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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고인물이 살아남는 법-167화 (167/264)

167화

167. 그들이 거두는 것(7)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너무 큰 거 아냐?”

서나호가 야유하듯 던진 말에,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뭘 원하지?”

“응?”

“너한테도 원하는 게 있겠지. 아니, 오히려 그걸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않았어?”

서나호는 사뭇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죽이고 가면 그만이니까.”

힌트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만약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얻어낼 게 없었다면, 이런 무의미한 잡담을 나누지 않았겠지.

이에 서나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감이 넘치는데? 딱히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 죽이기 전에 가볍게 놀려주고 싶었던 것뿐이라면?”

나는 다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겠지.”

서나호. 살인마의 공범. 순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 떼 무리에 자신의 존재를 감춘 늑대. 그 늑대는 미치광이였지만, 미치광이에겐 미치광이만의 논리가 있다.

나 또한 조예가 있는 그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기꺼이 응해주고말고.

“내 말이 틀렸으면, 해 봐.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지 절단부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이 블러핑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다. 관짝에 들어갈 준비나 해야지. 묘비에 적힐 말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향년 17세, 이서희. 죄 많은 인생 여기서 잠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가늘게 뜬 서나호가 목을 울리며 날카롭게,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뭐, 다소 비약과 엉성함이 있긴 하지만…… 일단 정답이라고 해둘까.”

유쾌함을 감추지 않는 악의 웃음.

* * *

“굉장한데.”

서나호가 음악적인 운율로 감탄했다. 손이 비었다면 손뼉이라도 쳤을 것 같은 어조였다.

“그냥 소문만 자자한 멍청이인 줄 알았는데. 역시 두 번의 희생제에서 빠져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가?”

“…….”

나는 살며시 망치를 감아쥐었다. 만에 하나 우려되는 것. 주의를 돌리고 뒤통수치는 수작.

그러나 녀석에겐 공격 직전의 적의가 없었다. 몸 어딘가를 긴장시키거나, 수상한 낌새를 보이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도 이런 식이었을까?’

눈빛 하나,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차분한 인간은 처음이다. 여기 갇혀 있는 사람들은 가장 이질적인 사례였던 ET를 포함해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 이놈에게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면모가.

대치가 시작된 시점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서나호가 말했다.

“네 말대로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거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두었으니까. 내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해선 너의 협조가 필요해.”

“네가 뭘 바라는데?”

“그건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노코멘트로 하고. 네가 물어볼 건 따로 있잖아?”

이놈은 이만한 죽음을 불러오고도 부족한 건가. 그러고도 달성하지 못한 목적이 무엇인지 신경 쓰였지만, 대답해줄 모양새가 아니었다.

“협조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딱히?”

서나호가 너스레를 떨듯 두 팔을 길게 벌렸다.

“굳이 의식하면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돼. 아니, 의미 전달이 잘못될 수 있으니 이렇게 말해야겠군.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거면 충분하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이번에 말한 사람은 반쯤 부외자처럼 서 있던 수진이였다. 수진이에게 눈을 돌린 서나호는, ‘아, 그래. 얘도 있었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의심스럽나? 그런데 내가 한 말은 진짜야. 믿든 안 믿든 그건 너희 자유지만. 너희가 뭘 하든 나는 방해하지도 않을 거고, 너희가 원한다면 미력한 손이나마 보태줄 수도 있어. 내 목적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아, 물론 여기엔 한 가지 단서가 붙을 거야.”

그럼 그렇지. 아무 제약도 없는 달콤한 제안 따위, 세상에 있을 리 없다.

“그게 뭔데?”

“내가 너희와 동행하는 것.”

“…….”

수진이를 인질로 저당 잡혀두거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야 한다거나, 하여튼 기분 나쁘고 치명적인 대가를 상상했지만, 그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이놈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이제껏 데드 체이스를 하며, 나는 갖가지 달콤한 제안으로 사람을 홀리려 드는 놈들을 자주 봐왔다. 너한테도 이로운 거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운운하는 것들.

