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91. 결자해지(結者解之)(1)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걷혔다.
나는 결국 밤이 끝나도록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동안 얻은 아이템 세 가지를 길거리 노점상처럼 바닥에 늘어놓고 한숨만 내쉴 뿐.
하나는 바이탈 사인 계측기. 심전도처럼 간헐적인 심장 박동 그래프를 나타내는 아이템이었다. 그 화면에 그려지는 그래프는 총 열 개. 그중 여섯 개의 그래프는 더 이상 요동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네 명의 파형만이 심장 뛰는 주기에 따라 꿈틀거렸다.
이 아이템의 용도는 사람들의 생사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것. 그로써 추리의 간접적인 근거로 활용하는 것이 주된 사용법이다. 당장엔 별 쓸모가 없지만, 광신도가 부활하는 시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파티용품점에서 팔 법한 코주부 안경. 착용하면 희극적인 맛을 더해 준다. 끝.
정말 이게 끝이다.
유감스럽게도 보는 대상의 전투력 같은 수치를 표시해주지도 않고, 모종의 약점을 찾아주지도 않았다. 잘하면 회심의 얼굴 개그로 체인질링을 감탄시켜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시도해 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이걸 얻은 것은 원숭이 손을 얻고 나서의 일이었다. 상세 불명의 막대한 페널티를 부여한다는 찝찝한 문구를 보고, 일단 다른 방면으로 성수를 찾아보자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표식을 풀었을 때 손에 들어온 아이템이 고작 이딴 거라니.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나마 건진 것은 이 원숭이 손이라는 아이템이다. 내 기억에 전혀 없는, 이질적인 신상품.
나는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손을 지분거렸다. 까슬까슬한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가. 뒤로 꺾었다가 옆으로 돌리다가, 혀를 차며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쓰는 건 내키지 않았다. 이걸 사용했을 때의 후폭풍을 고려하면.
[※주의※ 아이템 사용 시 매우 강력한 무작위 페널티가 가해집니다.]
괜히 붙은 경고문은 아니겠지. 어떤 아이템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실로 무지막지한 성능. 페널티는 당연히 그에 버금가는 것을 준비했을 것이다.
몸이 성하지 않은 지금, 어지간한 페널티도 감당하기 어려울 터. 하물며 매우 강력한 운운하는 페널티를 받고도 내가 멀쩡할지 의문이다. 임무 수행조차 못 할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면, 게임의 향방은 다시 높은 산 깊은 골짜기로 빠져들겠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사용 즉시 사망할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되지만, 목숨이 걸린 일에는 단 1할, 아니 단 1푼의 위험이라도 경계해야 마땅하다.
만약에 이걸 성수로 바꾸고 내가 죽는다면, 본말전도도 이런 본말전도가 없다. 가장 큰 대전제. 내가 이 게임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미치겠네.”
나는 세 번째 한숨을 참으며 단념했다.
원숭이 손은 정 다른 수단을 구하지 못했을 때의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 두고, 탐색을 장기전으로 전환해야 할 듯하다. 남은 스테이지는 3층부터 1층까지. 4층에 있던 표식은 마지막에 얻은 코주부 안경을 끝으로 씨가 완전히 메말랐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스테이지를 내려가는 족족 모든 표식을 풀어내어 얻을 자원이 없는 불모지로 만들면, 뒤늦게 광신도가 부활한다 해도 녀석이 변수를 경작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 기분 나쁜 아이템을 쓰는 것은 모든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그러니까 부활한 광신도를 완전히 방출시키고, 거의 모든 임무를 끝내고, 슬기가 체인질링으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둔 상황에서, 그러고도 도저히 다른 수가 없을 때 사용하기로 하자.
원숭이 손 사용을 그토록 뒤로 미루는 이유는, 내가 이 아이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험 제원이 없으니 그 대가로 지불할 피해 규모와 여파를 짐작하기 까다롭다. 이건 아이템이나 스킬이 새로 등장할 때마다 겪는 고초이긴 하지만.
내가 대략적인 행동 방침을 정할 무렵, 방송이 울렸다.
[알림. 임무 달성치가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를 개방합니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임무가 남아 있던 사람이 황보라였지.’
