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 생존자 8(4)
나는 얼른 대답했다.
“그거 제가 쓸 줄 알아요.”
세상에 마상에, 이 절묘한 타이밍에 판독기 뜬 거 실화냐? 역시 데드 체이스는 운발 게임이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게 있으면 욕쟁이 아저씨가 체인질링이라는 걸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희생양의 눈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단번에 납득시킬 수 있다.
“그거 판독기라는 건데, 의심 가는 사람을 피사체로 잡고 찍으면 그 사람이 괴물인지 아닌지 알려 주는 거예요.”
“그래? 이거 아주 대단한 아이템이구나.”
어딘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 이상한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장난감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판독기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손을 뻗는다.
“저한테 한 번 주시겠어요? 테스트해 볼 겸 해서 저 아저씨부터 확인해 보죠.”
“어? 그건 좀 곤란한데.”
“네?”
엥.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지만 이상한 남자는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판독기를 굴리며 순박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그런 물건이면 나는 나부터 확인하고 싶은데.”
“…뭐라고요?”
“그렇잖아. 네가 저 아저씨를 몰아가는 걸 보니 아주 사소한 일로도 트집 잡히겠다 싶었거든. 자칫 억울한 누명이라도 써서 저 아저씨처럼 되는 건 사양하고 싶어. 그럴 바엔 나부터 결백하다는 걸 입증하는 게 낫지.”
아, 방금 깨달았다. 내겐 나도 몰랐던 알레르기가 있었다. 헛소리 알레르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과민 반응이 일어나지 않겠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한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찾아서 내가 얻은 거잖아, 네가 조금 도와줬을지 몰라도 결국 내 손안에 들어왔지. 내 걸 네가 마음대로 쓰겠다는 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란 건 너도 이해하지?”
“진심이세요?”
여기 있다 보니 암세포도 암에 걸려 나을 지경이다.
정신 나갈 거 같애. 점심 나가서 먹을 거 같애.
판독기는 강력한 아이템이지만, 그렇기에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다. ‘기계공’, ‘시계태엽 되감기’ 같은 특수 스킬이 없다고 가정하면, 한 번 사용했을 때 무려 한 시간을 기다려야 다시 쓸 수 있다. 그때 동안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걸 고작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용도로 낭비하겠다고?
체인질링 한 명을 식별하는 중대한 기회와 맞바꾸고서라도?
다음 순간, 이상한 남자가 체셔 고양이가 웃는 듯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조크야 조크. 에스페란토식 조크. 왜 그렇게 심각해? 가볍게 장난 좀 쳐봤어.”
선뜻, 판독기를 건네는 이상한 남자.
이거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생각하면서도 나는 판독기를 받아들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욕쟁이 아저씨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뭐야? 그걸로 나를 찍겠다고?”
“네,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모처럼 저 형이 기회를 양보해 준 건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하고 가면 좋잖아요.”
판독기를 향하는 순간, 기겁하며 손사래 치는 아저씨.
“나, 나한테 그딴 거 들이대지 마! 그, 그래. 내 초상권! 응? 내 초상권은 어디 갔느냔 말이야. 법적 대응 할 거야, 이 새끼야! 그거 저리 안 치워?!”
개소리죠, 18.
“네, 법적 대응 열심히 하시고… 가만히 있어 보세요.”
“치워! 치우라고! 아니지, 너부터 찍어! 네가 뭔데 날 그딴 걸로 찍고 지랄이야!! 이 개놈의 자식이!”
욕쟁이 아저씨가 발광할수록 아저씨를 옹호하던 사람들도 의혹에 찬 얼굴로 바뀌었다. 그렇지, 정말 결백하다면 저렇게 기를 쓰고 저항할 필요가 없지.
판도가 명백히 기울었으니 더 기다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자, 치즈.”
“하지 마아아! 내 영혼이 빨려든다아아!”
찰칵.
판독기가 인간문화재로 화하여 봉산 탈춤을 추는 아저씨를 인식했다. 새하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섬광이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
꺽, 꺼거걱……. 사람의 성대로 낼 수 있는 가장 불쾌한 소리를 자아내는 욕쟁이 아저씨,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나 싶었더니 바로 발목이 잡혀 멘탈이 나간 걸까.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 내가 낸 건지, 내 옆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판독기를 같이 들여다보던 수진이가 낸 건지.
