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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125화 (125/264)

125화

125. 징크스는 비와 함께(5)

너무나 직관적인 이 상황. 경찰에 건 전화가 저 인간에게 와 있다. 단순한 전파 방해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건 뭐지.

‘경찰 직통 번호로 연락한 내 회선을 가로채서 그 수신처를 멋대로 바꿔버린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도.

그저 보통 일에 휘말린 게 아닌 것 같다는, 당연한 위기감만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갑자기 동행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미안해. 참, 이놈의 장난기가 문제야. 참아야지, 참아야지 해도 나도 모르게 터져버린다니까.”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좌절했다.

혹시나 싶어 손을 뻗었지만, 문의 잠금장치는 미동도 없었다. 용의자의 탈출을 방지하는 경찰차처럼.

우산과 핸드폰, 심지어 잠금장치마저 나를 돕지 않는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지만, 한편으론 조금 거리를 두고 상황을 관망하는 내가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면 내가 쓸 수 있는 수단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준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도리어 냉정해졌다.

나는 부질없는 탈출 시도를 포기하고 좌석이 몸을 묻었다.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한테 뭔가 바라시는 게 있나요?”

휘유, 동행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

“뭐가 대단해요?”

정말 대단한 사람은 이 사이코가 아니던가? 한낱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 미성년자를 잡아 두려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

동행자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아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이건 정말 순수한 칭찬이야. 너는 분명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네가 고를 수 있는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는데도 금세 다른 돌파구를 찾아보려 바로 협상을 시도하고. 이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영문 모를 공치사를 주워섬기는 동행자.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이 자의 말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러 정황을 통해, 내가 감시당하고 있었던 건 확실하다. 여기에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은 뒷조사까지 병행되었다면?

그렇다면 저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추측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나를 감시했다면, 그럴 만한 어떤 당위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위성이라는 건 암만 봐도 최근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괴현상일 게 뻔하다. 무색무취 무해하게 살아온 내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을 사건은 그것뿐이니까.

그에 더해, 단순한 인신매매범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납치와 감금이 목적이었다면,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최소한의 안전을 강구하고 운반의 편의성을 위해서라도 기절시키거나, 묶어 놓는다거나, 눈과 귀와 입을 가린다거나 하는 그런 짓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게 보여 주는 희롱의 장치들 역시 범상치 않은 것들뿐이고.

제시된 단서와 그로써 도출되는 가설이 현재로선 두 가지.

허상의 동전이 머릿속에서 춤춘다. 앞뒤로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그 회전은 곧 내가 쌓아 올린 예측과 통찰 사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그중, 보다 가능성이 큰 것을 입에 담았다.

“혹시 이러는 게, 진세라… 누나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요?”

“어, 어? 누구라고?”

적중했다.

일순, 태연자약하던 동행자의 얼굴에 금이 가는 것을. 그 틈새에서 미세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틀림없이 경악에 해당할 감정.

그 반응으로 확신했다.

나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반반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래도 운이 따라 주는구나.

처음에는 눈깔 괴물의 하수인 내지는 그 비슷한 종자라고 생각했다. 내게 관심 가질 사람 중에 운명이니 뭐니 미신적인 용어를 사용할 부류는 그쪽밖에 없다고 여겼으니까.

불현듯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것은 과거, 류승재 형사님과 병원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에.

“무슨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만큼 유령 같은 인간이었지.”

“CCTV의 기록과 카드의 이용 시간을 대조해 보니 생뚱맞은 사람 명의로 된 선불 카드를 쓰고 나중에 파기한 모양이다.”

“다방면으로 신원 조회 신청을 넣었는데 어떻게 된 인간이 걸리는 게 하나도 없더라니까?”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철두철미한 흔적 말소. 정상적인 수단으로 그럴 순 없었겠지.

그때 내가 느낀 인상과 이 상황은 기시감 같은 공통점이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냥 직감에 따른 공통점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으니 그만이지만.

문제는 정답을 맞힌 것만으로 상황을 호전시킬 여지가 있을지.

아직 명확한 타개책을 구상할 단계가 아니었다.