이맘때쯤, 자석의 구속에서 벗어날 때가 됐긴 하다. 남은 임무가 얼마 없었으니 순식간에 끝낸 모양.
“어떻게, 나한테 강탈한 표식들에서 쓸 만한 것 좀 건졌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나는 천장을 보던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돌아보았다. 권이세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본래 녀석의 것이었던 손전등을 던져 주며 물었다.
“황보라 씨는?”
권이세가 허공에 떠오른 손전등을 어렵잖게 잡아채며 대꾸했다.
“먼저 다음 스테이지로 내려갔다. 너랑 별로 말 섞기 싫은 눈치더군. 그래서 나 혼자 왔고.”
말하던 중에 물물 교환 하듯 던져 주는 자석 한 쌍. 한 덩어리로 붙어 있어 잡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자석을 받아들며 끄덕였다.
“뭐… 그럴 만하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너무 끌었다. 황보라한테 투표 선언을 아껴 두라고 말해야 했는데. 하지만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아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권이세와 같이 움직였으니, 그녀도 알 것이다. 광신도의 부활이 예정되어 있음을. 슬기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있겠지만, 광신도가 안기는 공포와 불안감에 비할 데는 아닐 터.
권이세가 내 주의를 되돌렸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뭘?”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나는 잠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다가 원숭이 손을 보여 주었다. 별 기대도 하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에 이런 거 본 적 있어?”
권이세가 미간을 좁히더니 몇 걸음 더 다가왔다. 유심히 살피는 눈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그게 뭐지? 나는 처음 보는데.”
“나도 그렇거든. 그래서 문제야.”
나는 이 아이템의 기능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권이세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슨 아이템이든 얻을 수 있는 대신…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고?”
“매우 강력한, 까지 덧붙여야지.”
“네가 뭐 때문에 고민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럼 다 해결된 거 아닌가?”
“응?”
갸우뚱하는 내게, 권이세는 어딘가 시험해 보는 투로 말했다.
“쉽게 쉽게 가자고. 그 아이템이 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걸 그냥 김슬기한테 넘겨주면 되잖아. 그 여자가 직접 성수를 얻게 하고, 페널티도 전부 떠넘기는 식으로. 그럼 다 끝나잖아. 그 여자가 정말 우리 편이라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겠지.”
아, 그런 방법이… 하며 놀라기에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나도 이미 떠올려 본 선택지이기에.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례의 방증일까?
“그렇게 쉽게 풀리겠냐.”
“왜, 뭐가 또 문제인데.”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만약에 슬기가 이걸로 엉뚱한 아이템을 소환시키면 어떡할래?”
예를 들면, 불사조의 깃털을 한 장 더 뽑아낸다거나. 아니면 ‘리스트 벨’이라든가. 그럼 보통 골치 썩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짓을 하면 더 이상 기만으로 점철된 본의를 감출 수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열차가 지나간 셈이다. 이 배신자, 거짓말쟁이, 다슬기라고 분노해 봐야 남는 건 데드 엔딩뿐.
슬기가 이 게임에 대해, 어떤 지식이나 경험이 있으리라는 추측은 종종 머리를 맴돌았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보다 훨씬 응용 폭이 넓을 것을 상정해야 한다는 뜻.
그렇다면.
“저걸로 무슨 변수를 만들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계속 갖고 있는 게 맘 편하지.”
이 말에 권이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또 어떤 트집을 잡으려고 저러나 했더니, 하는 말이 이랬다.
“일리가 있는데… 너는 그 여자를 100% 믿는 게 아니었나?”
설마 그럴 리가.
“믿지. 믿는데, 100%까진 아니라는 거지.”
내가 100% 신뢰하는 사람은 드물다.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리고 슬기는 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에 아직 여러 자격이 채워지지 않았다.
여기서 무탈하게 나간 다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 시점에선 시기상조다.
권이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진짜 모르겠다. 난 사실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나와 달리 몇 번씩이나 목숨을 빚졌으니, 그걸 갚겠다고 저러는 거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믿지 않는다고?”
어째 대화가 비생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녀석이 왜 이런 말을 늘어놓나 의아했다. 가만히 듣자 하니 마치 나를 비난하는 뉘앙스 아닌가?
내 경계심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써 모두가 보다 안전한 길로 가게 되었으니, 되레 칭찬받아야 할 일 같은데.