판독기에 일반적인 생존자가 찍히면 찍힌 그대로의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체인질링이 판독기에 찍히면…….
지이잉.
잠시 후, 판독기가 사진을 출력했다. 본래 폴라로이드 사진기는 사진을 출력할 때 색상과 윤곽이 뭉그러져 있지만, 이건 곧장 선명한 사진으로 나왔다.
…역시.
“어, 어떻게 됐냐능?”
오타쿠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말을 안 할 뿐, 눈에서 광선이 나갈 듯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뽑혀 나온 사진을 검지와 중지로 잡고 필름에서 떼어 냈다. 손목을 꺾으며 뒤집고 출력된 사진을 모두에게 보여 주며, 무겁고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네요.”
사진.
거기 나온 것은 팔다리를 괴상한 자세로 뻗고 있는 형체였다. 욕쟁이 아저씨가 날뛰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찍은 사진이라 그런 것이다. 자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욕쟁이 아저씨가 취한 게 맞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니었다.
자세만 해도 괴상한데, 그 자세를 취한 형체는 더더욱 기괴했다. 창백한 피부와 도드라진 골격, 나팔꽃처럼 사방으로 열리는 아가리, 꽃의 수술처럼 세 갈래로 뻗어 꿈틀거리는 혓바닥까지. 크리처 영화에 나오면 제법 등장 분량을 쏠쏠하게 챙겨 갔을 법한 괴물이, 얇은 종이에 박제되어 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람의 자식이라 주장할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첫 학살 이후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체인질링의 진면목.
저게, 저 추악한 괴물이 욕쟁이 아저씨의 정체다.
나는 욕쟁이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어… 으어… 어어…….”
말할 능력을 잃은 것처럼 파편적인 언어만 중얼거리는 욕쟁이 아저씨.
사진을 본 사람들도 하나같이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벌리는 순간 끔찍한 비명이 나올 것을 예감했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람과 반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입을 쩍 벌리는 사람. 그저 충격적인 시선으로 사진과 욕쟁이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람까지.
하지만 누구도 선뜻 말문을 열진 못했다.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겠지.
판독기의 존재와 그 기능은 룰 북에도 첨부된 사항. 따라서 이 사진은 공신력이 보장된 결과물이다. 희생양의 눈물과 달리 이건 더 이상 얼버무리거나 변명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지긋지긋한 진실 게임을 끝낼 때가 됐다.
“이런 놀라운 본모습을 감추고 계셨군요. 아쉽지만 이제 그만…….”
“으아아아아!! 아니야!! 아니라고!! 저 새끼야! 난 저 새끼가 하라는 대로 한 잘못밖에 없어!!”
바로 투표 선언을 하려다가, 주춤했다.
혹시 어쩌면.
“하라는 대로 했다니요?”
진짜 의도를 감추며, 조심스레 묻는다.
전부터 그런 의혹을 품긴 했다.
이 성질머리 급한 아저씨가 혼자서 모든 공작을 도맡아 했을 리 없다는, 그런 의혹.
처음 타깃으로 나를 노리거나, 램펀트 스테이지에 도달하기 위해 일부러 어그로를 끄는 전략적인 움직임을, 이 아저씨가 생각했을 것 같진 않다.
브레인이 따로 있고 그로부터 모종의 수단을 통해 지시 사항을 전달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긴 했다.
“그렇게 시킨 게 누군데요?”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짐짓 평온한 음색을 꾸며냈다.
잘하면 일거양득의 성과를 거둘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어차피 다 틀렸다는 생각에 막무가내로 나간다면, 또 다른 체인질링을 식별할 기회가 생길지도.
“이 새끼야!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성가셔 보이니까 쟤부터 죽이고 가자고!”
욕쟁이 아저씨의 삿대질, 손가락의 연장선을 더듬어 가니 그 종점에 있는 인물이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뭐, 뭐?”
고급 양복 아저씨?
아저씨가 왜 거기서 나와……?
