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122. 징크스는 비와 함께(2)
몸이 의자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쌀쌀한 비바람을 맞다가 훈훈한 차 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루한 배경 소음도 졸음을 거들었다.
그나마 내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것은 어느 유튜브 동영상이었다.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인도한 동영상을 틀자, 이름 모를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귀에 낀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진행자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들어 희한한 사건이 끊일 새가 없습니다. 오늘도 뉴스를 보니 러시아에서 기후 제어 프로젝트에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던데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이 우주에 거대한 거울을 띄워 올린다는 겁니다. 언뜻 황당해 보이기만 한 이 프로젝트의 추진 동기와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실정인데, 박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허허 이상할 것 없어요. 얼마 전 러시아 당국이 전 세계에서 빈발하는 괴현상의 원인을 우주에서 오는 강력한 전자기파로 지목하지 않았습니까? 그를 생각하면 이 프로젝트의 추진 동기가 이해될 겁니다. 햇빛도 막고, 하는 김에 다른 우주 방사선도 막겠다는 거죠. 그런데 아직 이 괴현상의 원인에 대해 학계 전반이 공통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다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나사가 있는 미국도 아니고 러시아에서 저런 일을 벌이다니.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그리 가까운 나라 이야기도 아닌 데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과 예산만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삽질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거칠게 말하자면 그렇죠. 검증되지 않았으니 확실하지도 않은 가설을 믿고 밀어붙였다가 참사가 터진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그처럼 거대한 기후 변화를 일으킬 프로젝트를 국제적 합의도 없이 어느 한 국가의 독단으로 진행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요. 설국열차가 딱 비슷한 짓 하려다가 실패해서 그 꼴이 난 거잖아요?
―그렇군요.
―그리고 이게 말이 쉽지, 지구 궤도에 우주 거울을 띄워 태양열을 막고 조정해서 기후를 인위적으로 통제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햇빛을 1%만 반사해도 온실 효과를 40% 이상 상쇄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장 지구 공학 기술은 현재 과학 수준으로는 그 누구도 효율성이나 부작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형편인데 말이죠.
―조만간 각국에서 공식 입장문이 나오겠지요?
―이를 말이겠습니까. 아마 유엔 차원에서도 발표가 있을 겁니다. IPCC의 상위 기관이니 말이죠.
어째 갈수록 지루해진다. 왜 이런 게 추천 영상에 뜬 건지 원. 졸음기도 점점 묵직해져 더 이상 집중해서 들을 수 없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와 차체에 부딪히는 빗소리, 노면을 구르는 타이어 소리에 두런두런 잡음으로 울리는 이어폰의 소음까지.
단조롭고 규칙적이면서도 서로 어우러지는 그 소리들. 수면 유도를 위해 듣는 ASMR 같았다. 나는 자장가를 듣는 기분으로 뒤로 머리를 기대고 다른 상념에 빠졌다.
성묘라는 행위에 대해.
성묘는, 내게 그리 새롭지 않은 일이다.
그전에도 몇 번이나 죽은 사람을 보러 갔던 경험이 있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어렸을 때 사별한 친부모님을 종종 찾아갔다. 성묘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초창기에는 현재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중에는 나 혼자서.
동생을 데려가지 않은 것은 당사자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 대한 배려였다. 동생은 친부모님을 거의 잊은 듯 보였고 현재 부모님은 그런 상태를 은근히 반겼으니까. 내가 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갈 때마다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것도 시간이 지나며 뜸해졌다. 현재 소속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인 것.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친부모님의 얼굴이 좀처럼 기억에 남질 않았으니. 직접 찾아가기 전까진 항상 행동과 성격, 말투까지만 어렴풋이 뇌리에 맴돈다.
그러나 그분들의 이목구비만큼은 과거의 늪에서 떠오르지 않는 침전물이었다. 그분들의 유품 보관함 안에 몇 장인가 되는 가족사진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 사진으로 몇 번이나 모습을 눈에 새기려 했는데도 영 정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년기의 나와 동생이 바보처럼 웃고 있는 그 사진을 챙겨 나올 순 없었다. 만약 갖고 있는 걸 현재 부모님이 알게 되면 분위기가 꽤 어색해질 테니. 무엇보다 내가 그걸 갖고도 멀쩡한 척 연기할 자신이 없다.
