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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79화 (79/264)

79화

79. 건곤일척(乾坤一擲)(5)

[끄아아아아아!!]

먼 듯, 가까운 곳에서 울린 괴성.

그 괴성이 공기를 차갑게 식혔다.

권이세 무리가 있는 방향. 나는 제스터가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1차 방어선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 엿같은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에,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상대방이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는 것. 그간 잊고 살았던 재미였다.

“저쪽으로 움직였나 본데… 좋아. 슬기야, 이쪽으로 와.”

“이쪽?”

“어. 너부터 가야 해.”

나는 여러 겹으로 울리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동쪽 복도를 경유하여 남쪽 복도, 서쪽 복도로 도는 세 사람. 그 뒤를 쫓는 하나는 체인질링일 테고.

남은 거리를 가늠하다가, 가까운 벽에 워프 홀을 발동했다. 최초의 워프 홀 생성 시점부터 쿨타임이 도는 특성상, 이번 턴에도 활용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자, 드가자.”

슬기가 먼저 워프 홀을 통과했다. 그 뒤를 따라 나도 워프 홀에 몸을 던졌다. 앞을 향한 전진이 위로 솟구치게 되는 기묘한 경험.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에 혼동이 일었다. 중력의 무게가 나를 끌어당기기 직전, 슬기가 늦지 않게 잡아 주었다.

도착한 곳은 동쪽 복도였다. 본래 권이세 팀이 있던 곳, 나는 슬기에게 주의를 주었다.

“슬기야, 발 디딜 때 조심해. 주변에 남은 별침이 있을지도 몰라.”

“으응.”

내 조언을 듣고 발 딛음을 조심하는 슬기.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정면’을 확인했다. 처음 워프 홀을 설치한 장소가 이쯤이었으니까… 이쯤인가?

손에 걸리는 감촉, 북쪽 복도로 이어지는 모퉁이였다. 이 부분이 가장 큰 난관이었는데, 생각보다 순조롭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거듭한 덕분이다.

방향을 확인한 나는 슬기를 재촉했다.

“우리끼리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가 있자, 이쪽으로 가면 돼.”

“다른 사람들은?”

“금방 따라붙을 거야. 제스터가 덫을 밟았으니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

머뭇거리던 슬기가 나를 부축하며 이끌었다.

별침. 일정 구간에 둔화 효과를 부여하고 구간이 끝나고 나서도 일정 시간 둔화가 유지되는 아이템. 본래 촘촘하고 넓게 흩뿌려져 있던 그것을, 멀쩡한 사람들의 손을 빌려 손에 잡히는 대로 회수하고 재배치했다. 나와 슬기가 있던 곳, 그리고 권이세 팀이 있던 곳에 분산해서.

분산 배치하는 와중에 면적과 밀도가 감소했지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제스터가 처음 6층에 도착하고, 갈등에 빠질 것은 예상한 바다. 왼쪽과 오른쪽의 갈림길. 둘 중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사실 녀석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나는 제스터가 어느 쪽으로 오든 함정에 빠지도록 치밀하게 설계하고 안배해 두었다.

왼쪽은 대기실에서 끌고 온 의자와 별침 세트, 오른쪽은 모퉁이 너머에 숨긴 워프 홀과 그 뒤에 깔아 둔 별침 세트가 있었다. 머리 두 개를 가진 독사처럼, 제스터에겐 처음부터 별침을 밟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자칫하면 제스터를 추적을 지연시키려 설치한 별침을 우리가 밟을 수도 있었다.

마침 내게 워프 홀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 덕에 도주로 방향에 깔린 별침을 피하기 좋은 탈출구를 팔 수 있었다.

청각에 의존한 거리 추산이지만 권이세 팀이 오기 전까지 워프 홀은 충분히 버티리라. 제스터 역시 그 뒤를 따를 테지만 발바닥에 구멍 숭숭 뚫린 상태에서는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을 터.

이쪽도 부상자를 달고 있으니 간신히 균형을 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스터의 추적 속도는 정상 궤도를 되찾아가겠지만.

당장은 이걸로 충분하다.

슬기의 도움을 받아 산책하는 비숑과 자웅을 겨룰 수준으로 이동하는 중에 시간을 확인했다.

…밤이 시작되고 3분 35초, 예정된 시간 계획표에 따르면 여기서 1분 25초쯤 더 버텨 줘야 하는데. 자잘한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야 마법의 지도 효율을 극한까지 뽑아먹을 수 있는데. 체인질링의 변신 시간 내내,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그 위치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 아쉬움은 변수를 줄이고 싶은 강박적인 집착이 원인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마법의 지도가 10분이나 필요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왔다 왔다 왔다!”

