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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117화 (117/264)

117화

117. 수상할 정도로 친절한 사람들(2)

내가 놀라지 않는 모습을 이채롭게 본 것일까. 권이세의 아버지, 권이중 씨는 의례적인 인사말처럼 몸이 어떠냐 하는 말로 말문을 열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했다.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니?”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아들분이랑 많이 닮으셔서요.”

“흠, 그래? 종종 닮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만. 그렇게 비슷한가?”

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을 설설 쓰다듬는 권이중 씨.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닌 듯하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건네는 명함을 보고 갑자기 얼이 빠져버렸으니.

상단에 박힌 입체감 있는 기업 로고. 하단에는 권이중 씨의 영문 이름과 직함. 거기에 고풍스러운 필체로 영문 서명이 쓰여 있다.

딱 보기에도 우아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명함인 것도 있지만, 내가 놀란 것은 기업의 이름과 직함이었다.

전자, Cheon Sung. 후자, Chairman.

즉, 권이중 씨는 이 나라 최대 규모 기업의 수장이라는 뜻이었다.

천성(天星). 그 다국적 대기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지구촌 전체를 꼽아도 드물다.

현시점에서 세계 재계 순위 50위권 안에 들며 국내로 경쟁자를 줄이면 시가총액, 기업 평가, 인지도 등등 모든 영역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기업. 단순히 기업의 규모를 제외하고서도 경제와 사회, 정치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이다.

이 그룹의 회장은, 본래 언론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신뿐 아니라 일가 친인척 모두 카메라에 노출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천성 기업의 회장쯤 되는 사람이 편집증적으로 언론을 멀리하니, 감히 그를 카메라 담을 사람도 많지 않았고.

하여, 나는 이름만 들어보고 얼굴은 모르고 살았으나 이렇게 만나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권이세. 은연중에 흘리는 말에서 잘사는 집 도련님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 금수저였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병원에 있으니 병원 관계자들도 경기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겠지. 모르긴 몰라도 괴현상의 피해자인 우리를 받아 주고 상당한 대가를 받지 않았을까. 아니면 천성 그룹 회장이라는 위명에 짓눌려 알아서 협조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니 가만히 있는 것도 불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꼭 사람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잘하는 말이 있었으니.

“편히 있게.”

였다.

‘퍽이나.’

그다음에 오간 것은 내가 더듬거리며 개인적으로 전하는 감사 인사였다.

‘저번에 머물던 병원의 모든 비용을 부담해 주셨다고 들었다. 참으로 감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에, 권이중 씨는 절제된 동작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들에게 부탁을 받았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린 건 나지만, 아들 녀석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고민하지도 않았을 문제였지. 그러니, 감사 인사를 하려거든 아들에게 하라고 하고 싶다만―”

권이중 씨는 한번 숨을 고르고서 느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구나. 여기 오기 전에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에게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진 모양이야. 그 괴현상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지. 이제껏 말해 줄 수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다시 제대로 말해야겠어. 내 아들을 몇 번이나 구해 주어 고맙구나.”

감사를 표하면서도 권이중 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체 감정 표현이 메마른 사람인지.

“저도 많이 도움받았어요. 받은 만큼 돌려줬을 뿐인데요.”

어른에게 받는 칭찬은 늘 어색했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에게 받는 칭찬은 더더욱. 그러나 조건반사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내게, 권이중 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내 아들은 내가 잘 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치기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아이지.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라고, 그에 보답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제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다고 계속 떼를 쓰더구나.”

그리고 침묵. 뭔가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나조차 떨떠름할 정도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건 권이중 씨의 굳게 다문 입매와 감정 없는 얼굴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나비의 나풀거리는 날갯짓이 들릴 듯한 정적이 흐른다.

‘용건이 끝난 건가? 그저 감사를 전하기 위해 천성 그룹의 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여기까지 온 걸까?’

내 궁금증이 깊어질 무렵, 갑자기 권이중 씨가 흠, 하더니 시선을 내게 둔 채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두어 번 까딱거렸다.

그 손짓은 뒤쪽에 석상처럼 서 있던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나 보다. 가만히 부동자세로 있던 여자가 다가와, 정해진 절차처럼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어 공손하게 내밀었다.

“받게.”

짤막한 손짓과 거스를 수 없는 명령처럼 하는 말에, 나는 무심코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이를 전달하는 것으로 역할을 마쳤는지 여자는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아마 권이중 씨의 진짜 용건일 종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최상단에 적힌 문장을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권이중 씨가 비서를 통해 건넨 것은 일종의 고용 계약서였다.

그 상세를 읽어 볼 틈도 없이, 목소리가 떨어졌다.

“자네의 활약이 실로 대단했다고 들었어. 아들뿐 아니라 같이 구조된 사람의 증언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 조금 알아보니, 그 활약이 처음도 아닌 것 같더군. 이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다고 봐야겠지.”

“어,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 내 밑에서 일할 생각 없나?”

“…네?”

나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권이중 씨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대로 가볍게 뒷짐을 진 자세. 단단한 눈빛엔 힘이 넘쳤다. 수많은 사람들 위에 서 있는 사람 특유의, 내리누르는 듯한 시선.