그런 놈들치고, 의도를 감추고 함정을 파지 않은 부류는 거의 못 봤다. 애초에 걸려드는 게 한심한 수작인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게 네게 어떤 의미가 있어?”

되는 대로 해보는 말이었지만, 최소한의 맥락은 갖췄다.

서나호는 이런 요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놈이 원한다면 우리의 동의 없이도 얼마든지 쫄래쫄래 따라다닐 테니까. 그걸 막으려는 시도도 무의미할 것이 뻔한데, 하나 마나 한 단서를 붙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나호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내 의미는 내게만 의미가 있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는 너만의 의미를 찾아 이득을 챙기면 그만이잖아?”

무언가 그럴싸하긴 해도 실질적인 쓸모는 없는 대답이었다.

“결국 알려주지 않겠다는 거 아냐?”

“바로 그거지.”

휭, 놈이 쥔 장미칼이 불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반사적으로 움츠렸지만, 장미칼의 붉은 궤적은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나호는 커다란 식칼을 공중에 던지고 받으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나를 쉽게 못 믿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잡설이 길어져도 곤란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희한테도 그래. 너희가 2층으로 올라온 건, 내 작은 목각 인형을 꾀어내려던 거 아냐? 녀석이 언제 나타날 줄 알고 시간을 질질 끌고 있어?”

살인마의 위치는 문서고. 녀석이 올라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나 나는 서나호의 제안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마치 뇌리에 짙은 안개가 깔린 듯한 불투명함. 경각심은 느껴지지만, 무엇을 어떻게 경계하고 대비해야 할지, 전혀 그릴 수 없었다.

내가 노려봤지만, 서나호는 입술에 머금은 웃음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뭘 망설이는 거지? 네 사정은 뻔해.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쯤, 다 알고 있다고.”

그러던 중, 멀리서 웨애애앵― 하고 벌레가 우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잡혔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소리가 들린 쪽으로 쏠렸다.

사이렌.

이 장소가 본격적인 데드 체이스로 화하는 건가, 신경을 당겼지만 서나호의 중얼거림은 그를 부정했다.

“슬슬 경찰 나리들이 오고 있나 본데.”

“…경찰?”

“뭘 그리 놀라? 올 때가 됐잖아? 네가 도서실에서 한 짓도 있고. 먼저 빠져나간 애들도 있는 모양이고. 그래도 엉덩이 무거운 것들치곤 제법 속도를 냈어.”

과연, 귀를 기울이니 데드 체이스의 사이렌과는 달랐다. 송진서가 말했듯, 범죄자에게 등장을 알려 추가 범죄를 예방하려는 날카로운 소리.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야 할 범죄자는 여전히 우리 앞에 발붙이고 서있었다. 모든 게 예상대로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마치 마지막에 가선 자신이 이길 것을 아는 것처럼.

“갑자기 얼굴이 좀 폈군. 왜, 저것들이 도착하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안 달라질 이유는 뭐야.”

“허세 부리지 마. 만약 경찰 나리들이 온다고 한들 뭘 하겠어? 학교가 이렇게 된 마당에, 그 치들은 손가락 빨면서 구경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함부로 발 들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고 섣불리 움직이겠나. 이제껏 그랬듯 구출 시도 따윈 꿈에도 못 꾸겠지. 너도 잘 알 텐데.”

혀가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말이 맞다. ‘괴현상’이 일어난 모든 현장에서, 게임이 마무리되기 전에 구출을 성공한 사례는 없다.

“너랑 같이 간 세 사람. 유하나와 정예은, 그리고 송진서였나? 그 셋을 탈출시켜서 신고가 빨라진 건 분명 내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 꽤 아슬아슬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어. 결국, 이곳을 희생제의 성소로 변모시키는 게 한발 빨랐으니까.”

“집어치워.”

