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23화 (23/264)

23화

23. 생존자 6(1)

이제 익숙해진 정경이 생존자들을 맞이했다. 어둠이 걷히고 난 다음 보이는 핏빛과 시체.

현재까지 사망자 종합.

등산객 어르신과 아주머니, 오타쿠 남자.

여기에 양아치 누님까지. 위에 세 사람과 확연히 구별되는,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에 이르는 깊고 예리한 일격을 맞고 죽었다.

이에 따라 생존자 명단은 자동적으로 여섯 명으로 맞춰졌지만, 곧 그것도 줄어들 전망이었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니까! 아주 속이 후련하네 그냥, 더 죽이지 못한 게 제일 아쉬워!”

“…마지막으로 할 말이 그건가요?”

암살자 누님의 힐문에도 욕쟁이 아저씨, 아니다. 이제 정체가 완전히 탄로 났으니 3차 전직을 할 때가 왔다. 그 행적에 걸맞게 살인마 아저씨라 부르자, 부를 시간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살인마 아저씨는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추한 몰골로 웃어젖혔다. 그 얼굴과 틀랄록의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나는 비슷한 정도의 불쾌함을 느꼈다.

“아무렴 이거뿐일까! 갈 땐 가더라도 내 할 말 시원하게 하고 가야지!”

그 뒤로도 살인마 아저씨는 수많은 말을 쏟아 냈다. 모순적이고 양극화가 가속하는 사회구조와 이를 방치하고 방조하는 정부와 달라지지 않는 모든 병폐와 적폐에 대한 불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눈물겹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가, 기타 등등.

본인 주장에 따르면 자그마치 세 명을 죽인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모양이다.

말이 어찌나 빠르고 내용은 또 얼마나 다채롭던지, 쇼X더X니 같은 프로에 나와 쟁쟁한 래퍼들과 랩 배틀을 해도 꿀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흐음.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자마자 투표가 선언되었다. 선언자는 고급 양복 아저씨. 당연히 살인마 아저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표가 만장일치로 한 사람에게 향했다. 벌레 보는 듯한 경멸과 혐오감과 함께.

그러나 투표 결과를 뒤집을 여지가 전혀 없음에도, 살인마 아저씨는 자신의 표를 쓰지 않았다. 저 되지도 않는 헛소리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뿐.

물론 그 목적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고급 양복 아저씨가 각혈할 기세로 덤벼들었다.

“투표해, 이 인간아! 왜 투표 안 해! 또 시간 끌어? 어?!”

“흥, 누구 좋으라고? 꼭 평소에는 투표일에도 투표소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들이 말야. 너희같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몰상식한 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는 거 아냐!”

그렇다. 살인마 아저씨는 또 시간을 끌고 있었다. 대체 몇 번이야? 애국가도 아니고 같은 수법을 몇 번 우려먹는 건지 모르겠다.

최후의 최후까지 민폐를 끼치는 살인마 아저씨에게 이상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곱게 가는 게 어때요? 아니면 뭐,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 있지. 아주 많지!”

이렇게까지 떠들고도 남길 말이 많다고? 상상 이상으로 수다스러운 살인마 아저씨의 눈이 번들거린다. 물귀신의 눈이었다. 파멸을 눈앞에 둔 사람이 어떻게든 황천길 가는 길동무를 찾는 눈.

그 눈이 룰렛처럼 돌아갔다. 암살자 누님, 고급 양복 아저씨, 이상한 남자와 수진이를 건너 내가 있는 곳에서 멈췄다.

모든 종류의 확률 게임에서 변변찮은 승률을 자랑하는 나지만, 꼭 이런 건 잘 걸리더라.

아무래도 나를 목표로 삼은 게 확실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인마 아저씨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다들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주지, 나도 사람 죽이는 괴물이지만 저놈도 만만치 않은 놈이란 걸.”

