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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144화 (144/264)

144화

144. 세 가지 갈림길(8)

“먼저 이것들부터 다 떼어내자.”

“알았어!”

드드득, 드득.

내 주도하에 도서실에 있는 커튼을 죄다 뜯어내는 탈출 루트의 학생들. 우리가 들어온 이후 도서실 기물들이 남아나질 않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

“누구 커터 칼 있는 사람 있어?”

“이쪽에 가위는 있어! 이거 가져가서 써!”

“이거 튼튼하게 매듭지으려면 어떻게 해?”

“이리 줘봐. 내가 할 줄 알아.”

“이것도 봐줘! 어느 정도 크기로 잘라야 안 끊어지지?”

“한꺼번에 밧줄 타기 할 것도 아니니까… 대략 이쯤?”

처음에는 다소 혼선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꽤 효율적인 분업 체제가 완성되었다. 도서부원인 수진이가 밧줄 제작에 필요한 물품들을 족족 조달하고, 평소에는 쓸모없는 이런저런 잡지식에 능한 ET가 사람이 매달려도 지장이 없을 수준으로 제작을 감독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커튼을 가지런히 자르거나, 자른 것들을 서로 묶어 길이를 연장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마침내 커튼이 갈기갈기 찢어져 기다란 밧줄로 변신을 마쳤을 때, 나는 창문을 열고 손짓했다.

“좋아. 어디까지 닿나 한번 보자.”

끝부분을 잡은 김태훈이 군말 없이 내 지시에 따랐다. 훌렁훌렁 창문을 넘어 내려가는 밧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거대한 아나콘다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는 모습과 닮았다.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어떤 연상이 스쳐 재차 지시했다.

“잠깐만, 조금 옆으로 틀어줘.”

“왜?”

“지금 밧줄이 복도에서도 보일 위치잖아. 창문 너머로 보이지 않게, 벽이랑 평행하게 내려가야지.”

우리가 농성에 이어, 탈출을 꾀하고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을 일은 없었다. 살인마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문제지만, 위험은 피해 가야지.

“다들 들었지? 빨리 옆으로 옮겨! 빨리!”

김태훈은 처음 나를 적대한 일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싹싹하게 굴었다. 언제는 왜 안 쫓아내냐고 아우성치더니. 갑자기 내 나팔수 노릇을 자처하는 게 조금 어이가 없다. 태생적으로 2인자 역할을 좋아하는 친구인가?

그것도 그거지만 생존 본능이 남다른 거겠지. 그렇다면, 흐음.

위치를 옮긴 밧줄이 쭉쭉 내려갔다. 끝부분은 어렵지 않게 지면까지 늘어졌다. 반대쪽 여유분을 확인한 나는, 이쪽에서 장력을 유지하기 부족함 없는 길이라는 것도 검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난 창문을 가리켰다.

“이제 한 명이 저쪽으로 가서 창문 열어줘.”

“이거 열면 돼?”

“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쪽에서 밧줄 던지면 받아주고.”

송진서가 지정한 곳에 위치하자,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받침대 하나를 주워 들어 여러 번 커튼 밧줄을 묶었다. 그렇게 무게 불린 밧줄 끝을 창문 밖에서 카우보이처럼 빙글빙글 돌리다가, 투척. 창밖으로 두 팔을 내민 송진서가 책 받침대와 한 묶음으로 날아온 밧줄 끝을 멋들어지게 받아냈다.

밧줄을 가져온 송진서가 ET의 조언대로 창문과 창문 사이 벽에 단단하게 매듭을 짓고, 탈출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내려갈 순서를 어떻게 정할까? 누구, 먼저 내려가고 싶은 사람 있어?”

“나! 내가 먼저 할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김태훈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나는 짐짓 난처한 것처럼 여성진 멤버를 둘러보았다.

“그래? 그래도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도 있는데, 양보할 생각 없어?”

“아니, 이런 상황에 뭔 얼어 죽을 레이디 퍼스트야? 어차피 저 밧줄도 한 사람만 버틸 수 있잖아. 그러면 먼저 나갈 수 있는 사람부터 나가야 맞지!”