“흐음. 진세라, 진세라. 진세라…….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

동행자의 목울대가 꿀렁인다. 입매에 서린 웃음도 점차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장난기는 다른 감정들에 자리를 빼앗겨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경박한 태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무표정.

그러나 그 표정 지운 얼굴에서도 희미한 자책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적으로 동요를 드러낸 실수 때문이겠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침묵하던 그가 잠시 후 느리게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거야 원.”

뒤통수를 긁적이며,

“보아하니 거의 확신하는 모양이고. 속을 다 드러낸 마당에 아닌 척하는 것도 추한 짓이고……. 이거 정말 난감한데.”

중얼중얼 혼잣말하던 동행자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드드득, 내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시트를 뒤로 훌쩍 젖히고는 비스듬히 누워 내 얼굴을 올려보았다.

“네 말이 맞아. 어떻게 알았어? 혹시 그 여자한테서 우리에 대해 들었나? 어쨌거나 접촉이 있었으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 아니지.”

말하던 도중, 저 스스로 방금 한 말을 부정하는 동행자.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군. 그 여자가 입을 함부로 놀릴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 별도의 정보 획득 창구가 있었다는 건가? 아니, 이것도 이상한데.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일반인이라는 건 진작에 파악했어. 그럼 대체 뭐지? 혹시 전부 이쪽을 기만하려는 역정보였던 건가? 인생 전체를 위장해야 할 정도로 큰 비밀을 안고 있다는……?”

으아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든 생각을 여과 없이 떠들어대며 머리를 싸매는 꼴이 제법 희극적이었다.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주제에.

어느덧 침묵의 나무가 자라났다.

후우, 나직한 숨을 내쉬는 동행자. 불편한 심기가 여실했던 것이 비정상적인 빠르기로 평온을 되찾았다. 나를 바라보던 시선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냉막해졌다.

마치 이중인격자의 인격이 바뀌는 순간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동행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머리를 모호하게 기울였다.

“좋아. 다 좋다 이거야.”

더 이상 웃지 않는 입이 말한다.

“알 만큼 아는 모양이니 숨기지 않겠어. 우리는… 말하자면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야.”

여기서 말하는 공익이 공익 근무 요원의 별칭은 아닐 테고. 아마 전체의 이익을 뜻하는 공익일 것이다.

어떤 집단을 기준으로 한 공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묻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딱히 물어도 대답해 줄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널 찾아온 이유는 궁금했기 때문이야.”

혼자 뭘 정리하고 어떤 결론을 얻은 것인지. 괜한 희롱도 집어치우고 간결하게 나가는 품새였다.

“뭐가 궁금했는데요?”

“우리 쪽 사람하고 접촉한 인간이, 하필이면 그런 특이한 상황에 있었다는 게 나로서는 쉬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웠거든.”

슬며시 치켜뜨는 눈동자. 관자놀이를 지나는 핏줄이 꿈틀거렸다.

“너에 대해 이거저거 알아봤어. 내가 알아낸 게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그리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갖고 있더군.”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짧게나마 흔들린 것에 자책했다. 내 반응을 눈여겨보는 자가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내 안색을 훑던 동행자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네가 벌써 두 번이나 괴현상에 휘말린 인간이라는 거야. 주기가 말도 안 되게 짧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글쎄. 네 잘못이 아닐지는 나야 모르지.”

의미심장하게 대꾸한 동행자가 한 손을 허공에 올렸다. 거기서 펼쳐지는 세 개의 손가락.

“내가 볼 때, 가능성은 세 개야. 하나는 네가 정말 무고한 피해자라는 것. 하나는 의도적으로 그런 현상을 일으키고 다니는 신종 테러리스트라는 것. 나머지 하나는…….”

엉뚱한 의심을 거론할 때마다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검지가 나를 가리켰다.

“네가 일종의 촉매 내지는 피뢰침 구실을 하고 있다는 거야.”

“…촉매? 피뢰침?”

“모르지 않을 텐데.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가? 너라는 인간 자체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괴현상을 일으키는 강력한 인자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야 마땅치 않지만, 현상에 의거한 추론이야 어려울 게 없지.”