어절 간에 간격이 없어 ‘다왓다왓다왓’으로 들리기도 하는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후발대로 워프 홀을 타고 온 권이세 팀이 빙상 낚시의 빙어 같은 기세로 바닥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빠져나온 직후의 행동이 효율적이지 못했다. 어둠에 가린 시야와 워프 홀을 통한 이동의 상승 작용으로 방향 감각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모습. 저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예행연습도 하지 않은 건가?

짧은 순간, 아주 짧은 순간, 고민했다. 어쩌면 더 쉽고 간편한 길이 있지 않을지.

누구 한 명 죽게 내버려 두면, 이번 밤은 안전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인생 경험이 길지 않은 나도, 쉽고 간편한 길은 늘 걸림돌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타지 말고 이쪽으로 와!”

소리로 방향을 알려 주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려던 세 사람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반쯤은 무의식이 시킨 대로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기껏 방향을 알려 줘도 마음만 급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엎어지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차례차례 슬랩스틱 코미디라도 하는 건지.

그 낭비 많은 움직임이 간격을 줄였다. 그들 후방의 어둠으로부터, 희끄무레한 형상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워프 홀의 가장자리를 짚고 거미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이 스스로 소리를 내기 전까지, 모든 움직임에 소리가 없었다.

[이 가증스러운 쥐새끼들, 잘도 이런 더러운 함정을 팠구나!]

“저리 꺼져 발 병신 새끼야!”

“꺄아아악!”

“하, 하, 하느님, 아, 버지. 제, 제가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따르오며…….”

뛰는 듯 기는 듯 합류하는 세 사람과 절뚝거리며 쫓아오는 제스터.

벌려야 할 거리가 생각보다 줄었다. 처음부터 시간에 쫓기는 와중에 임기응변식으로 짜낸 계획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빈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 파탄 지경에 이르진 않았으나, 그것도 얼마나 갈지.

[이히히히힝!]

제스터의 단검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동작. 그 어금니가 목줄기를 찢기 직전, 소발에 쥐 밟는 듯한 우연으로 목표를 놓쳤다.

간발의 차로 쫙 튀는 핏방울. 어깻죽지를 칼끝에 베인 권이세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고, 쓰러지다시피 하며 황보라와 목사를 내 쪽으로 떠밀었다.

“데려가!”

칼에 베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챙기는 정신이 갸륵하긴 했다. 그러나 이쪽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요구였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슬기도 나를 부축하느라 여력이 없는데 누가 누굴 챙겨?

별수 없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자기 한 몸 알아서 건사할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게다가 아직 때가 아니다.

“계단으로! 계단으로 와요!”

먼저 이동할 수 있었음에도 합류를 기다려 준 시간, 목청 높여 방향 지시를 지속한 것은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의 도움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내려가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제스터가 어기적거리는 품새로 권이세를 붙잡았다. 가학심과 살의에 찌들어 육식 동물처럼 기묘한 안광을 흩날리는 눈동자. 번쩍 단검 든 손을 치켜들었다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네.]

그러고는 권이세를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밀쳐낸다. 재차 돌아간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 행동과 시선으로 분명해졌다.

놈이 노리는 것은 목사다. ‘정치 9단’을 가진 자를 수중에 넣어, 다음 낮에 있을 투표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 사람의 도주 여건을 보장하려 한 이유다.

제스터에게 스킬의 쿨타임을 줄이는 스킬 ‘시계태엽 되감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지난밤에 방패를 빼앗겼던 기억에서 비롯된 추측이다. 재사용 대기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하는 대신, 다음 재사용 시간을 두 배로 증가시키는 스킬.

그걸 통해 ‘대도의 손길’의 쿨타임을 줄였다면, 갖고 있을지도 모를 ‘불성실한 시민’의 쿨타임도 돌아올 거라 봐야 옳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1초를 다투는 그 순간까지 제스터를 몰아붙여야 한다. 내가 세운 모든 계획의 초점은 그에 맞춰져 있다.

“가긴 어딜 가, 이 새끼야!”

내겐 다소 의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억센 힘에 바닥을 뒹굴던 권이세가 제스터의 발목을 잡아챈 것. 그런다고 추적을 막을 순 없었지만, 인상 찡그린 제스터가 무자비하게 복부를 걷어차는 걸로 또 한 번 시간을 벌었다. 단 일격에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무력화되는 권이세.

