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7. 2nd game(3)
아직 겁에 질려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얌전히 쥐죽은 듯 숨어 있으라 말했다. 안전한 곳에 피해 있으라는 말을 못 한 이유는 지금, 이 병원에 안전한 곳 따위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 말을 이해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아직 열 명이 아닐 것이다.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지 않는 이 상황, 아직 열 명을 넘는다는 뜻이다.
아직은.
열 명에 포함되지 않을 사람들, 열 명이란 정원을 맞추기 위해 깎여 나갈 사람들이 남아 있다.
“…….”
깎여 나갈 불특정 다수에 내가 포함되진 않겠지.
생각도 못 한 일행이 된 이 녀석 역시.
“나머지 체인질링을 확인하러 나왔다고?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현재.
내 제안에 따라 병원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한 지 어언 5분.
임시 일행이 된 그는 통성명을 제안하며, 자신의 신상을 먼저 밝혔다.
“나는 권이세고 열일곱이고 금수저고 시카다 3301 회원이고 세계 가위바위보 협회(World RPS society)에서 주관한 대회 우승자야. 그쪽은?”
그리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몇몇 있어 적당히 흘려듣고, 필요한 것만 걸러냈다.
이놈의 이름이 권이세라는 사실과 편의점에서 주류와 담배를 사도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을 것 같은 외견과 달리 나와 동갑이라는 것.
그리고 쓸데없는 말이 많다는 것.
나도 내 이름을 비롯한 몇 가지를 간결하게 알려 주고, 그제야 우리는 굳게 손을 맞잡았다. 악수가 끝나고 오간 것은 또 다른 통성명이었다.
게임에서 어떤 아이디를 썼는가. 이는 상대가 얼마나 유명 인사인지 즉,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갖췄는지 알아가는 절차인 동시에, 은연중에 서열을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마이너한 게임인 데드 체이스다. 여기서 상위권 리그는 더더욱 풀이 좁다. 보던 얼굴만 지겹도록 보게 되는 그들만의 리그.
따라서 서로의 이름을 안다면 이는 거의 대등한 실력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쪽만 알고 다른 한쪽이 모른다면,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런 행위는 쓸데없는 자존심 겨루기나 내가 높네, 네가 낮네 하며 따지려 드는 소모적인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판단이 갈릴 경우, 더 우수한 역량을 가진 사람의 말에 따르는 것이 기본. 일종의 지휘체계 확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난 뜻밖의 이름을 들었다.
“세상에, 닉이 은신왕 클로킹이시라고?”
“내가 그런 사람이야, 알겠어?”
이 대목에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체인질링의 눈물, 다크 템플러, 보이지 않는 생존마 등의 별명을 가진 유명한 유저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내가 아는 은신왕 클로킹은, 숱한 괴담을 끌고 다니는 괴인이었다. 분명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어느새 한 명이 사라져 있더라…는 기본에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른 채 체인질링이 변신을 풀어버린 일이 있는가 하면, 하도 찾을 수가 없어서 체인질링이 다 이긴 게임을 나가버린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
감쪽같은 은신술로 스킬이나 아이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체인질링의 눈을 피해 가고, 추적에 특화된 스킬과 아이템으로 무장한 체인질링조차 끝내 숨바꼭질을 포기했다는 믿기 어려운 목격담까지.
이 외에도 특이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게임을 풀어나가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가장 명성이―체인질링은 한데 입을 모아 악명이라 하는― 자자한 것은 가히 변태적인 경지에 이른 은신술이다.
아이디를 미루어 볼 때, 극한의 컨셉질이라 봐야겠지.
나는 경의를 담아 말했다.
“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근데 그쪽은 아이디가 뭐였는데?”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대답을 정해 두진 않았다. 나는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말하기 좀 쪽팔린데.”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 만든 그 아이디는,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어린 날의 수치였다. 입 밖에 내는 것도, 타인에게 들려주는 것도 껄끄러운 일.
하지만 권이세는 쉽게 굽히지 않았다. 내 회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나 마나 이름도 모를 애송이라 생각한 건지, 재차 밀어붙인다.
“나도 말했는데 뭘, 얼른 까봐.”
조금 방향성 어긋난 오해지만, 상대가 계속 오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자존심 문제는 차치하고, 결정적인 순간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유사시에 다른 사람의 판단에 목숨을 걸게 될지도 모르는, 달갑지 않은 일.
그리하여, 나는 결코 내키지 않는 그 이름을 알려 주었다.
속닥속닥.
녀석이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마쳤다.