―이번 정류장은 ◇◇ 추모 공원, ◇◇ 추모 공원입니다.
그 소리에 깜박 깨어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내 신발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버스 전광판에서 목적지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빠져 있던 상념의 깊이에 놀랐다. 잠든 것이 아니었는데도 자다가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창문을 통해 가까워진 목적지를 엿보았다. 산의 경사면, 언덕 근방부터 빼곡히 박힌 묘비들.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여기에 첫 번째 게임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의 묘가 있다. 정류장에서 10분쯤 걸으면 도착할 거리였다. 좌석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치이익― 버스 중간께에 있는 문이 탄산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우산과 종이가방을 챙겨 내렸다. 같이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우산을 펼치고 묵묵히 걸어갔다. 목적지에 이르러선 비가 그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헛된 소망이었던 모양이다.
“후우.”
잠깐 멈춰 섰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몸으로는 10분여 걷는 것도 숨이 차는 고행이었다.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온종일 운동다운 운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한동안, 우산 때리는 빗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맥박 뛰는 것이 고막에 달라붙은 것처럼 낱낱이 느껴졌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고개를 든다.
묘지에 즐비한 무덤은 당연히 방대한 숫자였다. 여기서 기준을 만족하는 단 하나의 묘비를 찾아야 한다. 지금 몸 상태로 오늘 안에 성취할 수 있는 목표인지 의문스럽긴 하지만, 여러 번에 걸친 성묘 경험으로 요령은 알고 있다.
오르는 길은 경사가 상당했다. 날씨가 날씨라 그런지 이곳을 거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젖은 돌계단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내디뎠다.
내가 알던 요령이 아직 유효한 것이었는지, 운명이 나의 참회를 애타게 기다렸는지, 비교적 이른 시간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묘비에 부딪히는 포근한 빗소리뿐, 주위는 고요했다. 때때로 멀리서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번갯불이 대기를 가로지르고, 뒤이어 천둥이 으르렁거렸다.
이 비 내리는 하늘 어딘가에서, 죽은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이 비는 그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아닐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 스쳤다.
나는 우산을 묘비에 씌우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묘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흠뻑 젖은 묘비에 맺힌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어, 이름을 읽었다.
정도환.
“당신 덕분에 내가 살아 있네요.”
묘비에 손을 짚고, 그렇게 중얼거린다.
고맙다고 말했다.
당신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많이 할 말이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는 한,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갈아 넣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적극적으로 밀어 넣거나, 소극적으로 방관하거나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는 하겠지만, 그래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러니 사과는 하지 않는다.
사죄하지 않겠다.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또다시 같은 행동을 되풀이할 테니까.
…고독(蠱毒). 독을 품은 벌레와 전갈, 뱀 따위의 것들을 한 항아리에 몰아넣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면 최후에 살아남은 하나는 모든 독과 원념을 머금어 더욱 지독해지리라는 미신.
왠지 그것이,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독이 없는 것들도 서로를 잡아먹다 보면 없던 독기가 생기기 마련인데. 어렸을 때부터 아주 진한 독을 집어삼키며 살아나온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독기를 품은 고독일 테니. 내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걸친 게임에서 살아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선, 틀림없이 전보다 훨씬 농도 짙은 독을 간직하게 됐겠지.
또한, 분명하게 자각한다. 이 독이 흐려질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짙고 탁해지는 길만 있을 뿐. 그러니 종착지는 둘 중 하나다.
나보다 탁한 독을 품은 자에게 당하거나.
나 스스로 너무나도 짙어진 독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그와 같은 예감은 아득하면서도 선명했다. 예지몽이라도 꾼 것처럼, 나는 내 미래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우르릉―
황금빛 번개가 멀리서 꿈틀거렸다. 춤추고 흩어지고, 다시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그 창백한 번득임이 종종 나와 무덤을 비추며 저와 닮은 색으로 물들였다.
