 부리는 말도 안 되는 억지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알리아타보다는 조슈아 놈이 더 문제 같긴 하다.”

“아, 그 녀석? 문제긴 문제지.”

하이브 마인드는 오랜 세월 살아왔다. 인간은 물론이고 요정조차 감히 짐작도 못 할 정도로 오래 살아온 그에게도 조슈아는 신선하도록 미친놈이었다.

반드시 잡아서 고문해보고 싶을 정도로.

어떤 신선한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어쩐지 전에 없이 맛있는 감정이 뽑혀 나올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식욕이 돌았다.

막시밀리안은 축축한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는 하이브 마인드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전략적 동반자긴 하지만, 역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혐오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티 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기에 그는 잠자코 대화를 계속했다.

“미친놈이··· 당장 같이 북부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부터 치겠다고?”

“아아, 가관이었지. 네가 보인 반응도 꽤 맛있었고.”

조슈아가 멋대로 란덴부크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그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제 둘이 치고받는 걸 구경이나 하면서 살아남는 놈 등이나 찌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미친놈을 정상인의 잣대로 판단해보려는 생각이 어리석었다.

놈은 각자 북으로 치고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응하지 않으면 북방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막시밀리안부터 공격하겠다고도 했다.

사실 다른 놈이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 치고 무시했으리라. 그조차 안 했을 수도 있고.

문제는 막시밀리안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얼마나 미쳤는지 보여준 놈이다.

한 번 미친 짓을 한 놈이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하필 구스타프가 놈의 휘하에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제국 사교계에서는 제법 얌전한 척했지만, 막시밀리안은 알고 있다.

그놈은 성향부터 조슈아와 비슷한 미치광이다. 그런 놈이 용까지 타고 날아다닌다. 놈이 작정하고 괴롭히려고 들면 어느 세력이라도 심하게 괴로워진다.

심지어 그걸 즐긴다.

역시 조슈아도, 구스타프도 마음에 안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문제는 조슈아 그놈 같은데···”

“뭐, 그놈도 문제긴 하지. 정말 재밌는 놈이라니까!”

“난 재미없다. 너도 좀 재미없어야 하고.”

“뭐야, 현재를 즐기라고. 원래 세상은 마음대로 안 돼서 재밌는 법이지.”

막시밀리안은 그래서 륜스이에게 얻어맞았냐고 조롱하려다가 참았다.

도저히 달가워질 것 같지 않은 놈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가장 큰 전력이니까. 최후의 비밀 병기와 벌써 척질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동서와 남북이 싸우는 형세군.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가 미쳐 돌아가고 있어.”

“그렇게 조장한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내가 조장한 건 저놈들끼리 싸우다가 반 정도 죽었을 때, 나 혼자 깔끔하게 다 죽이는 거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 커지는 게 아니라.”

“이런··· 젊은 친구, 아직 잘 모르는군.”

하이브 마인드는 천재 중의 천재보다도 더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

오래도록 지하에서 살아왔다고 그 무시무시한 지능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당연히 지상에 올라와서 막시밀리안에게 정보를 받은 그는 빠르게 세상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파악한 게 있다. 아니, 이건 파악했다는 표현보다는 느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종종 그런 시기가 있다.”

“그런 시기?”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이 되는 시기. 바다에 던진 조약돌이 해일이 되는 시기. 무슨 일을 해도 감당할 수 없도록 커져서 휘몰아치는 시기지.”

막시밀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주로 나잇값 못하는 모습만 보여주지만, 역시 하이브 마인드도 아득하도록 오래 살아온 마물이다.

지금 그가 말하는 바에 담긴 현기는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판이 커지는 건, 처음부터 네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거다.”

“운명론인가?”

“뭔가 착각하고 있군. 이건 역사다. 운명 따위가 아냐.”

“뭐?”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을 보며 영원을 사는 괴물이 깨달음을 전했다.

“수천만의 생명체가 쌓고 또 쌓아온 업이 터지는 걸 일개 인간이 무슨 수로 막겠다는 거냐. 신조차 그런 건 할 수 없다. 나는 내 힘에 자부심이 있지만, 그런 건 못 한다.”

실로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변화가 찾아왔다.

연기를 뿜지 않는 휴화산이라고 아래에 용암이 흐르지 않는 건 아닌 법. 오히려 연기를 뿜지 않은 기간이 길수록 터졌을 때, 더 무섭게 터지는 법이다.

화약의 발명과 대중화부터 시작해서 보통 교육과 시지 해방, 연방 국가의 등장까지.

이미 시작된 변화는 앞으로 더 거칠게 휘몰아칠지언정, 잦아들지 않으리라.

하이브 마인드에게는 보였다.

신위 대전 시기가 이랬고 유목 민족이 대륙을 휩쓸 때가 이랬으며 도나르 라이히가 해방 전쟁을 벌일 때가 또 이랬다.

한 사람의 힘으로 잠재울 수 없는 흐름이다.

거대하게 폭발하고 난 다음에야 잠잠해질 흐름 앞에서 일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명확했다.

“너희에게는 실감도 안 날 옛날이야기는 안 하겠다. 하지만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도나르 라이히의 시대에 싸우지 않을 방법이 있었나?”

“없··· 었지.”

“지금도 그러하다. 가장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싸워야 한다. 모두가 죽고 죽여야 한다. 그런 시대다. 그러니까, 젊은이여.”

하이브 마인드는 불현듯 막시밀리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혐오스러운 촉수가 꿈틀거렸지만, 막시밀리안은 가만히 놈을 바라봤다. 현자처럼 구는 놈의 말에서 얻을 것을 찾기 위해.

다행히 하이브 마인드는 수수께끼 내는 마녀처럼 굴지 않았다.

“즐겨라.”

단호한 목소리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말했다.

“세계 대전을.”

너무도 무거운 파멸의 이름이 조용한 공간을 울린다.

그 은은한 진동 속에서 막시밀리안은 비로소 웃었다. 조언자의 말에 따라.

파멸의 끝에 유일한 지배자로 거듭날 모습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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