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90화 (90/264)

90화

90. 새옹지마(塞翁之馬)(9)

내 말을 듣고 권이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참 형편 좋을 때만 발휘하는 협력 체제군.”

배반과 협력. 게임 이론에서의 두 가지 선택지. 권이세는 그중 후자를 입에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물론, 나를 비난하는 것.

다른 사람은 알 바 아니냐고. 너의 그 협력이 다른 사람에게는 배반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노라고. 권이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선택과 집중이라고 해줘.”

“그놈의 해줘는.”

권이세가 투덜거리더니 몸을 뒤척였다. 이 대화에서 어떤 감명을 받은 건지 몰라도, 대뜸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거 가져가라.”

“응?”

자석의 인력 탓에 권이세는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런 불편한 움직임으로 건네는 것이 손전등이었다. 나는 그것을 무심코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했다.

이걸 왜 주지? 상식적으로, 표식의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뜻 같지만, 그런 호의를 보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일방적으로 협박을 해댄 사람을 돕다니. 스톡홀름 증후군의 한 형태인가?

어쩌면 함정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 미심쩍은 눈길을 느낀 건지 권이세가 부연했다.

“어두워서 뭐 하나 제대로 보이겠나. 그걸로 비추면서 찾아보라고. 네 말대로 성수를 찾으면 그 즉시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열릴 테니 마냥 나쁜 것도 아닐 테지.”

묘한 뉘앙스였다. 내게 들려준다기보다 스스로 납득하려는 것처럼.

사정이 어떻든 거저 주어진 아이템을 쓰지 않는 것도 미련한 일. 나는 그 호의를 기꺼이 챙겼다.

“그렇다면야. 고맙게 쓰지.”

“누가 그냥 준댔나? 양심이 있으면 쓰고 나서 돌려 달라고.”

소유권 이전이 아닌 기간 한정 대여였나. 그래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어차피 밤이 끝나면 쓸모없을 물건이니까.

손전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황보라와 권이세의 구속을 풀어 주고 갈지. 이미 설득에 넘어와 호의를 베푼 마당에 더 묶어 놓는 것도 너무한 처사 아닌가 하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필요한 위험 부담은 피해 가야 한다는 결론이 섰다. 애초에 두 사람을 묶어 놓은 이유가 뭐였던가. 반병신이 된 나를 제치고 먼저 표식을 풀어낼 가능성을, 그로부터 투표에 관여할 수단을 얻는 것을 경계한 조치였다.

견물생심. 설령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눈앞에 탐스러운 물건이 있으면 일단 혹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생각과 수단이 모두 갖춰지면 말할 것도 없다.

재수 없게 ‘정치 9단’, 내지는 ‘폭군’ 같은 스킬을 얻는다면 나 혼자서는 슬기의 방출을 막을 방법이 없다.

…정작 가장 큰 위험일 슬기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모순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 역시 그런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새삼 실감한다.

“그럼 금방 돌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그러든가.”

그렇게 괴생명체처럼 꾸물거리는 두 사람과 헤어지고, 표식을 찾아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내 목을 붙잡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절로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슬기가 바닥에 엎어진 채 작게 기침했다.

게임상에서, 혈청 주사는 변신 기능을 마비시키는 아이템이다. 변신 스택을 삭제하는 개념의 ‘성검’과 비슷하지만, 궤를 조금 달리하는 아이템. 주로 체인질링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자에게 접종하여 그날 밤의 추이를 지켜보는 용도로 쓴다.

이 아이템에 부작용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분명 게임에서는, 그랬지.

현실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걱정을.

“…….”

나는 잠깐 비틀거렸다. 걸음을 디디려다 말았기에 무게 중심이 어긋났다. 균형을 잡고, 구태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야 할 길과 풀어야 할 표식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보처럼 앞일도 모르는 주제에 안심하라니, 걱정하지 말라니, 그런 헛소리를 나불댈 것 같았다.

하마터면, 내가 슈퍼 히어로가 되는 양, 착각할 뻔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빠듯한 소시민인걸. 그런 과분한 역할은 나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잡념으로 흐르던 사고를 되돌리기 위해 손전등을 가볍게 휘둘렀다. 빛에 드러나는 병원 복도는 인공적인 동굴을 나아가는 듯했다. 혹은 뭔가의 목구멍을 연상시키는 길고 어두운 공간.

빛이 구석구석까지 비추지 못해 복도 대부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도 쏘다녀서 구조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무한한 길이를 가진 것처럼 느껴질 법도 했다.

괴괴하게 흐르는 적막은 이명과 닮은 귀울림을 만들었다. 그 속을 손전등 빛으로 난도질하며 헤집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제스터가 단검을 들고 칼춤을 추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긴장감.

“오.”

순간, 긴장이 느슨해졌다. 성취의 기쁨으로.

불빛이 천장을 훑고 지나갈 때, 잠깐이지만 그늘에 숨어 있던 표식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 광경은 마치 환상처럼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지만, 내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손전등 빛을 천천히 되돌려 스쳐 갔던 표식을 찾아냈다.

이쯤 와서 이쯤을 비추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았다.

가능성은 작다 여겼지만 권이세가 허튼 말을 하진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이 손전등도 의외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위쪽은 시야의 사각지대가 되는 일이 잦은 법. 손전등이 없었다면 찾는 데 한참이나 애먹었을 듯하다.

한 손은 손전등을, 한 손은 핸드폰을 들어 표식을 인식시켰다.

[히든 박스를 발견했습니다. 문제를 푸십시오.]

4+3=17

8+7=115

4+2=26

6+4=?

소재가 떨어진 건지, 아니면 슬슬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만들기가 귀찮아진 건지 또다시 등장한 이과 문제였다.