묘비에 손을 얹고 우두커니 멈춰 있는 동안, 차가운 빗발이 정신없이 난타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덧 고개를 들었을 때, 뺨에서 미지근하게 식은 물방울이 빗줄기 속에 더해진다. 툭툭, 내리는 빗줄기와 섞여 묘비에 떨어졌다.
이곳에 없는 묘비의 주인은 내가 흘린 눈물을 어떻게 생각할까.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
비가 많이 내려서, 눈물샘에 그리 많은 비축분이 없어서, 금방 행방을 감춘 눈물 몇 방울. 나는 그렇게 덧없는 흔적을 남기고 일어섰다.
내가 흘릴 눈물마저 더러워지기 전에, 아직 눈물에 다른 것 섞이지 않고 맑을 때.
눈물이 진실되는 순간에 울고 싶었다.
달리 말해 당신의 죽음을,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만 가볼게요.”
성묘를 하러 온 것뿐, 여기에 내 묫자리를 알아보러 온 건 아니니까.
그전에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가을에 열리는 학교 축제와 번지 점프, 가족 여행, 세계 8대 절경으로 꼽히는 볼리비아의 유우니 사막 방문, 파리의 에펠탑과 런던의 빅 벤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스키 상급자용 코스 타기, 캠핑카에서 일주일 보내기 등등……. 입원 기간 중,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떠올린 버킷 리스트.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죽은 사람의 사생활을 오래 침해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이고.
돌아가자.
묘비를 다시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등을 돌렸다. 발을 디뎠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계속 걸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 * *
어울리지 않는 청승을 떨고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뭔 놈의 버스 간격이 이따위야.”
나는 안내판을 바라보며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올 차를 타려면 무려 50분을 기다려야 하는 현 상황. 심지어 이번에도 뱅뱅이 버스였다.
처음에는 예산 문제로 버스를 기다렸지만, 여기서도 기다렸다간 통금 시간을 지나서야 집에 들어갈 것이다.
예산이 조금 빠듯한 감이 있지만 별수 없이 택시 정류장을 찾아 어정거렸다. 그러나 수난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의 징크스는 연달아 원투 펀치를 넣은 복서가 카운터 펀치를 날리듯,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만하면 끝났겠지, 하며 안일한 방심에 빠진 나를 때려눕히려 작정하고.
갑자기 돌풍이 불며 빗줄기의 방향을 틀었다. 엉겁결에 몸을 움츠리며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았지만, 돌풍은 단가 3,000원짜리 빈약한 우산으로 막기 어려운 상대였는지 철제 살 두 개가 우직, 구부러지는 거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우산은 추하게 일그러진 형상이 되었다. 나는 아연실색하여 우산살을 다시 펴보려 했지만 구부러지다 못해 부러진 끝에 손만 베이고 말았다.
‘새 걸 사러 갈까.’
아니, 만사가 다 귀찮고 지긋지긋하다.
비 오는 날이면 가뜩이나 기분이 저조해지는데 이런 징크스까지 발목을 잡아끄니, 이럴 때마다 어릴 적 끊은 항우울제가 간절해졌다.
달관과 지긋지긋함을 넘어 체념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무정한 비의 신을 매도하는 것도,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비난하는 것도, 나아가 내 운명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요상 망측하게 꼬아버리는 누군가에게 한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마음을 닮아 망가진 우산을 들고 걸었다. 이후에도 불쾌한 해프닝―지나가던 차가 물세례를 끼얹는다거나 하는 끝에, 10년쯤 늙어버린 기분으로 택시 정류장에 도착했다.
먼저 줄을 서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기서라는 격언의 예시일까. 다들 뱅뱅이 버스를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 앞으로 열두 명. 심지어 그들 모두 개별적인 택시 이용 희망자로 보였다. 다들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몇 명쯤 일행이 있었으면 순번이 빨리 돌아왔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권이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권이중 씨의 제안도 있고 해서, 그들 부자에게 빚지는 것은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때였다.
빵빵―!
웬 경적이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택시를 잡은 사람이 줄 전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 여기 △△역 쪽으로 가실 분 계십니까?”
△△역.
내가 가려던 목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