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7화 (489/497)

마지막 전쟁

쉴 새 없이 변하며 흐르던 전황은 어느덧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힘차게 밀고 나가던 중앙은 적의 두터운 종심 방어에 막혀 멈춰 섰다.

황금 사자 용병단이 리카르도를 필두로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선보였고 핏빛 독수리 연대가 단결된 의지로 끈질기게 나아갔지만, 한계는 있었다.

제국군을 격파하고 나자 합류한 이종족 연합과 동부군이 문제였다.

비룡 기사단에 시달리면서도 따로 빼서 지원한 3열의 오거 총병은 여력을 잃었다.

그들은 도저히 활과 화살로 낸다고는 믿기지 않을 위력의 공격을 퍼부어 대는 이종족 연합 측 요정 궁병과 싸우기 바빴다.

보병진도 마찬가지.

거침없이 나아가던 리카르도는 동부에서 온 별에 비견할 강자, 윌리엄 스틸우드에게 가로막혔다. 가장 날카로운 창이 막혔으니, 황금 사자 용병단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핏빛 독수리 연대라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키는 작지만, 누구보다도 단단한 군집 신비를 사용하는 드워프 연대에게 고전하고 있다.

여전히 라흐만과 형제들은 자유로의 갈망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드워프들은 제 고향의 산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또 버텼다.

쉬이 밀리지는 않지만, 뚫고 나가기는 무리인 상황.

구스타프와 혈전을 치르는 쿨랍담이 이기고 합류하지 않는 이상, 중앙의 전황은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흐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단번에 이기는 건 무리였나.”

“아무래도 그렇지.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 단번에 결판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페르디난트의 탄식과도 같은 말에 륜스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능한 흐르는 피를 줄이고 싶은 건 알겠지만, 처음부터 하루 만에 승부를 결하는 건 꿈 같은 희망이었다.

그림자 악마를 무찌르고 사기가 충천해서 질주하던 좌익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쟁의 규모가 이 정도로 커지면, 예측에서 어긋나는 게 많아지지. 사실 이보다 작은 전쟁에서도 작전 계획은 시작하자마자 버리라는 말이 있잖나.”

“아, 그런 말도 있었지. 처음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더군.”

좌익의 아디라는 누군지도 모를 기사들에게 막혔다.

몸에 걸친 갑옷은 이삼백 년 전에나 쓸 구식 사슬 갑옷이었지만, 실력만은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강자들이었다.

아무리 아디라가 당대 제일의 천재라고 해도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

륜스이는 조마조마한 감정을 숨기며 시선을 튀링겐을 필두로 한 남부 세력이 분전하고 있는 우익으로 돌렸다. 어차피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제자를 믿을 수밖에 없고, 믿고 있으니까.

“치열하군.”

“그게 전쟁이지.”

“전쟁이 원래 비참하고 치열하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심하군. 지난 십 년 동안 일어난 전쟁을 전부 합쳐도 오늘 하루만큼 사람이 많이 죽었을까?”

“애초에 지난 십 년 동안 이렇다 할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 적어도 제국에서는.”

알리아타는 몇 번이고 대규모 전쟁을 겪었지만, 제국은 오히려 소규모 영지전 정도를 제외하면 평화로웠다.

선황의 시대에 감히 제국을 공격하는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제국이 다른 국가를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동부 소왕국들이야 일단 쳐들어가면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파죽지세로 격파했겠지만, 그동안 이종족 연합이 가만히 지켜만 본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남쪽의 알리아타도 퍽 부담스러운 적이었고.

어차피 다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머리 굴리는 시대.

동부가 완전히 무너지고 제국에 편입되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이라는 걸 모르는 세력은 없다.

덕분에 극단적인 상황은 도저히 나올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공허한 가정에 불과했다는 게 증명됐을 따름이지만.

륜스이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우익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지진이나 화산과 같지. 오래 쌓일수록 크게 터지는 법이라네. 물론 가능하면 피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나.”

배부른 자들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지언정, 전쟁이 너무도 명백한 악으로 규정된 지구라고 평화롭지는 않았다.

륜스이가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굴러떨어질 적에도 어디선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전 세계가 휘말린 거대한 전쟁으로 수천만이 죽고 난 다음에도 바뀌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전쟁은 사회를 이룬 지성체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무릎 꿇어서 모두 끝난다면 그러고 싶어질 정도야.”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말게.”