그 행동의 배경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랬지? 제스터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서, 절대 죽을 리 없다는 확신을 얻고 한 행동인가? 아니면 무의식중에 우러난 희생정신?

권이세의 판단력 점수에 1점 추가하는 건, 나중에 정확한 동기를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내려가요!”

선두에 나와 슬기가, 그 뒤로 황보라와 목사가 우당탕탕 계단을 주파했다. 가뜩이나 몸 상태가 영 아닌데 승차감 더러운 차를 탈 때처럼 정신없이 흔들리니 죽을 맛이었다. 오장육부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견디며 계단을 다 내려간 끝에, 녹초가 되어 쓰러지려는 나를 슬기가 잡아 세웠다.

“괜찮아?”

“으, 응. 그, 지금, 시간, 좀.”

여기저기 한계에 달해 마치 웃는 것 같은 과호흡에 빠져,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 헷갈리는데, 슬기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4분 33초 지났어.”

“그, 래?”

존 케이지 선생이 저작권을 주장하면 어쩌나, 싶은 것도 잠시였다. 호흡을 고르고 핸드폰을 꺼내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현재의 최선을 다해 서둘렀다.

[특전, 마법의 지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해요.”

내 말은 한 점의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제스터가 토이 박스를 제작할 시간도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잡히는 인간은 그게 누구든 그대로 변사체로 만들어 놓을 테니.

따라서 5층에서 계획한 2차 방어선의 요체는, 순수 육체의 성능을 극한으로 시험하는 술래잡기였다. 직사각형 복도를 체인질링의 변신이 끝날 때까지 무한정 뺑뺑이 도는 것,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계를 오가는 전력 질주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둘이나 있지만 어쩌겠나.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정말 죽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러니.

[이히히히힛!]

“뛰어요!”

목을 쥐어짜는 출발 신호에 곧바로 반응하는 사람들. 슬기가 나를, 황보라가 목사를 끼고 필사적인 도주극을 감행했다.

이번엔 두 방향으로 갈라지지도 않았다. 술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드러내는 특전이 있으니, 그를 믿고 의사소통의 딜레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함이다.

설명은 그렇게 했다.

고작 14초나 지났을까, 5층에 도착한 제스터가 등 뒤에서 떠들었다.

[그래, 도망쳐!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란 말이야! 달아나지 않으면 쫓는 즐거움도 없지!]

체인질링이 광기를 여실히 표출하며 웃는다. 조금씩 상처를 입히면서 점점 더 어려운 길로 몰아, 절망에 지쳐 자포자기 주저앉은 사냥감의 단말마를 들으며 숨통을 끊는 쾌락에 마약처럼 중독된 괴물.

[삶은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해. 그 가치는 죽는 방식에 의해 정해지지. 너희의 무가치한 삶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바꿔 줄게.]

‘내 삶이 죽음보다 가취 있기를.’ 주절거리는 헛소리를 흘려들으며 위치를 확인했다. 일정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붉은색 광점. 아직 괜찮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제스터가 무슨 이유로 저렇게 떠들고 있는 건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서 저러는 걸까?

[도망쳐 봐, 끝까지 도망쳐 보라고! 그런데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다 알아, 어떻게 아냐고? 그냥 아는 거야!]

문득 깨달았다.

소리는 앞에서 들리는데.

마법의 지도가 표시하는 붉은 광점은 뒤에서 따라붙고 있다.

이상함을 눈치챈 황보라가 덜컥 발을 멈추려 했다.

“잠깐만요! 이 방향으로 가는 거 맞아요?!”

“멈추지 마!”

“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자기 위치를 노출하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어떤 이득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히히히힛!]

“멈추지 마! 계속 달려!”

다급한 나머지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차차 분명한 확신이 생겼다.

보이스 레코더. 사운드 플레이를 이용한 기만에 종종 쓰이는 아이템이다. 알리바이 꾸며 내기나, 청각을 교란하여 체인질링을 따돌릴 수도 있지만, 그게 이런 상황에서 체인질링 손에 있다면.

“속임수라고!”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한 트릭이지만, 하마터면 걸려들 뻔했다. 황보라의 순간적인 주저로 제스터는 거리를 더 좁혔다. 정신 나간 듯 떠들어 대는 소리의 갈피에 발끝만 세워 뛰는 듯한 은밀한 질주가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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