내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겼는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개변시킨다고 해야 할지, 끌어들인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결과는 같아. 마치 화학 물질 용액 속에서 가장 처음 태어난 하나의 결정이 주위를 똑같이 바꾸듯, 네가 현실의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 역할을 하는 거지. 아니면 번개를 잡아끄는 피뢰침처럼, 괴현상이 일어나는 조건을 상시 만족시킨다든가.”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라고, 동행자는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자가 하는 말을 숙고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여기기에는, 웃기지 말라고 하기엔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무심코 이미지가 떠오른다. 투명한 비커에 담긴 액체. 그에 떨어지는 한 조각의 결정. 결정이 떨어지는 순간, 비커에 담긴 액체는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색을 달리한다.

다음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어두운 밤하늘을 질주하는 번개였다. 갈피를 잡지 못한 번개가 뾰족하게 솟아오른 철제 막대에 이끌려 추락하듯 내리꽂히는 모습.

그 연상의 도달점에는, 언제나 시산혈해의 광경이 있었다.

나는 상념에 빠진 동안 그만 동행자의 말을 놓칠 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를 납치 감금시킬 생각이었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범죄 선언이 주의를 급속도로 되돌렸다.

“뭘 어떻게 한다고요?”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한 절차잖아? 앞서 꼽은 세 가지 가설 중에 한 개만 맞아도 문제야. 너처럼 위험한 인간을 세상에 마음대로 활보하게 놔둘 수 없으니까. 이 기괴한 현상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 정확한 원리나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택시가 달린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목적지에 다다른 다음엔 어찌 될 것인가. 방금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하면, 연구용 실험 쥐 신세로 전락하는 건가? 아니면 그보다 못한 꼴로?

다음 순간, 동행자는 툭하니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어.”

“…네?”

손바닥 뒤집듯 방금 한 발언을 바꾸는 동행자. 이럴 거면 뭐 하러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거지?

이게 속임수의 일종일까 생각했지만, 그런 짓을 해서 얻을 이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신병을 확보하고 내가 저항할 수단까지 모두 봉쇄한 마당에.

동행자는 깍지 낀 손을 가슴에 올리고 기복 없는 음색으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보내 줄게.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 봐야지 한낱 서류 뭉치 따위로 판단할 계제가 아니란 말이지. 마음 같아선 이대로 끌고 가고 싶지만, 이 상태로 무작정 붙잡아 뒀다간 뒤탈이 만만치 않을 것 같거든. 벌써 꼬리가 달라붙었군그래.”

‘꼬리가 밟혔다?’

그 말인즉슨, 내게 관심이 있는 패거리가 이놈들 외에 더 있었다는 건가?

나는 반사적으로 택시 뒤쪽을 살폈지만, 빗방울에 가려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니, 설령 날씨가 맑았어도 뭔가를 발견하긴 어려웠으리라. 나도 모르는 사이 뒤에 따라붙은 종자들을 갑자기 알아볼 순 없었을 테니.

당장 이놈들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접근해오지 않았나.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를 취해, 내 발로 직접 다가오게 하는 방식으로.

“당분간은 너를 풀어 두겠어.”

동행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부른 하이에나 입에서 새 나온 듯한 한숨이었다.

“이게 실수일지 아닐지는 모르겠군. 너의 평생을 빼앗음으로써 다른 무고한 이들에게 일생을 줄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게 오늘 이 시간은 아니야. 반대로, 내일과 내일 사이의 어느 쯤이 아닐 거란 보장은 없지. 너는 똘똘한 친구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어.”

얘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택시가 어느새 역 앞에서 멈췄다. 내가 버스로 갈아타기 전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드르륵. 시트를 원상태로 되돌린 동행자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작별 인사를 보내듯. 흘끔, 문을 확인해 보니 잠금장치가 거짓말처럼 덜컥 열렸다.

짙은 탈력감과 갖가지 의문을 느끼며 택시를 빠져나왔다. 체감상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고작 15분 남짓 흘렀을 뿐이다.

내리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택시를 타고 이곳에 오기까지, 단 한 번도 신호등에 멈춰 선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타고 온 택시의 행방을 쫓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유령 택시처럼 이미 종적을 감춘 다음이었다. 하염없이 쏟아붓는 빗줄기 속으로.

“…….”

쏴아아아―

폭우는 마치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처럼 번개와 비를 뿌려대며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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