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76화 (76/264)

76화

76. 건곤일척(乾坤一擲)(2)

“아아아아아! 독사의 자식아! 죽어도 영원히 지옥 불에 불타오를 악마야!!”

최단 거리로 스테이지 이동을 마친 광신도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떨어질 때의 충격과 바이스 트랩이 다리를 지근지근 짓씹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고통이 정신을 갉아먹을 테지. 그래서 그런지 나를 향한 욕설도 조악했다. 실린 감정의 3할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그나저나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내가 좀 그런 인간이긴 하지만, 그쪽도 딱히 죽어서 천국에 올라갈 관상은 아닌데.

나는 맨홀 뚜껑처럼 열린 워프 홀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광신도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바이스 트랩의 아가리를 벌리려 낑낑대고 있다. 다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이래서 말 많은 악당은 안 된다니까, 하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섣부른 승리 선언만큼 승리에 독이 되는 클리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나였으면 이래저래 나불대기 전에 자기 위치가 어딘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조심성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 정도 조심성만 있었으면 아차, 하며 몇 걸음 옮겼을 터. 상대에게 에어젯 글러브가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바이스 트랩과 일직선상에 있다? 이건 뇌 빼고 다닌다는 것과 동음이의어다. 아무리 쿨타임을 완벽하게 계산했더라도, 그 쿨타임을 줄이는 스킬까지 있는 마당에.

“거기서 오붓한 시간 좀 가지시고… 이따가 다시 보죠.”

아디오스. 나는 ET에게서 배운 외계 인사법으로 정중한 작별 인사를 보냈다.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약지와 소지를 다시 붙여서 손을 펼치는 인사법. 전해 들은 바로, 장수와 번영을 기원한다는 뜻이었나. 번영은 몰라도 장수 쪽은 확실히 기원했다.

에를쾨니히의 배 속에서, 오래오래 살아갔으면 좋겠다.

타인에게만 예의를 강요하고 저 스스로는 예의를 모르는 광신도는 답사를 돌려주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걸로 한 턴 벌었다. 바이스 트랩에 붙잡힌 이상, 광신도가 설령 제자리높이뛰기 세계 챔피언이었던 경력이 있다 해도 천장에 뚫린 워프 홀로 다시 기어오를 순 없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바이스 트랩을 해체하고 나면 이미 워프 홀의 지속 시간이 끝나 닫혀 있을 테고.

그러나 방심하기엔 이르다.

우우우우웅―

내 생각을 긍정하듯, 다음 밤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낮도 밤도 아닌 1분. 세상이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이며 보는 것 같은 광경. 그러면서, 점차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전부 연기였던 거예요?”

황보라가 실수로라도 워프 홀 근처에 있지 않도록 몸을 내빼며 말했다. 가까이 가면 저게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아래층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하듯,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았죠?”

최소한 골든 라즈베리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자평했다. 황보라는 무의식중에 그러듯 끄덕거리다가, 황급히 물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저기 저렇게 있으면 움직이기도, 우리를 쫓기도 어려울 텐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체인질링이 변신하면 트랩 해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요. 이제까지 낑낑거린 시간도 있으니 변신만 하면 푸는 건 금방이겠죠.”

“무슨 소리야. 놈이 제 꾀에 넘어간 꼴로 굳건한 쇠창살을 썼잖아. 각 스테이지가 격리됐는데. 워프 홀이 닫히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 없는 거 아냐?”

이번엔 권이세였다. 나는 앞으로 은신왕 어쩌고 하는 닉네임을 쓰는 놈이 있다면 무조건 믿고 걸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여유작작하더니, 여러 긴박한 상황에 판단력이 마비된 건지, 도통 쓸모 있는 말을 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확실히 광신도가 제 꾀에 넘어간 건 사실이다. 말은 격에 맞는 대우를 하니 어쩌니 하면서 겁쟁이 짓을 한 것. 내 도발로 말미암아 과도한 경계를 품은 나머지, 상황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스킬 난사를 퍼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굳건한 쇠창살’을 사용한 것이 컸다. 만약 그 스킬이 아니었다면, 역전의 발판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

하지만 멍청아. 아까 방송도 못 들었냐. 지속 시간이 15분에 불과한 레벨 1짜리 ‘굳건한 쇠창살’이었는데. 스킬 레벨이 높아 거의 ‘밤’이 이어지는 내내 지속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입도 아프고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간결하게 말했다.