그러면서 찌를 듯이 향하는 손가락. 고발의 손짓을 당한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진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마치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또 시답잖은 소리로 이간질하려고요? 아저씨, 그 정도 했으면 끝낼 때도 되지 않았어요?”

“흐, 흐흐. 끝내? 뭘 끝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 어린 것아. 너는 저놈의 실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구만? 아니, 저놈이 하고 다니는 짓거리를 알면 그렇게 같이 붙어 있는 것도 힘들 텐데 말이야.”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뒷자리도 아름다운 법이라는데, 이 아저씨는 그 반대 사례가 되기로 작정한 듯했다.

은근한 비밀을 털어놓듯 속삭이는 목소리와 뭔가에 홀린 양 희번덕이는 눈.

“내가 알려 주랴? 저놈이 한 짓을? 어린 것아, 이 어린 것아. 너도 저놈한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단물만 실컷 빨아먹고 쭉정이만 남으면 헌신짝처럼 버려지겠지. 그걸 왜 몰라 이것아.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야?”

수진이가 주춤했다. 복잡한 시선이 내게 향한다. 평소에 나를 보는 그것과 성질이 많이 다른 그 시선.

낯설다. 수진이가 나를 낯설게 보았고 나 또한 수진이의 그런 시선이 낯설었지만,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늦든 빠르든 밝혀질 것이라 여겼으니까.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식의 침묵 속에서 폭로가 시작됐다.

“저 새끼는 자기만 살기 위해 중요한 사실은 꽁꽁 감추고 여러 사람 희생시킨 놈이야.”

최초의 폭탄이 그렇게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직설적으로 떨어졌다.

미심쩍은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암살자 누님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경악하는 고급 양복 아저씨,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상한 남자까지.

수진이는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오직 살인마 아저씨만큼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내 민낯을 까발렸다.

남들 모르게 아이템을 얻고 그를 토대로 첫 번째 밤에 맺은 거래와 오타쿠 남자를 제물로 바쳐 살아남은 것. 내가 살기 위해 저지른 두 가지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졌고, 살인마 아저씨는 유세하는 정치인이 본받고 싶어 할 열정으로 남은 사람들을 선동했다.

“저 새끼가 안경잡이를 함정에 빠뜨려서 죽였어! 이것만큼은 추호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 이 새끼는 자기 살자고 뻔뻔하게 다른 사람 등 떠미는 인간이라고!”

당신은 짐승이었다. 나는 짐승의 습격에 반격한 것뿐이다. 나는 그리 반론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래, 내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지. 근데 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저 새끼도 괴물이나 다름없어!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했을 뿐이지만 저건 대체 뭐냐? 다들 조심하라고! 언제 어떻게 통수칠지 모르는 놈이니까!”

내 앞에 선 수진이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경직된 동작으로.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였다.

애절하리만치 부정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서희야, 아니지? 저거 다 거짓말이지?”

거울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 순간, 나는 어느 때보다 거울이 간절했다. 내 얼굴은, 특정 사람을 속일 때의 내 얼굴은 어설플 때가 많았다.

아, 찾았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더니. 희미하게 젖은 수진이의 눈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수진이의 눈을, 그 속에서 또 다른 거짓말을 준비하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수진이가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어라, 내가 빠른 출고 요청한 거짓말 3종 세트는 미국 갔나?

뭐야, 내 거짓말 돌려줘요.

하지만 나는 혀로 입술을 적시고 남은 진실을 마저 토해 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말한 거 다 사실이야. 내가 살려고 지식 감춘 것도 사실이고, 방패막이로 두 사람을 먼저 보낸 것도 사실이야.”

내가 폭로를 인정하자, 분위기는 또 한 번 급물살을 탔다. 뜻밖의 고백에 당황하는 사람들. 포복절도할 듯 웃어젖히는 살인마 아저씨. 이간질 계책이 제대로 먹혔음을 확신하는 모양이다.