벌써 만 명도 넘게 죽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았지만, 전투 초반에 파라디소 왕실 친위대에게 날아간 연대만 생각해도 수천이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지금, 사상자의 숫자가 만 명도 안 되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다. 명실상부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겁쟁이의 계산법이거나.

“책임을 피할 생각하지 말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네가 부르짖은 말에 모였고 또 싸우고 있네. 그런 자네가 약한 소리를 하면 쓰러져 땅바닥에 머리를 기댄 자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죽어간 건가.”

냉병기로 싸우는 시대에 수천이 죽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투사 병기의 공격력은 갑옷과 방패를 쉬이 뚫지 못하고, 손에 쥔 창검은 상대의 방어를 쉬이 뚫지 못하니까.

덕분에 수천, 수만 명이 온종일 싸우고도 죽은 자는 겨우 수백에 불과한 전쟁도 제법 있었다.

한쪽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대열이 무너져서 도주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한 번의 전투로 정원의 수십%가 죽어 나가는 일은 좀처럼 드문 게 냉병기로 하는 전쟁의 양상이다.

지구에서도 그런 전쟁은 참호와 기관총의 시대로 접어든 다음에야 벌어질 수 있었다.

신비가 존재한다지만, 부정확하고 불규칙적이라서 살상 능력에 한계가 있는 시대에는 전쟁이라고 한들, 사람이 그리 많이 죽지 않는다.

지금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다르다.

벌써 일만도 넘게 죽었다. 앞으로 수만이 죽을지 수십만이 죽을지 알 수 없다.

전쟁을 숫자로만 보는 자들은 수십만의 격돌에서 겨우 만 명 조금 넘게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자가 그리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 회의감이 드는지는 이해하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참상을 보고도 아무 감흥도 못 느끼는 작자였다면 난 자네 옆에서 검을 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전쟁이란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 쳐도 슬금슬금 다가와 발목을 잡는 것.

사회의 번영이라는 햇빛을 받으며 성장하는 이상, 반드시 피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적어도 무한한 자원이 존재하는 세계를 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가지고 싶은 것이 있고,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니까. 모두 행복하게, 공평하게 가진 것을 나눌 수는 없으니까.

지금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여기 모인 자들은 각자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 살육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졌다.

누군가는 자유를, 누군가는 평화를, 또 다른 누군가는 명예와 영광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을 좌지우지할 권력과 황금을 위하여.

사람은, 사회는 욕망에서 벗어난 부처가 될 수 없고, 무한히 욕망을 채워줄 낙원은 지상에 없으니 필연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해야 한다.

“자네가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말했지. 무엇을 위해 싸우냐고. 강처럼 흐르는 피가 자네 마음을 어지럽힐 때면 생각하게. 진정으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나?”

륜스이는 지난 삶에서 셀 수도 없는 전쟁에 참전했다.

그 시절에는 이렇게 대규모 단기 결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십,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 수십 년에 걸쳐서.

비극이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평생 보지도 못할 옥좌를 위해서 끌려 나와 창 한 자루 쥐고 벌벌 떨다가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누였다.

제 육신에서 흐른 따듯한 피가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젊은 남자가 그렇게 죽어 나갔으니, 사회라고 멀쩡할 수 없었다.

아이와 여자, 노인을 가리지 않고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고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노동의 결과물은 전장으로 나선 젊은이들에게 먼저 돌아가야 했으니까.

거기서 끝났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적극적으로 상대 진영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트리기 위한 약탈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간신히 고된 겨울을 버티고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만든 밭이랑이 말발굽에 짓밟혔다. 종자는 불탔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기에 약탈자를 막고자 나선 이들은 그렇게 죽었다. 무엇도 하지 못하고.

인세의 지옥이었다. 그가 살았던 세월은.

지금 그 지옥 같은 시절의 참상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지만, 륜스이는 오히려 차분하기만 했다.

“자네는 흔들리지 않는군.”

“그럴 리가 있나. 나도 사람이니 이리저리 흔들린다네. 지금도 좌익에 난입해서 보이는 건 전부 베어버리고 우리 제자를 데려오고 싶어.”

륜스이의 시선이 치열하게 싸우는 아디라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모두가 죽고 죽이는 살육의 도가니탕 속에서 그라고 어찌 평온하기만 할까.