말 자체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길이를 넉넉하게 확보하기 위해 밧줄의 굵기는 그리 두껍지 않았다. 두 사람 이상 매달렸다간 끊어질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굵기. 재료가 모자라서 밧줄을 두 개 늘어뜨릴 수도 없었다.

조건이 이렇다 보니 신체 조건과 운동 신경이 괜찮은 사람을 우선하여 내려가는 것이, 전체의 탈출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릴 방법이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의도한 바는 조금 다른 데에 있다.

“…그래. 알겠어.”

나는 입 밖으로 새려는 한숨을 조용히 삼켰다.

몇 번의 경험으로 얻은 바가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결과를 성립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게 설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저하고 포기하는 방식이라 해도.

적어도 겉으로 만류하는 시늉이라도 냈지 않나. 선택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것. 양심의 가책은 홀가분하지 않을지언정 무겁지도 않았다.

“그럼, 출발할게.”

김태훈이 모두를 향해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조심스레 창틀에 몸을 걸쳤다. 1초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더니, 자못 신중해진 품새였다.

하긴, 그냥 밧줄 타기를 해도 무서울 높이였다. 거기에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데다 때때로 돌풍이 불어 위험천만한 환경. 심지어 안전 장구류 따위도 없으니 오죽할까.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현의 달은 이미 머리 높이 떠 있었다. 먹구름에 삼켜진 달이 호젓하면서도 섬뜩한 빛을 뿌린다. 여름 장마철에 부는 밤바람은 부드럽다기보다 꺼끌꺼끌했고, 낮 동안의 더위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김태훈의 몸이 창문 아래로 가라앉았다. 신중하다 못해 경직된 몸놀림. 출발 전에 드러낸 자신감은 송골송골 맺혀 흐르는 땀과 함께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땀이 배고 손가락 끝은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차가워졌다.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동안, 김태훈은 어기적어기적 한 발 두 발 벽을 디디며 내려갔다. 학교 외벽에 간간이 튀어나온 벽돌과 빗물 배관의 고정쇠가 좋은 디딤돌이었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내려가는군, 이라고 생각한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와악!”

발이 미끄러져 균형을 잃은 김태훈. 외마디 비명과 함께 태애애앵―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중심을 못 잡은 김태훈이 빗물 배관에 부딪히며 난 소리였다. 아찔한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이 덩달아 얼굴을 가리거나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첫 번째 탈출 시도자가 명을 달리하진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여기까지였다.

한 번의 실패가 잊고 있던 공포를 상기시킨 걸까. 김태훈은 더 내려갈 엄두도 못 내고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위쪽의 우리를 올려다보는 얼굴엔 어느새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연신 흔들리는 발아래를 보았을 때, 김태훈은 다급하게 외쳤다.

“모, 못하겠어! 팔에 힘이 안 들어가!”

망할. 나는 무심코 탄식을 뱉어내고 싶었다. 못하면 못하는 거지 고래고래 소리 지를 건 뭐란 말인가. 빗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묻힐 거라 생각한 건지, 그냥 공포에 머리가 마비된 건지 몰라도 녀석의 행동은 제 여명을 토막 치는 꼴이었다.

“야, 도와줘! 못하겠다고! 빨리!”

나는 신경질적으로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지만, 김태훈은 알아들을 기미가 아니었다.

“조용히 해!”

보다 못한 송진서가 큰 소리로 윽박질렀지만, 김태훈의 발버둥과 아우성은 멈추지 않았다.

“빨리 끌어올려 달라고 새끼들아! 나 못 버티겠다고!”

“알았으니까 입 다물어!”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학교 곳곳의 창문을 살폈다. 창문 하나마다 머금고 있는 묘한 음침함.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빠짐없이 관찰하는 안구처럼도, 금방이라도 입을 벌려 혀를 날름거릴 괴물의 아가리처럼도 보였다.

어쩐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영 내키지 않은 행동에 임했다.

“다들 밧줄 잡아줘. 동시에 끌어올려 보자.”