“15분이었어. 밤은 30분이고.”

“아.”

광신도의 스킬 발동 시점은 어림잡아 5~6분쯤 전이었다. 즉, 실질적으로 스테이지 이동이 차단되는 시간은 10분 남짓으로 봐야 했다.

10분 동안은 안전하다 치자, 나머지 20분은?

그 시간이면 제스터가 트랩을 해체하고 다시 6층으로 뛰어 올라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산 채로 회 치고 고추냉이까지 곁들여 먹기에 충분했다. 모든 자원을 소모한 지금, 우리는 더없이 취약한 상태니까.

하여튼 이래서 뉴비들이란. 나는 이 시의적절하지 않은 스킬 활용법을 통해 광신도의 게임 이해도가 현저하게 낮다는 걸 간파했다. 생존자의 활동을 확실히 제약하려면 밤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스킬을 써야 하는 것도 모르지 않나. 녀석이 데드 체이스의 상식선에서 행동했다면, 발이 묶이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을 것인데.

멍청한 게 오히려 이득으로 돌아오다니. 초심자의 행운이라 봐야겠지만, 내게는 달갑지 않았다.

비생산적인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어둠이 완연해졌다. 바닥에 설치된 워프 홀도 조금씩 작아지며 촛불이 꺼지는 모습으로 사라졌다.

광신도의 발이 묶인 와중에도 쉬고 있을 틈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내 두어야 한다. 나는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손보기로 했다.

“슬기야.”

“응.”

“혹시 변신 스택 남아 있어?”

슬기에게 변신 스택이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체크메이트다. 램펀트 스테이지는 지나갔고, 이제 한 번의 밤에 두 체인질링이 동시에 변신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슬기가 조금이라도 일찍 변신한다면, 광신도는 아무리 스택을 많이 쌓아 뒀어도 변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시간상 어려운 일도 아닐 터. 지난밤에 변신 스택을 소모하고, ‘대담한 살인자’를 쓰는 와중에 또 변신 스택을 소모한 광신도는 다시 변신 스택을 얻기 위해 표식을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목사를 인간 선인장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세 개의 표식이 추가로 오염되었겠지만, 그런다고 표식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한쪽 다리가 작살난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고, 슬기에게 변신 기회를 빼앗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녀석은 다음 낮까지 초 단위로 줄어드는 자기 여명이나 헤아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슬기가 감염 이후,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면 다시 생존자로 돌아올 기회가 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죽어 마땅한 사람만 얌전히 퇴출당하는 아름다운 결말. 슬기에게 이번 밤에 쓸 스택이 있다면, 그 모든 해피 엔딩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하던 슬기는, 이내 천천히 부정했다.

“아니. 없어.”

“왜? 이번이… 네 번째 밤인데.”

뱀파이어의 변신 조건은 짝수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니 변신 스택이 주어져야 정상인데.

슬기가 거듭 도리질 쳤다.

“저번 낮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빌려온 시계인지 하는 걸 줬어. 이왕 같은 편이 되었으니 변신해서 아무나 한 명 죽여 달라고 그러면서.”

아무래도 ‘빌려온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아무런 제한 없이 즉각 변신 스택을 부여하는 ‘은혜로운 은총’과 달리, 일종의 외상 개념으로 변신 스택을 획득하는 스킬. 그러고 보니 슬기가 지난밤에 어떻게 변신 스택을 얻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했던 거였나. 정작 슬기는 그걸로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리는 쪽으로 썼지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데드 체이스를 안 해봤을 슬기가 ‘빌려온 시간’에 근접한 키워드를 스스로 떠올리긴 어려울 테니까.

“난 아직도 못 믿겠는데.”

권이세는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짙은 어둠에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다그쳤다.

“아까 투표 결과를 봐. 같은 체인질링이라서 감싸 준 거 아니냐고?”

당연한 의심이긴 했다. 광신도에게 정말 ‘정치 9단’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나는 슬기를 감쌌다.

“그만해, 슬기가 진짜 이길 생각이었으면 날 살리지도 않았을 거야. 투표전 같은 번거로운 방법보다 그편이 더 확실하니까.”