“미천한 놈이 진짜 귀한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내 만류에도 권이세는 거의 재림한 구세주를 본 신자처럼 넋이 나갔다. 당장 찬송가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할렐루야, 알렐루야. 이놈이 살아 있는 전설을 눈앞에 두고 하찮은 허명을 주워섬겼나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태양 앞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닌 격이니 이는…….”
“선생님, 그만합시다.”
“그래.”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지만, 이놈은 나와 비슷한 부류 같았다. 심각한 상황을 가볍게 받아들이기 위해 갖은 발악을 한다는 점에서. ‘남들이 나를 보면 이런 기분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어 자못 불쾌해진다. 앞으로 조크는 하루에 20번으로 줄이도록 하자.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진 다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피와 사이렌으로 붉게 물든 병원 복도와 어디도 열리지 않는 문. 창문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제법 오랜만에 봐도 좀처럼 정겨워지지 않는 내장 덩어리 같은 것이 치덕치덕 뒤엉킨 풍경만 가득했으니.
여기서 권이세를 만난 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일행이었다면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마당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아, 딱히 한 아무개 씨를 탓하려던 건 아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뭘까.”
걷는 도중 권이세가 뜬금없는 의문을 토로했다. 나는 네가 말하는 ‘이것’이 뭐냐고 되묻기 전, 사방에 들이대는 스턴 건 끝에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여차하면 방패를 써야겠지만, 비장의 패는 아껴 둘수록 이득이니까.
대답은 그다음이다.
“이거고 자시고 거기 발 조심해.”
“엇차, 땡큐.”
권이세가 걸려 넘어지길 바라는 듯 바닥에 널브러진 팔을 건너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방패가 있는 걸로 봐서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두 번째거든. 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성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게임이 갑자기 현실이 되는 게? 처음 겪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상태 창을 찾았다니까?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로 이 꼴이 났다고.”
“으음, 그러네.”
목소리 낮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여봐란 듯 떠들어 대는 것은 자신감의 발로였다. 무적의 창과 무적의 방패가 팀을 꾸렸으니 누가 덤비랴. 덤빌 테면 덤벼 보시라, 대충 이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대화가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팽팽하다 못해 끊어질 것 같았던 신경이 느슨해지며 그 여백으로 잡념이 끼어들었다.
…두 번째 게임이라, 이상하긴 하다.
하루에 적게는 일고여덟 판, 많게는 수십 판씩 돌리기도 했지만, 현실 버전인 주제에 로테이션이 너무 빨리 돌아오지 않았나. 고작 한 달 남짓한 휴식만 주고 바로 다음 게임에 투입시키다니, 뭐가 그리 급해서 애간장이 탔을까.
눈깔 괴물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당신은 내가 확보한 수많은 표본 가운데 심도 있게 눈여겨본, 극히 소수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만큼 내게 거는 기대가 크시다는 거지!’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게 떠올랐다. 먼 과거부터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준 높은 게임을 보여 주리라는, 그런 기대가 아닐지.
보통 이런 과분한 기대가 걸리면 오기가 나서라도 배신해주고 싶은데, 환경이 녹록지 않다. 실망스러운 게임 진행을 하면 당장 내 목숨이 위태로운 판국이다. 굳이 눈깔 괴물이 나서지 않아도 그 하수인이 기꺼이 궂은일 도맡아 하겠지.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데드 체이스는 근본적으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날아가는 게임이다. 그리고 이 게임에 100% 살아남는 법 따위는 없다. 이는 아무리 경험을 쌓고 아는 것이 많다 해도 마찬가지.
당장 첫 번째 게임만 복기해 봐도 그렇지 않나. 방심하거나, 방심하지 않더라도 운이 나쁘면 한순간에 골로 가는 것이 이 게임의 무서운 점이니까.
그러던 중 문득 나도 궁금해졌다.
“넌 처음 시작이 어디였는데?”
“나? 난 우리 집.”
“어디?”
“우리 집이라니까? 마이 홈.”
“…….”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그간 접한 뉴스로 확인한바, 데드 체이스가 현실로 나타날 때는 언제나 일정 크기 이상의 폐쇄된 장소가 선별되었다. 내가 있었던 지하철이 그랬고 모 학교가 그랬고, 어느 아파트가 그랬고. 조금 유별난 케이스로 항공기까지 있었지만, 앞서 말한 규칙에서 벗어난 사례는 없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할 때,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권이세가 집이라는 개념을 대단히 포괄적인 범위로 확장해 있거나―예컨대, 하늘을 지붕 삼아 운운하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거나, 정말 입이 떡 벌어질 크기의 대저택에 사는 경우다.