이 전장에 마음 가는 이들은 셀 수도 없이 많고, 그 모두가 각자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당연히 륜스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아무리 많은 참상을 경험했더라도, 전쟁이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고 익숙해져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손가락을 한 번 잘려봤다고 다음에 잘릴 때 익숙하게, 태연하게 잘릴 수 있겠는가? 전장에서 보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그와 같다.

몇 번을 보든, 몇 년을 보든 여전히 끔찍하다. 여전히 싫고, 막고 싶다.

그래서 륜스이가 여기 서 있다.

아끼는 이들이 전쟁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봐 가면서.

“흔들릴 때면 나도 고민한다네. 대체 왜 나는 이 지옥의 틈바구니 한편에 서 있는지.”

“답은 찾았나?”

“찾을 것도 없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참으로 오래도록 걸어온 살육의 나선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행복을 찾았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다.

눈 감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지금도 홀로 있노라면 떠오르고는 한다.

에밀의 집에서 머무르며 맺은 인연들이. 마지막 순간에 안겨 칭얼대던 아이의 체온이.

과거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회였지만, 또 참으로 잔인한 사건이었다. 그가 이 낯선 세계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그저 흐르면 흐르는 대로 살려고 했던 건 그래서였다.

“나는 말이네, 굳이 세상에 나서고 싶지 않았어. 다시 지긋지긋한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을 뺏고 싶지 않았지. 나는 검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검을 휘두르는 걸 싫어한다네.”

륜스이에게 검이란 애증의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이 굴러떨어진 그를 지켜준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머리에 쓴 갓도, 몸에 걸친 두루마기도 그랬다.

보고 있노라면 강제로 튕겨 나가야 했던 세계가 생각나는 아픈 이정표였다. 그의 존재가 어디서 비롯했는지 강제로라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증거였다.

실제로 륜스이는 미친 사람처럼 돌아갈 방법을 찾아 헤맸다.

고대의 신전과 지저의 대미궁, 대양 한가운데의 유적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언제나 몸에 걸친 옷과 손에 쥔 검이 그를 다그쳤기에, 이곳은 그의 세계가 아니라고 외쳤기에.

어디에도 방법은 없었고 오랜 집착에서 해방된 후에 맞은 평온한 삶.

만족스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였기에 진실로 마지막이기를 바랐건만, 운명은 그를 다시 이곳으로 돌려놨다.

륜스이는 가만히 목에 매달린 천칭 목걸이를 쓸어내렸다.

처음 돌아올 때만 해도 부러졌던 천칭은 어느샌가 온전한 모습으로 변했다. 아주 조금 깨진 부분을 제외하면, 천칭은 수평을 이뤘다.

“그저 조용히 있고자 했지. 나를 부른 게 운명이라면, 나는 무엇도 하지 않음으로써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네. 그저, 끝내 살피지 못했던 전날의 인연이나 돕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지.”

륜스이는 소란스러운 뒤편을 지그시 바라봤다.

필리포를 지나쳐 후방으로 진격하던 악마들이 함정에 터져 죽고, 녹아 죽고, 찔려 죽으며, 불타 죽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주먹을 불끈 쥔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지난 삶에서는 저 모습을 지키지 못했다.

이번 삶에서는 지켰다.

거기서 멈추려고 했다. 그저, 엘레나를 지키는 선에서 멈추고 조용히 숨어서 살다 떠날 생각이었다.

“인연이란 신비하더군. 그저 숨고자 하는 내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와 세상 밖으로 이끌었지.”

륜스이의 시선이 아디라와 리카르도를 거쳐 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닿았다.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 아닌가. 지난 삶에서는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갔던 아이들이 이번 삶에서는 그의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륜스이라는 사람이 이 세계에 살았음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증명하는 존재. 삶이 끝날 때까지 그를 잊지 않으며, 그가 잊지 못할 존재.

아이들과 함께할 때, 그는 실존했다. 그렇기에 지키고자 한다. 바꾸고자 한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바보나 할 법한 꿈 같은 이상으로 들렸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사람인 이상, 낙원 따위 올 리 없다.

세계 제일의 권력자인 황제?

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황제가 된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페르디난트가 옥좌에 앉아 제 살을 깎아가며, 수명을 깎아가며 노력해도 어디선가는 비극이 벌어질 것이다.

누군가는 굶어 죽고, 누군가는 칼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불에 타서 죽고. 온갖 비참한 죽음이 여전히 세상에 가득할 터.