게다가 가장 슬기를 의심해 왔던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
“그 얘기는 이쯤 해두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슬기는 뭐 하고 있어?”
뭐라 더 말하려던 권이세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오기 전까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 신경 쓰이면 가보든가.”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있나. 지금 이 게임에서 가장 철저하게 대인 마크를 해야 할 사람인데. 나는 바닥에 늘어놓은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갈무리하고 일어났다.
권이세 옆을 지나가기 전, 문득 떠오른 한마디를 던졌다.
“슬기랑 무슨 얘기 했어?”
“뭐?”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싶어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가볍게 던져 봐서 나쁠 것 없는 탐색이었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대답이 돌아왔다.
“그 여자는 이러더군. 자신이 불사조의 깃털을 넘긴 건, 너를 살리기 위한 거래 재료였다고.”
“흐음. 그렇구나.”
어쩌다가 그런 말까지 나누게 된 건지, 조금 흥미가 일었지만 더 깊게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다. 내 담백한 반응에 권이세가 말했다.
“이제 어떡할 거지?”
“똑같아. 전처럼 임무 깨고 표식 찾아다니면서 아래로 내려가야지.”
그 외에는 할 것도 없다. 광신도의 부활이 다소 걱정되긴 하지만, 황보라의 투표 기회가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고. 바이탈 사인 계측기가 광신도의 부활을 실시간으로 알려 주는 만큼, 녀석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투표 개시 시점을 정확하게 어림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도 어서 내려가. 도중에 성수 찾으면 말해 주고. 언제까지 이런 데에 있을 순 없잖아.”
이건 숨기지 않은 본심이었다.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 어디에든 그냥 누워 푹 쉬고 싶었다. 몸이 아까부터 나른한 것이, 아픈 것을 넘은 이상 증세를 보이는 중이었다. 현실에선 새벽달이 거의 중천을 지날 무렵이니, 견딜 수준은 한참 전에 초과한 상태였다.
어림짐작으로, 내게 남은 건 한 시간.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침대에 눕지 않으면, 침대 중독증의 말기 증상으로 기절하고 말 것이다. 졸음기와 그 이상의 부상 후유증으로.
“너는?”
“나는 슬기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알겠다.”
짧은 대답에 희미하게 배어든 얼룩. 그 얼룩의 정체가 뭘까, 궁금했지만 권이세는 바로 몸을 돌려 물을 새도 없었다.
이윽고 나도 발을 떼어, 걸어갔다.
각자의 길을 따라 흩어진다.
슬기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만나고 나서, 슬기는 끝없이 재잘거렸다. 슬기가 이처럼 수다스러웠는지 나는 처음 알았다.
그 주사 때문에 목이 아직도 욱신거린다는 둥, 그래도 이야기를 해보니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걸 이해하겠다는 둥, 무엇보다 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둥.
부축할 사람이 필요했던 나는 간간이 쳐주는 맞장구로 노고에 보답했다.
‘아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임무를 척척 해내는 중에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서희야, 넌 어디에서 태어났어? 고향이 어디야?”
“생일은? 어떤 케이크를 좋아해?”
“특별히 자주 먹는 음식 같은 건 있어? 평소에 하는 취미는 뭐야? 게임?”
그렇게 떠들고도 이야깃거리가 바닥나지 않았는지, 슬기가 꺼내는 화제는 다채롭고도 다양했다. 몇 년쯤 인적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며 배구공을 가상의 친구로 삼았던 사람 같았다.
나는 그에 어울려 주며, 모나지 않은 대답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어찌해도 좋을 사소한 잡담. 그러나 그런 자잘한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머리 한편에는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궁금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심정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런 대화와 상념이 어느 순간 끊어졌을 때.
우리는 마지막 스테이지, 1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꼴찌로 임무를 수행하는 황보라가 임무를 두어 개 남겨 뒀을 때, 시계는 낮이 11분 23초 남았음을 표시했다.
여기서부턴 잠깐 쉬어가야 했다. 당초의 계획대로 3층과 2층에 있는 표식의 씨를 말려, 광신도가 부활해도 변수를 없애기 위해.
계획은, 분명 그랬는데 말이지.
[알림. 임무 달성치가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다음 스테이지를 개방합니다.]
…이건 머선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