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165. 그들이 거두는 것(5)
<Protagonist>
“놈에게 ET가 잡혀 있어. 그거 때문에 남으려던 거야.”
나갈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털어놓은 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예전처럼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괜찮아?”
그러나 수진이는 당연하다는 듯, 즉각 동행을 선언했다.
“괜찮아. 널 믿으니까.”
짧고 간결한 말이 참 무겁기도 하지.
그리하여 다목적실을 빠져나온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현상을 목격하고 잠시 발이 멈췄다.
복도와 계단, 교실을 비롯한 기타 시설 내부에 들어찬 시체들이 제각기 몸을 떨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괴한 종양 덩어리로 부풀어 오르고 문드러졌다.
그러고도 끝이 아니었다.
그르르륵―
몸 곳곳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들. 증식을 거듭한 촉수 덩어리가 고속 성장하는 담쟁이덩굴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에워쌌다. 인간의 형상마저 잃어버린 끔찍한 몰골들은 말미잘을 연상케 했다. 언뜻 우둘투둘한 육종에 파묻힌 눈 몇 개가 덩이뿌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개중에 가장 혐오스러웠던 것은, 그나마 얼굴이 남아있는 촉수였다. 눈으로는 질금질금 피눈물을 흘리고, 입술 사이로 원래의 형태를 거의 잃어버린 혀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꼴이란.
그 혓바닥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문득 두 번 다시 선택을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수진이는 내게 원망의 눈짓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나 역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나 하고 있기에는 갈 길도 멀고 할 일도 너무 많다.
나는 수진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보지 마. 가자.”
“으, 응.”
수진이가 보여주는 침착함은 뜻밖의 면모였다. 나와 함께한 첫 번째 게임에서 예방 접종을 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버티기 힘들 텐데. 모르는 새 심신을 단련하여 굳세어진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를 둘러싼 세상은 역겨운 이공간으로 탈피하고 있었다.
찰박찰박. 계단을 오르는 젖은 발소리는 피 웅덩이 때문이 아니었다. 시체들의 파격적인 변신과 더불어, 바닥 전체를 기묘한 물질이 뒤덮기 시작한 것. 신발 밑창 절반까지 차오르는 정체불명의 점액질. 양서류처럼 매끈거리고, 가느다란 실핏줄 같은 것들이 곳곳에 맥박 쳤다.
혹 비슷한 것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다 수축하는가 하면, 때로 팽창의 임계점을 넘은 것처럼 파열하여 혈액 비슷한 검붉은 액체를 악취와 함께 주변에 흩뿌리기도 했다. 몇 번이나 봉변을 당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해 갈 수 있었다.
이 점액질은 바닥만 덮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벽, 벽에서 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간혹 멀쩡한 시체가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득달같이 모여들어 눈이나 코, 입을 통해 몸속으로 침투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점액질이 파고든 시체는, 얼마 안 가 사지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꾸드드득―
그다음은 뜨거운 열기에 노출된 금속처럼, 녹아내리듯이 형체가 무너진다. 녹아내린 몸이 점액질의 일부로 빨려들면서 반대급부로 촉수의 움직임이 가일층 활발해졌다. 사람 하나 통째로 집어삼키고 점액질의 영역이 확장을 거듭하는 건 물론이다.
점액질과 촉수는 1층 계단을 넘어 2층 복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도 이곳저곳이 꾸덕꾸덕한 살덩이가 점령해 거대한 생물의 위장을 탐사하는 것 같았다.
이 학교가 이상 경지에 치달아 있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죽은 사람들이 괴기스럽게 끓어오르는 살덩이로 바뀌어 일그러지고 소용돌이치며 꾸물거리는 광경. 어떤 원리인지 살아있는 사람은 알아서 피해 가는 듯했지만, 굳이 접촉해서 시험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순간, 이곳은 진정한 의미에서 고립된 계로 변모했다. 나가는 것, 들어오는 것 모두 막혔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새삼스럽지만, 이로써 오늘 일어난 참사와 데드 체이스와의 연관성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짓을 벌인 주체가 최소 둘이라고 봐야겠지. 데드 체이스의 기본 규칙인 두 명의 체인질링. 살인마의 단독 범행이 아닐 가능성도 거의 확정적인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으음… 일단 방송실에 가보려고.”