문득 눈깔 괴물은 문과생을 뼛속 깊이 증오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집요하게 문과를 괴롭히는 문제만 골라서 출제하진 않을 텐데.

문과 울어욧!

나는 이 차별적인 대우에 의분을 참으며 머리를 싸맸다. 4와 3을 더하고, 8과 7을 더하고, 4와 2를 더하고, 6과 4를 더하면…….

‘어라. 생각보다 쉽잖아.’

앞뒤로 있는 숫자만 척척 착착하면 풀리는 간단한 문제였다.

[정답입니다. 히든 박스가 해제됩니다.]

천장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슬쩍 피했다. 오른손 왼손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다 실패한 탓이다. 누굴 닮은 건지 원.

결국,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더 많은 일을 떠안게 되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오른손이 모든 짐을 떠맡았다. 손전등과 핸드폰을 한 손에 모아 쥐고, 왼손으로 전리품을 들어 올렸다.

“엥?”

손에 잡힌 것을 손전등에 비춰 보았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 생김새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아이템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데드 체이스의 모든 스킬과 아이템, 유물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공부 머리는 나쁜 편이었지만, 이런 쪽으로의 기억력은 특출났던 덕분. 장장 몇천 시간에 달하는 플레이 타임은 싫어도 그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쑤셔 박았다. 그중 하나라도 기능이나 응용법을 숙지해 두지 않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곤 했으니까.

내가 얻은 것은 일단… 아이템의 한 부류로 보였다. 처음부터 실물이 나왔으니까. 그리고 표식을 통해 얻었으니까.

몹시 드문 확률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임무 목록에도 표시되지 않는 특수 임무를 찾아 클리어했을 때에만 나오는 ‘유물’은 이 두 번째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특수 임무 자체를 본 적이 없으니까.

이건 대체 뭐 하는 물건인고? 나는 깊은 당혹감에 싸여 그 기괴한 생김새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내가 이걸 보며 느낀 바는 대강 이러했다.

말라비틀어진 털북숭이 손. 워낙 쪼그라들어 손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미라 같은 살덩이에 그와 다를 것 없는 부속지 비스무리한 것이 다섯 개 달려 있는 꼴이었으니. 사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만지작거리는 것 자체에 큰 거부감이 들었을 텐데.

혹시나 싶어 핸드폰으로 찾아보려 했다. 선택한 기능은 아이템이나 스킬 등에 관한 설명이 나와 있는 룰 북. 이는 본래 게임에 없었던 기능이나, 초보자를 배려한 것인지 추가되어 있다.

하지만 곧 룰 북 항목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이미 내가 아는 아이템과 스킬의 설명이 화면 가득 채웠던 탓. 이런 정보의 바다에서 이름도 모르는 아이템이 언제 나올지 들여다보는 건 엄청난 시간 낭비가 될 것이 뻔했다.

한동안 핸드폰을 들고 씨름하다가, 마침내 내가 원하던 기능을 찾아냈다. 일종의 이미지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알려 주는 기능이었다. 이것도 그냥 쓸 수 없었다. 주변에 광원이 없으면 이미지 스캔이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이지, 손전등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정체불명의 아이템을 바닥에 내려놓고 빛을 비추며 핸드폰으로 찍었다. 형상을 인식한 핸드폰이 잠시 정지했다가, 이런 텍스트를 불러왔다.

[원숭이 손 : 소유자가 원하는 아이템으로 변신하는 아이템입니다.]

[※주의※ 아이템 사용 시 매우 강력한 무작위 페널티가 가해집니다.]

묘하게 대충 만든 것 같은 설명치곤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 간단하고도 터무니없는 기능에 눈이 돌아가기보다, 두 번째 줄에 눈이 갔다.

매우 강력한 무작위 페널티라. 뭔가 했더니 진짜 원숭이 손이었단 말이지. 소원을 들어주는 척, 소원 비는 사람을 엿 먹이기만 하는 원전을 빼다 박은 아이템이다.

내가 아는 한, 데드 체이스에 이런 아이템은 없었다. 내가 경험한, 혹은 보았던 모든 게임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아이템.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게임 당시, 이런 말을 듣지 않았었나.

[지금부터 알파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알파 테스트. 시험 적용되는 서비스란 뜻이다. 이 말인즉, 데이터를 쌓으면서 변경하거나 수정할 요소들을 종합한다는 것.

아직도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아이템이 나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당장 특전이라는 것부터 기존에는 없었던 요소니까.

그렇다면. 만약 그런 거라면.

앞으로도 이런 미지에 속한 것들을 더 많이 겪으리라 봐야겠지.

그래서 나는 머뭇거렸다.

설명이 맞다면, 이 기분 나쁜 아이템을 성수로 바꿔치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던져진 만능열쇠. 그 갑작스러움은 그 이상의 불길함이었다.

이걸로 성수를 얻으면, 정말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인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난제를 탄생시킬 것인가.

내가 짐작하기로, 교환의 대가로 받는 페널티란 모종의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저주일 것이다. 추격전 도중, 제스터가 내게 걸었던 ‘인버스’ 같은.

그 종류는 다종다양하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전신 마비’, ‘외발쟁이’, ‘투명한 악몽’,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장님의 시야’, ‘롱기누스의 창’, ‘공황 발작’…을 비롯한 기타 등등.

거기에 ‘매우 강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겠다.

이게 단순히 ‘저주 강화’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를 뜻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페널티도 꼭 내가 아는 범주에서 일어나리란 법이 없다. 벌써 원숭이 손이라는, 내가 모르는 아이템이 나왔는데 저주라고 아니란 법 있나.

그야말로 극단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나는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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