하지만 권이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어땠는지 몰라도 내 첫 게임에서 죽은 놈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었어. 요새 우리 꼰대가 하는 사업이 맘에 안 들었는지, 사용인들 사이에 날 납치하려고 온 시건방진 새끼들이 끼어 들어가 있었지. 내가 탁탁! 해서 척척! 하니까 다 끝나버렸지 뭐야.”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대체 무슨 싸움을 해온 걸까?
내 얼굴이 여간 황당해 보였는지 권이세가 덧붙였다.
“뉴스에 안 나왔다고 뭐라 그러진 마. 우리 꼰대가 한 가닥 하는 사람이라서, 언론입네 하는 활자 싸개 놈들한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구나.”
반쯤 의무적인 맞장구를 쳤다. 이미 내 안에서 권이세는 ‘과대망상 의심됨’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슬슬 ‘취급에 주의해야 할지도?’ 꼬리표를 붙일까 말까 고민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권이세는 내 태도가 맘에 안 드는 듯 혀를 찼다.
“아직도 못 믿는 거지? 배은망덕하긴. 너 같은 생존자들한테 병원비 내준 사람이 누군데.”
“어? 진짜?”
이번 것은 컸다. 목뼈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고개를 홱 돌리자, 거만한 얼굴의 권이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사정사정해서 꼰대한테 부탁했지, 너희에 대해 궁금했거든. 어떤 인간들을 만났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따로 불러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어.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거기에 네가 그 유명한 페이…….”
“뭐시기일 줄은 몰랐다?”
“그렇지.”
간발의 차였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 입에서 내 게임 아이디가 튀어나오는 대참사를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마음씨 착한 키다리 아저씨―아저씨가 아닌가?―라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는 것이다.
“뭐, 어쨌든.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러게.”
권이세가 운을 떼고,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방금까지 주거니 받거니 떠들던 대화도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되돌아온 침묵.
사이렌은 멈추지 않았고, 그에 따라 너울대는 그림자는 크고 작아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 징후는 결핍으로서 명백했다.
“…다른 놈이 안 보이는데?”
“비명도 아까부터 안 들렸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까 만난 게 몇 명이었지?”
“대여섯 명.”
“오는 길에 사람 없었지?”
“그랬지.”
“여섯 명이라 치고, 너랑 나 더하면 여덟. 뱀파이어를 더하면 아홉. …아호오옵? 아호오오옵이라고?”
아홉이란 단어를 해괴한 외국어 발음하듯 중얼거리는 권이세.
참고로 9는 가장 작은 홀수 합성수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한 명 빈다는 것이다.
나와 권이세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마주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병원은 복도만 놓고 봤을 때, 가로변이 긴 직사각형 꼴이었다. 눈깔 괴물이 다중이용 업소의 안전 관리에 대한 특별법 시행 규칙을 존중할 생각이 없는 건지 나가는 문은 윗변에 해당하는 복도 중앙에 하나만 있는 구조. 고작 십몇 분 전에 뱀파이어를 제압한 곳도 바로 그쪽이었고.
그리고 우리는 그 직사각형을 거의 다 돌았다. 이제 저 너머 모퉁이만 돌면, 최초에 뱀파이어를 마주했던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때까지 다른 체인질링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뭐지?
시작부터 방패와 스턴 건을 갖고 체인질링을 혼내 줄 생각 만만인 생존마 듀오한테 식겁해 탈주했다는 가설, 나머지 체인질링이 신들린 거리 조절로 일정 거리를 상시 유지해, 항상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우리의 눈을 피해 갔다는 가설, 게임이 시작되며 병원 구조가 기괴하게 뒤틀렸다는 가설까지.
마지막을 제외하면 그리 설득력이 없다. 병원 구조가 내 기억과 달라진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여러 사례를 검토했을 때, 에를쾨니히가 게임의 ‘맵’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배배 꼬아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이 첫 번째 케이스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권이세는 쾌활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했다.
“별거 있겠어? 없으면 없는 대로 좋잖아. 일단 끝까지 가보고, 별일 없으면 뱀파이어가 정신 차리기 전에 자리나 지키고 있자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놈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걸 확인할 수도 있어, 그러면 곧장 방출하는 거지.”
“글쎄.”
의미 없는,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단어로 말끝을 흐릴 때였다.
달칵―
여섯 걸음 너머, 화장실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반투명한 유리문에 가려 흐릿한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거, 거, 거기 누, 누, 구 이, 있어요?”
빼꼼 고개를 내미는 사람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