수진이가 몸을 비틀어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가서 어떻게 할 건데?”
“놈을 유인할 거야. 전에 놈이 썼던 방식 그대로.”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다음은?”
“글쎄.”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알 길이 없었다. 사실 학교가 이 지경으로 미쳐 돌아가는 데 방송 장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보장도 막막하다.
하지만 시도하지도 않고 물러설 수 없는 노릇.
그리고 도움이 되는 것도 있다.
[핤법의 붪도c?―蜈성w 중]
어떤 연유인지, 시체들의 변신에 발맞추어 활성화 시간이 초기화된 마법의 지도. 심지어 활성화 시간 표시창은 무한을 상징하는 ∞ 기호가 떠올랐다.
일종의 버그인가 싶었지만, 원인을 분석할 단서가 없었다. 어쨌든 우리의 안전을 최소한으로 담보하는 보호 장치.
정 수틀린다 싶어도 술래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의 지도로 확인되는 살인마의 위치는, 아직 1층 문서고에 못 박혀 있었다. 거기에 있는 인수 불명의 사람들과 그에 포함되는 ET를 데리고. 안에서 뭔 짓을 꾸미는지 몰라도,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
물경소사(勿輕小事).
작은 일이라도 경솔하게 처리하지 말라 일컫는 사자성어. 나는 필요할 때에는 대부분, 이 경구에 따라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목적을 세운다. 그다음은 당장 시급한 작은 과제부터 차근차근 정리. 그리고 그 소과제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수립. 남은 건 하나씩 실행해 나가면 그만이다.
목적이란, ET를 포함한 인질들을 구출하는 것. 다 같이 살아나가는 것. 부가적인 목표로는 가급적 사지 멀쩡하게.
그를 위해 나는 머리를 맑게 하려고 애썼다.
이윽고 우리는 2층에 있는 방송실 앞에 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진이가 말했듯, 방송실 주변은 심상치 않았다. 온통 난잡하게 흩뿌려진 잔해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일을 하다가 그만둔 것 같은 형상이었다. 실시간으로 영토 확장을 벌이는 점액질과 촉수로도 감춰지지 않았다. 저것들의 편식이 심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점액질 위로 건더기처럼 떠 오른 잔해들을 눈여겨보면, 두꺼운 서류철과 철제 캐비닛, 합성목으로 만든 듯한 책상 등이었다.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치 파괴되어 있다.
잔해가 쏟아져 나온 방향을 짐작하긴 쉬웠다. 본 교무실에 가까워질수록 양이 많았다.
우리가 도서실에서 바리케이드를 구축한 것처럼, 저쪽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사방팔방 널브러진 파편의 양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이만한 잔해가 튀어나오려면, 그에 필적하는 장애물을 쌓아뒀다는 뜻.
‘그런데 그게 이토록 초토화되었다고?’
폭발물을 동원한 것도 아니다. 연기나 화약 냄새, 어느 것도 식별되지 않았다.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드는 찰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본 교무실에서 불쑥 걸어 나오는 인간이 있었다.
얼굴에 안경을 쓴, 어딘가 익숙한 낯짝―
서나호?
“…어?”
“…어!”
“…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회의 순간.
사고가 잠시 정지한 동안, 맞은편의 안경 속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물결치는 것이 보였다. 일순의 당황과 혼란을 거쳐, 패닉 상태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서나호가 발에 불이 붙은 듯 달려왔다.
“얘, 얘들아 살아 있었구나! 얼른 피해야 해!”
엉거주춤 달려오던 녀석이 고장 난 것처럼 멈췄다.
내가 반사적으로 송진서가 남기고 간 망치를 녀석에게 겨누었기에. 수진이도 덩달아 긴장하여 투포환 선수처럼 문진을 치켜들었다.
우리의 적대적인 자세가 서나호의 발을 붙들었다.
만남의 장소가 요 지경인데도, 무척이나 어색한 침묵이 아로새겨졌다.
몇 초간의 정적 후, 서나호가 악을 쓰듯 말했다.
“…왜, 왜들 이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면?”