또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 죄인 취급할 테고, 외모가 흉악하다고 차별할 것이며, 조상 대대로 전해진 편견으로 사람을 멸시할 터.

전쟁 따위 없는 세상. 학대도, 학살도 없으며 차별도 없고 굶주리는 자와 유랑하는 자도 없는 세상 같은 건 환상이다.

세상 물정 따위 모르는 바보천치나 생각할, 영원히 닿지 못할 낙원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나도 감성적으로 변한 것 같군. 바보나 생각할 이상에 끌리는 걸 보면.”

언제나 세계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영원히 닿지 못할 이상을 향해 꿋꿋하게 나아가다가 끝내 쓰러진 사상가와 혁명가의 시체 위로 기둥을 세우고 반석을 깔아가며 높아지고 튼튼해졌다.

먼 옛날 누군가 인을 주장하고 누군가 의를 주장할 때,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시대를 살던 자는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현명한 척하던 자들이 죽어 백골로 스러져 무엇을 남겼는가.

인의를 주장하던 자들은 생전에 무엇도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그들의 생각만은 살아남아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구원했다.

먼 옛날 다른 누군가가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어주라고 했을 때, 시기심 많은 자들이 그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살아남아 세상을 바꾼 건, 바보처럼 보였던 그 생각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변화는 너무도 느려서 가만히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보면 그제 같던 어제보다 생각보다 많이 멀어진 오늘에 놀라게 하는 법이지.”

때로는 어리석은 증오가 사람을 무너트리고 때로는 무정한 자연이 사회를 무너트린다.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사람은, 사회는 천천히 더 좋아졌다. 수백, 수천 년에 걸쳐서.

그러니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루살이라면 내일을 생각할 필요 없지만, 사람은 내일을, 내년을, 수백, 수천 년 뒤를 생각해야 하는 법.

이상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흔들리지 마라. 네 생각은 바보 같은 길일지 모르지만, 바른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언제나 빨리 가는 게 아니지. 바로 가는 거다.”

참혹한 전장을 바라보며 호수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던진 말이 페르디난트의 가슴을 흔들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는 조용히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기에.

“정말 이 길이 바른길이라고 생각하나?”

“틀림없이. 제자들에게는 정의로운 자가 가장 큰 참상을 만든다고 늘 강조했지만··· 그래도 진실로 바른길은 있는 법이지. 당대에 알아보기 힘들 뿐.”

륜스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답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는 흐릿한 기억의 잔재로만 남은 고향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곳에서도 전쟁은 언제나 벌어지고 있었고 차별은 남아있었다. 맹목적인 신앙이 맹목적인 증오를 부르고 높은 성 위에서 제 배만 불리려는 자가 온갖 비극을 만들었다.

그래도 낫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누구나 태어난 것만으로도 마땅히 주어져야 할 권리가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드높은 현실의 벽 앞에 막혀 공허하게 메아리칠지언정, 만인이 공유하는 정의가 있었다.

피로 피를 씻는 비극을 몇 번이나 거치고서야 찾은 그 소중한 가치가 이곳이라고 무의미해질까.

륜스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이기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광기가 거칠게 휘몰아치는 시대, 비극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계이기에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승패가 증명하는 건 강약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다.”

“뭐?”

“제자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이지. 하지만 때로는 이겨야만 증명할 기회도 있는 법이 아니겠나.”

우뚝 솟은 지휘탑에서 륜스이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나의 삶을 함께하고도 모자라 두 번째 삶에서까지 함께하는 태도의 손잡이를 쥐었다.

낯익은 감각을 느끼며, 그가 오랜 친우를 뽑았다.

강철도 종잇장처럼 가르는 칼날이 햇살에 반짝이며 부르르 떨었다. 너무 오래 걸렸다고 투정 부리는 것처럼.

“기회는 내가 주마. 너는 이 참상에 흔들렸던 자신을 잊지 말고 증명해라.”

이제는 검성을 상징하는 자세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러자 먼 곳의 강적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세, 바르다는 말을 조각으로 깎아낸다면 저런 모습일 터. 륜스이는 자신과 완전히 같은 자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가 옳았다는 걸.”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루살이들이 얼마나 죽고 죽이든 저는 상관없다는 듯, 고고하게 지켜만 보던 하늘이 동시에 갈라지는 순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던 전장의 소음이 하늘을 가른 검격에 침묵하던 순간.

검성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갈라진 하늘 아래에서 마주 달려오는 옛 시대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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