“읽어 보면 알겠지만 연봉이나 대우, 어느 쪽도 충분히 파격적인 조건이야. 고용계약 기간도 무척 넉넉하게 잡았고. 계약이 끝나 퇴사한다 해도 이후의 지원이나 보장,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1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권이중 씨는 벌써 35페이지쯤을 펼쳐 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나도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내 곤혹스러운 안색을 훑어본 권이중 씨가 조금 자신이 앞서 나갔음을 자각했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자네는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인 신분이니 정식 계약을 맺는 게 어렵기도 할 테고. 부모님과 의논해 보는 일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까짓 가소로운 제약쯤, 내게 걸림돌이 되지 않아. 아니, 설령 크나큰 장애물이 있다 해도 그따위에 굴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권이중 씨는 재차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아들을 지켜주게.”

제가요? 아들을요? 어떻게요?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권이중 씨는 이미 확고한 태도였다. 마치 내가 이미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손에 든 종이와 권이중 씨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가운데, 아직도 내 얼굴에 눈길을 못 박아 두고 있던 권이중 씨가 느리게 운을 떼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들도 이번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야. 자네처럼.”

무심한 듯, 그러나 미약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처음 아들에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비로서 그 아이가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곁에 있어 주지도, 지켜 주지도 못했어. 집에 아들을 지키라고 뒀던 경호원들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 나중에 듣기로, 대부분 아들을 충실하게 지키려 애썼다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없진 않았네. 심지어 어떤 놈들은 아들을 직접 해치려 했다더군. 다행히 살아 나왔으니 망정이지, 위험천만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야.”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조심스레 끄덕였다. 권이중 씨는 어느새 뒷짐을 풀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하더군. 살아나온 그 아이를 봤을 때,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끌어안았지. 그때 품었던 감촉과 온기와 떨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네. 그런데, 또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꽈악. 두 주먹이 강하게 죄어들었다. 손등에 곤두선 핏줄과 새하얗게 질리는 손가락 마디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차라리 신음 같았다.

“내가, 참으로 한심하고 무력하더군. 저 병원 어딘가에 내 아이가 있는데. 아버지란 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언제 나올지, 살아서 나올지, 오직 그것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았지. 그리고 결국 생환한 아들을 보았을 때, 나는 반가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네. 왜 그랬는지 알겠나?”

갑자기 내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는 권이중 씨. 나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을 꺼냈다.

“이번에 겪는 일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아서요?”

“맞아.”

권이중 씨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그럴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은 처음으로 그칠 여지가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다. 현상의 연속성. 두 번째는 언제나 세 번째를 암시한다.

더불어, 뒤따라오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까지도.

그리고 그건 내게도 적용되는 말이겠지. 나는 두 번째 게임에서 빠져나왔다. 그로써 지하철의 경험은 첫 번째가 되었고, 앞으로 이어질 세 번째, 네 번째를 맞이하는 것은 필연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이해했겠지. 자네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야.”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같은 뜻에 닿는 길을 에둘러 왔을 뿐. 이 대화의 모든 것이 의도되었다. 권이중 씨는 처음부터 자신이 느낀 비통함과 애절함을 강조하며 다시 권할 셈이었으리라.

권이중 씨가 미세하게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새삼스레 이 얄따란 종이 몇 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에, 이 보잘것없는 무게에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자네가…….”

그가 힘에 부친 듯 숨을 한 번 쉬더니, 한숨처럼 다시 말했다.

“자네가 아니고서는, 자네처럼 그 괴현상에 두루 능란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실전을 통해 경험까지 쌓은 인재가 아니고서는… 시시때때로 종양 덩어리가 건물과 배와 비행기를 뒤덮고, 그 안에서 괴물들이 사람 죽이는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 아들을 확실하게 지켜 줄 사람이 없어. 그러니…….”

털썩, 하는 소리가 났다. 자식을 둔 아버지가 병실 바닥에 무릎 꿇는 소리였다. 뒤에서 미동도 없던 남녀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회장님!’, ‘회장님, 일어나십시오!’ 들리는 말이 어수선했다. 그러나 권이중 씨는 일으키려는 손길을 전부 뿌리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배로 따지면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거기에 사회적 지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드높은 사람이 이토록 진중하게 부탁하는 모습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머뭇거리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권이중 씨는 침중하게 눈을 감았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시선을 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말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저 혼자서 함부로 정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일단 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잖아요.”

말하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 단순한 아르바이트 자리도 이런 식의 날림 처리를 해서 고용하진 않는다.

“부모님과도 상의를 해봐야 할 테고. 저한테 주신 계약서도 한번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그 뭐야. 당장 확답드리기가 어렵네요.”

“…….”

권이중 씨는 바위처럼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실수하진 않았을까 걱정된 것도 잠시, 굳게 다문 입술에서 새는 숨결이 빠져나왔다.

“…그런가.”

묵묵히 몸을 일으키는 권이중 씨.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 생각도 없이 슬쩍 물러났다.

“그래. 이게 무례한 제안이라는 걸 나도 모르진 않는다. 아들 걱정에 정신이 팔려 아들의 은인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고집스러울 만큼 완고한 모습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얼굴만 닮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니라고 하기에도 멋쩍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겐, 불필요한 말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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