김태훈을 구하는 건 다대한 손실을 감수하고서 고른 차악이었다. 뭐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첫 번째 주자가 저런 꼴을 보여서야. 이렇게 첫 시도가 실패해 버리면 다음에 나설 사람들도 부담감이 급격히 불어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가만히 놔뒀다간 살인마가 김태훈의 난리 법석을 포착할 테고, 그러면 일차적인 탈출 시도가 물 건너간다. 여기서 벌이는 짓이 들키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견제가 쏟아질 것은 필연이니까. 꼭 살인마의 등장이 없더라도, 눈앞에서 추락 사고를 목격하면 후발 주자들의 사기도 멀쩡하진 않을 터.

상황에 떠밀리듯 고르게 된 탈출 루트지만, 기왕 한다면 각 잡고 제대로 해봐야지.

“다 같이! 하나, 둘!”

영차영차 하며 느닷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우리.

김태훈은 옛이야기에 나오는 거미줄에 매달린 죄인처럼 우리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안달복달하던 것치고는 제법 잘 버티고 있다. 엄살이 심한 친구라고, 김태훈의 평가를 재조정하는 순간,

“……!”

드르륵.

학교 내부에 드리운 어둠 탓에, 살며시 창문 열고 나타난 그것은 뭉개진 실루엣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순간, 이런 상황에 모습을 드러낸 것의 정체는 두말할 것 없는 불길함 자체였다.

여기서 8미터가량 떨어진 비스듬한 아래쪽, 2층 창문을 열고 몸을 내뺀 인영. 바깥에서 비쳐 들어오는 주황빛 가로등 불빛에 상반신이 온전한 색채를 되찾았다.

그것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찢어지는 듯 웃는 가면을 썼고.

거무스름하고 기다란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놈이라는 것을. 첫 조우 시에는 미처 육안으로 담지 못한, 살인마의 형상임을.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거리상 가장 가까운 김태훈은 자기 몸 가누는 것도 힘겨워 다른 데에 정신 팔 겨를이 없었고, 밧줄을 끌어당기는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힘을 넣느라 바빴다.

기분 탓일까.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것은. 그런 연후에, 웃는 가면 뒤에서 진짜 웃고 있으리라 느낀 것은.

웃는 가면이 갖고 있던 막대― 아마 총일 물건을 들어 올렸다. 총구가 시선 가는 방향에 따라붙은 순간, 나는 일순 끊어졌던 사고의 흐름을 이어 붙였다.

“모두 뒤로 물러나!”

“뭐? 왜―”

콰앙!

밤의 정적을 가르는, 대포 터지는 듯한 굉음이 질문을 말살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내뺐을 때, 총성의 메아리 사이로, 뭔가가 쿵!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금까지 밧줄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무게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허무한 감촉에 그만 넋을 놓을 뻔했다.

“꺄아아악!”

“으아아아!”

콰앙!

뒤이은 총성이 창문 유리를 산산조각 냈다. 총성의 잔향과 비명, 깨진 유리창 쏟아지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엉키며 내 고막을 찢어발겼다.

머릿골을 미친 듯이 쥐어짜는 듯한 소음 덩어리를, 그러나 나는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망연히 듣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바싹 낮추고 있었다.

내 심장 고동은 가슴을 난타하는 양 펌프질하는 상태였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사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같이 줄다리기를 하던 아이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꼴이었다. 주저앉거나, 엎드렸거나의 차이일 뿐. 그 와중에 용케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반대편에 매달려 있던 김태훈이 끝내 탈출에 실패했으니까.

그래, 실패다.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는 실패는 아니었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내가 얻은 이익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살인마는 우리의 탈출 시도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소음 차폐 효과가 뛰어난 교내가 아니라, 사방이 뚫린 곳에서 두 발이나 총을 쏘는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초탄은 탈출 시도자를 사살하는 데 쓰였지만, 차탄은 순전히 위협을 가하는 용도였다. 살인마의 의도는 필시 두 번 다시 탈출할 엄두 따위 낼 수 없도록 심리적 족쇄를 채우는 것이었겠지.

효과가 없다곤 못하겠다. 테두리에 여남은 조각을 제외하고 박살 난 유리창은, 희미한 희망마저 부스러진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 보였으니.

그래도 이번 총성은 지난 어떤 소음과도 궤를 달리하는 소음이었을 터. 바깥에서 이변을 알아챌 확률이 훌쩍 올라갈 것이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했다, 평해도 되겠지.

김태훈이 이 계산에 동의할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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