“들었지? 저놈 스스로 인정하는 거 봤지? 거 봐, 내가 뭐라고…….”

“그리고 아저씨 덕분에 제가 생존자라는 게 100% 입증된 것도 사실이죠.”

그쯤 해서 주도권을 가져와야 했다.

살인마 아저씨의 목적은 분명했다. 우리 사이에 불신과 의심의 쐐기를 박아 넣어 협력과 연대를 가로막는 것.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수작에 놀아날 이유가 없다.

나는 좌중의 술렁이는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타박타박,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살인마 아저씨와 정면 방향에 섰다.

협소한 원을 그리듯 둘러선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퍼져 나가는 순간, 입을 열었다.

“저를 믿지 못할 인간이라 여겨도 좋아요. 하지만 지금 저만큼 이 게임에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당장 저 아저씨의 정체를 밝혀낸 것도 저잖아요?”

나는 조금씩 목소리의 톤을 높여가며 내 발언을 강조했다.

설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만큼이나 그것을 말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또렷한 발음, 자신감에 찬 몸짓에 좌우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어조로 일관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주눅 들은 어눌한 목소리나 태도는 얕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그 미묘한 중앙선을 지키며 발언을 이어갔다.

“저는 이미 용의자를 두 명까지 줄였어요. 저 아저씨 말에 휘둘리거나 동조해서 내 말을 반박하려거든, 일단 제 말이 끝난 다음에 해주시겠어요?”

가장 급한 사안으로 관심을 끄는 한편, 은근한 말장난으로 미리 반박을 차단해 둔다. 내 말을 반박하는 순간, 체인질링이라는 인상을 주게끔.

시도는 좋았다. 분열과 갈등을 일으켜 우리 모두를 의심암귀로 만들 셈이었겠지. 하지만 내 추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간파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을 뿐.

나는 금 간 유리를 아교로 이어 붙이듯, 성립할 수밖에 없는 유대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가 생존자라는 건 당연하죠. 제정신이면 같은 편의 정체를 들추어 내지 않았을 테니까.”

침묵의 긍정. 나는 내 편을 하나 더 끌어들였다.

“그리고 저랑 항상 함께 다닌 이쪽, 수진이. 만약 얘가 체인질링이었다면 제가 모를 리 없겠죠?”

확정 생존자가 보장하는 또 한 명의 생존자. 이 논리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다수결의 위대함을 실천하기 위한 벽돌이 올라갔다.

“거기에 저 고급 양복 아저씨는 처음부터 체인질링의 습격에서 도망치던 쪽이었죠. 즉, 저분도 생존자인 게 확실해요. 남은 건 두 사람.”

내 손가락이 좌우로 움직였다.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은 각각 눈을 가늘게 뜨는 암살자 누님과 묘한 미소를 짓는 이상한 남자.

고급 양복 아저씨가 얼씨구나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그렇지! 나는 결백하고말고! 어린 친구가 아주 똑똑하구만! 공부도 잘하고 그랬겠어!”

양아치 누님이 죽은 일로 내심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관계가 최악이었던,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올까 봐. 서둘러 투표를 개시해 살인마 아저씨를 배제하려 한 것도 그런 동기가 적지 않게 있었으리라. 얼른 결백을 입증하고 신원이 보장된 집단에 속하고 싶었겠지.

이걸 노렸다. 다섯 명이 뿔뿔이 갈라지는 대신, 3:2의 수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림 리퍼는 고급 양복 아저씨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양아치 누님을 죽였겠지만, 결과적으로 내 용의자 목록을 줄여 주었을 뿐.

상황이 완전히 내 흐름으로 넘어왔다.

기껏 내부 분열을 획책하려던 살인마 아저씨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한껏 빈정거려 주었다.

“고마워요, 아저씨의 맹활약 덕분에 살아나갈 가능성이 엄청나게 올라갔네요. 진심을 담아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