내가 묻는 것과 동시에, 가까운 벽이 썩어 문드러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콘크리트 안에 점액이 물씬 스며 나오는 꼴은 이 학교에서 한창 유행 중인 인테리어였다.
흐억, 벽이 무너지는 광경에 기겁한 서나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채근했다.
“일단 이쪽으로 가서 숨어야 해! 놈이 언제 올지 모른다니까!”
그러면서 가리키는 방향이 방송실이었다. 마침 우리의 목적지이긴 한데, 어떤 놈이 온다는 거지?
흘긋 시선을 내려 화면을 확인했다. 살인마는 문서고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법의 지도 상태가 여러모로 불안정했지만, 아직까진 신뢰할 수준이었다.
수진이가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을 상정해 두지 않았다. 언젠가 어떻게든 만나리라 예상했지만, 이런 만남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미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내내, 머리를 굴렸다.
서나호. 내가 살인마의 앞잡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단정한 인물. 동기와 실행 능력 면에서, 녀석만 한 용의자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스쳐 가는 것은 참사가 일어나기 전, 옥상에서의 기억. 그때 최석필이 어렴풋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야, 약사 아들내미면 용돈도 많을 텐데.”
부친이 약사라면, 아들도 어느 정도 약제 법에 지식이 있을 개연성이 있지. 그 지식을 토대로 도서실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을 몰살시켰다면 어떨까.
‘그러고 나서 홀로 빠져나와,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면?’
아니면 이것도 그 지긋지긋한 확증 편향인가. 나는 이미 범인을 정해놓고 모든 정황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기왕 마주쳤으니, 검증할 건 검증하고 가야 한다.
“왜 너 혼자 이러고 있어? 도서실에 있던 애들은 어쩌고?”
“거의 다 죽었어! 나 포함해서 세 명 정도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누구한테?”
함정 질문이었다. 어디 살인마가 쳐들어와서 다 쏴 죽였다고 하기만 해봐라.
녀석은 안 걸려들었다.
“최석필! 최석필이 그랬어! 걔가 박태빈이랑 말싸움하다가 갑자기 돌았는지 칼을 들고 날뛰는 거야! 말리려던 애들도 칼에 찔리고 생 난장판이었다니까!”
“그래서 칼부림하는 최석필이 무서워서 도서실 밖을 뛰쳐나왔다고?”
‘밖에는 총 든 살인마가 날뛰고 있는데?’
서나호는 이번에도 그럴싸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다들 말리려고 했지! 근데 최석필이 칼 들고 워낙 미친개처럼 그러는데 어떡해? 말릴 엄두가 나겠냐고? 칼 맞아 죽든 총 맞아 죽든, 당장 칼이 가까우니까 뛰쳐나온 거지!”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본 교무실은 어쩌다가 저 꼴이 난 거야?”
“나도 방금 도착해서 몰라! 내가 오기 전부터 저렇게 돼 있었어! 안에는 죽은 사람밖에 없었고!”
“어떻게 죽었는데?”
“그딴 걸 자세히 볼 겨를이 어디 있었겠어?”
나와 서나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던 수진이가 조심스레 반문했다.
“그, 같이 빠져나온 애들은 어디로 갔는데?”
“나도 모르지! 나 살기에도 바빴으니까! 그만 좀 해! 이럴 때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다시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서나호가, 간청하듯 빈손을 내보이며 다가왔다.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응? 우리끼리 힘을 합쳐야 최석필 그놈한테…….”
녀석이 한 걸음 더 옮겼을 때.
깜박, 하고.
마법의 지도가 반응을 보였다.
2층 복도에 표시되는 초록 광점. 나를 상징하는 그 초록 광점 앞에 새로운 붉은 광점이 떠올랐다.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거리에서.
나는 붉은 광점을 보았다가, 시선을 끌어올렸다.
바로 눈앞에 이 붉은 점을 상징하는 자가 있었다.
언뜻 서나호의 눈동자에서도 같은 색채의 빛이 일렁이는 찰나,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또 그래?”
뭐라고 해야 할까?
일반적인 추리 스릴러 장르라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악당의 정체를 밝혀낸 탐정은 반드시 그 극적인 순간을 극적인 대사로 장식하기 마련.
그러나 나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서나호의 관자놀이에 망치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