하지만 잘못 짚은 건 아닌 듯했다. 욕쟁이 아저씨는 고급 양복 아저씨를 바라보며 목청이 터질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나는, 나는 네놈 새끼가 시켜서 한 것뿐이야! 네놈 새끼가 다 나한테 떠넘겼잖아! 나도 이러기 싫었어! 갑자기 괴물로 변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할 짓거리가 아닌데, 그러지 않으면 나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했잖아!”
“당신, 미쳤어! 갑자기 왜 엄한 사람 붙들고 지랄 떠는 거야!”
뭐야, 뭐야,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혼란하다 혼란해.
고급 양복 아저씨가 다급하게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졸지에 물귀신 작전에 휘말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걸까.
“서, 설마 저런 미친 소리가 진짜라고 믿는 거 아니지? 아니, 아니죠?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나도 적금 붓고 보험 들고, 그렇게 사는 보통 사람이에요! 어디 저런 상종 못 할 작자하고 내가 엮이겠습니까?”
“개소리 집어치워!”
“안 되겠어! 투표합시다!”
고급 양복 아저씨가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생각인지 핸드폰을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욕쟁이 아저씨가 체인질링이라는 게 확정된 이상, 과반의 표를 받을 것은 틀림없다. 그나마 같은 편을 들어주던 오타쿠와 양아치 누님마저 배신감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으니.
자신에게 더 불리한 말을 하기 전에 제거하겠다는 그 생각은, 합리적이긴 한데.
내가 잘못 본 걸까? 고급 양복 아저씨는 분명 내가 뽑은 용의자 명단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모로 보나 욕쟁이 아저씨가 마지막까지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지목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 이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어쨌든 내 투표 기회는 아끼겠구나. 뜻밖의 큰 이득이라 여기는 순간,
깜박.
어둠이 드리웠다.
밤을 예고하는 사이렌도 뭣도 없이 갑자기.
그저 삽시간에.
어? 아직 시간이 남았…….
이거 설마.
“잠깐만! 이게 뭐야! 무슨 짓거리야!”
“바, 밤이 되기 전에 사이렌 울리는 거 아니었냐능?!”
“모두 소리 내지 마요! 얼른 흩어져요, 얼른!”
“야, 이서희! 너 어디, 흐엑.”
갑작스럽게 시작된 밤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나는 본능적으로 수진이의 손목을 잡고 뒷걸음질 쳤지만,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머릿속 나사가 빠진 것처럼 삐걱거린다. 이게 무슨 상황이더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더라?
생각해라. 떠올려라. 가장 먼저 확인할 게 있지 않나.
그거 있잖아 그거, 그그그그. 아, 그래.
욕쟁이 아저씨의 마지막 위치가 어디였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이 긴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림. 체인질링 특수 스킬, ‘이클립스’가 발동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효과로 ‘낮’이 2분의 1로 축소되며 전조 없는 ‘밤’이 도래합니다.]
[알림. 체인질링이 임무 수행에 성공했습니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 이번 밤은 램펀트 스테이지가 적용됩니다. 램펀트 스테이지에서는 두 명의 체인질링이 동시에 변신할 수 있습니다.]
아, 선생님 이건 좀.
이클립스에 램펀트 스테이지를 같이 쓰는 건 너무 선 넘은 거 아닌가?
아니었다.
“너 같은 새끼들은… 내일을 보고 살지.”
욕쟁이 아저씨의 음울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고막을 때렸다.
“내일을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허허, 아저씨가 아저씨를 보셨나 보네. 그렇게 유머로 마음을 달래려 해도 이번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려했던 상황이 죄다 현실로 나타났다. 결국, 욕쟁이 아저씨를 투표 단두대에 매달기 전에 밤이 찾아오고, 그걸로 모자라 램펀트 스테이지까지.
어쩌면 나는 점쟁이의 소양이 있을지도 모른다. 돗자리나 하나 펴볼까?
오늘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난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X 같은 건지… 내가 보여 줄게, 이 X새끼야!!”
크아아아아앍―!!
고함에서 괴성으로. 사람의 형상에서 괴물의 형상으로.
틀랄록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Night time : 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