“또 모르지. 생존자들을 희망 고문할수록 점수를 많이 받으니까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갔을지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언뜻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꼭 지금 말해서 내부 분열을 가중시킬 필요도 없지 않나.

“당장 급한 건 그게 아니잖아. 일단 저 사람부터 구하자.”

가리킨 것은 토이 박스와, 그 안에 갇혀 제스터의 변신 스택을 생산하는 연료로 전락한 목사였다. 슬슬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다. 게임 내에선 박스에 갇혔다고 금방 죽지 않지만, 피와 살을 가진 현실의 인간이 세 번이나 칼에 찔리고도 오래 버틸 거라 낙관할 수 없었다.

권이세는 슬기가 은밀히 감춘 흑심에 대해 더 말하고 싶었던 듯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시 우선순위를 고민하던 권이세는, 곧 이쪽 일이 더 급한 일임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이대로 놔두다간 죽겠군. 2분의 1인데 이거.”

권이세가 망설이며 말한 것은 토이 박스의 남은 구멍을 뜻한다. 총 다섯 개의 구멍 중 세 개가 쓰였으니, 남은 건 두 개. 그중 하나는 목사를 탈출시킬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확실한 죽음을 안길 것이었다.

광신도가 왜 세 개의 칼에서 멈췄는지 알 만하다. 혹시라도 50%의 도박에 실패하여, 목사가 풀려나 투표에 관여할 것을 우려했겠지.

권이세가 골머리를 싸매는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자칫 실수하면, 멀쩡한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 나는 본심을 감추고 말했다.

“1초가 급하니까 일단 시도해 보자. 잘 안 되면, 운이 나빴겠거니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운이 나쁜 경우는 없다.

살리면 살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유용했다. 전자의 경우, 돌아올 낮에 ‘정치 9단’을 활용하여 투표전에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는 자신을 고문한 광신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표를 행사할 터.

후자의 경우 역시 어차피 제스터가 방출을 막기 위해, 일부러 살려 두는 것이라면 여기서 죽어 줘도 나쁘지 않다. 만에 하나 체인질링인 슬기가 딴 맘을 먹더라도 3:2의 구도를 뒤집을 순 없을 테니까. 설령 광신도에게 ‘불성실한 시민’이 있다 해도 쿨타임이 도는 와중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목사가 살아나왔으면 싶긴 했다. 생각해 보니 또 다른 활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살육의 밤을 안전하게 보낼 미끼로. 나도 그렇지만, 저쪽도 만만치 않게 몸이 망가졌으니까. 방패막이로 내세우는데 저항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걸 설득의 명분으로 삼지 않는 건, 아무 대안도 없이 도덕적인 반발감으로 거부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깊은 생각이 어려울 때,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굴복하는 습성이 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에 이롭다.

…문득 구역질이 났다. 이런 계산을 반사적으로 해치워버리는 내게. 정말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갉아먹으면서 생존에 집착하는 내게.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나와 가까운 죽음이 두렵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런 곳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한다면.

나 때문에 죽은 부모님은 대체 뭐가 되나.

이 비루한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그분들을 생각하면, 내 목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형태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살아나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서 또 한 번, 타인의 삶을 내 삶의 자양분으로 갈아 넣기로 결심했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어차피 반반인데.”

“…이게 동전 뒤집기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냐.”

답답하긴. 이 시점에서 권이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나로서는 이 판단도 결심도 느린 답답이가 어떻게 첫 번째 게임에서 살아나왔는지 의문이다. 설마 체인질링에게 뇌물이라도 찔러 넣어 준 건가?

“비켜.”

정상이 아닌 몸이었지만, 망설이던 권이세를 밀쳐내는 건 가능했다. 종이 인형처럼 쉽사리 밀쳐지는 녀석을 보며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순간적인 안도를 드러냈으니까.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더러운 일을 하겠다고 자진하는 것을 기다린 것처럼.

나는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며 토이 박스의 구성품인 기다란 장검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를 축으로 한 바퀴 빙글 돌려 역수로 잡았다. 이제 비어 있는 구멍을 찾아야 한다. 토이 박스 주변을 손으로 더듬으며 찾았다.

오른쪽과 왼쪽.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한쪽을 골라,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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