나는 망치를 서나호에게 겨눴다. 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왜 다른 멍청이들처럼 굴지? 아무리 그래 봤자 네가 기다리는 기회는 오지 않아. 시간 낭비라고. 너도 무작정 배짱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지.”

“…….”

“어디 보자. 바깥도 아주 어수선해질 전망이고. 이대로 가면 나도 그렇지만 너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거야. 남은 건 잘해봐야 피로스의 승리일 테고, 그보다 가능성 큰 건 양패 구상의 구도겠지. 네가 정 자폭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환영하는 바야. 나도 좋아하거든.”

부드럽게 휜 서나호의 눈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 생각은 허술해서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아무리 기고 뛰어도 내 손바닥 안이라고.

그러니, 얌전히 수긍하라고.

서나호라는 인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든 선택지를 닫아두고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길만 열어놓은 채, 그 길로 오길 기다리는 부류.

거미.

때로 제 거미줄에 걸려드는 거미가 있다는 걸, 녀석은 알까?

내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래, 알겠어.”

“서희야, 안 돼! 쟤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고?”

수진이가 다급하게 내 소매를 잡아챘다. 하지만 나는 항복 선언으로써 망치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수진이는 경악했지만,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저렇게 열심히 이것저것 준비했다는데, 따라주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조건 자체도 나쁘지 않아.”

“그걸 어떻게 믿어?!”

“괜찮아.”

이 시점에서, 수진이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눈이 서로를 담아내는 짧은 시간. 눈빛과 눈빛이 뒤얽혔다. 입을 빌리지 못한,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가 수없이 교차했고, 나는 이내 시선을 스르륵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네가 나를 믿는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서나호가 진정 바라는 것이 데드 체이스의 강림이라면, 승산은 이쪽에 있다. 이미 체인질링의 정체를 밝혀낸 시점에서 놈을 퇴출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

투표를 선언하는 것, 투표 과정에서 표를 모으는 것. 모두 쉽지 않은 난관이 기다리겠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대답해줄 문제였다.

수진이가 소매를 놓았다. 작달막하게 중얼거리며.

“…알겠어.”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서나호가 입술을 핥았다.

“둘이 너무 달달해서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네. 뭐, 좋아. 어쨌든 내 제안에 따라주겠다는 거지?”

나는 앞쪽의 시답잖은 개소리를 못 들은 척 말했다.

“그래. 따라다니든 말든 마음대로 해. 대신 네 입으로 말한 건 지켜줘야지. 우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방해하지도 마. 알아들었어?”

“아,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또 약속은 칼인 사람이거든. 물론 너희가 원한다면, 언제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라고.”

그러면서 히죽 웃는 낯짝.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턱을 들었다.

“그럼 증명해 봐.”

“증명?”

“말로 하는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무기를 버리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행위로 믿음을 증명해야지.”

말하면서도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게 나가야 할 지점이다. 먼저 굽혀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만들어 낸 자그마한 심리적 우위. 이걸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녀석이 명목상의 부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절한다면 그뿐이겠지. 그러나 결과로서의 실패와, 실패를 예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서나호는 내 예상보다 훨씬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야. 말로만 하는 약속에는 의미가 없지. 그러니까 먼저 제안한 내가 성의를 보일게.”

순순한 긍정이 수상쩍다. 뭘 하나 지켜봤더니, 서나호가 빙글빙글 웃는 얼굴 그대로 칼을 치켜들었다. 공격의 징후인가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칼끝의 방향이 이상했다.

서나호는 칼끝을 제 왼쪽 손목에 대었다. 마치 자해라도 하려는 듯한 품새가―

스억.

칼이, 손목을 망설임 없이 그었다.

피가 세차게 뿜어 나오면서 왼쪽 팔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얼빠진 내가 바라보는 가운데, 서나호는 붉게 젖은, 단단히 맛이 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때. 나름대로 약속을 강제할 제약을 걸어뒀는데. 이 정도면 충분한 성의 표시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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