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179. 재회의 약속(9)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갔다. 모두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탈라리아.
3차원 기동은 물론, 응용에 따라 기본적인 이동 속도를 크게 증강할 수 있는 아이템. 이 날개 달린 신발의 힘을 빌어, 나는 사선 중간에 난입할 수 있었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행위의 근거나 당위성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멍청한 짓거리. 그러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콰앙!
총성이 터졌다.
내가 수진이와 ET 앞을 가로막는 순간 일어난 일.
방패가 있었으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귀중한 아이템을 광대 괴물이 훔쳐 무덤까지 가져간 탓에, 총알과 내 몸 사이엔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었다.
퍼버벅―
총알이 빗발쳤다. 그 작디작은 납탄 알갱이들이 조그만 몸뚱이에도 진득한 악의를 머금고 살갗을 꿰뚫었다.
몸이 거세게 흔들리나 싶더니, 문득 발이 휘청이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어? 하는 순간에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살인의 순간이었을 때부터, 난 모종의 예감을 느꼈다.
나는 편히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혹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순 없을 거라고.
몸이 속 빈 마대처럼 흐느적거렸다. 털썩, 속절없이 쓰러지고 시야가 기울어졌다.
나는 척추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느낌에 흠칫 몸을 떨었다. 고통 이전에, 갑작스레 치달은 감각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뭔가, 지독하게 뜨겁다.
수진이가 입술을 벙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함이나 비명 그 어느 것도. 완벽하게 소리가 사라진 세상. 무성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조용하니, 좋네.’
아마 죽은 사람이 말이 없는 것은 이런 고요가 평온하기 때문일까.
“후우.”
들숨을 마신다.
“하아.”
날숨을 뱉는다.
“후우.”
들숨을 마신다.
“하아.”
날숨을 뱉는…….
“쿨럭.”
틀렸다.
입에서 무언가 뜨겁고 비릿한, 그러면서도 끈적거리는 것이 솟구쳤다.
한 박자 늦게,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귓가에 스쳤다.
“댳o掘9뱇!!!”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의 외침인지 분간이 안 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애초에 그걸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혀에 피 맛이 진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입은 상처를 자각했다.
나는 배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고막 위로 한 꺼풀 껍질이 덧씌워진 것처럼, 주위의 모든 잡음이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같았다.
몸의 가장 깊은 곳이 욱신거린다. 통증은 위에서 심장, 목, 눈으로 타고 올랐다. 마치 지독한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아려왔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흔들렸다. 초점이 어그러지고 흐릿했다. 그런 시야 속에서도 수진이와 ET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서희야!”
유달리 큰 비명이 둔해진 고막을 울린다.
갑자기 청각이 되돌아왔다.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소음이 막힌 둑이 터지듯 몰려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경악과 공포가 담긴 눈을 보며 그에 대답하려 했다. 대답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별문제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은 말 대신 다른 것을 뱉어내기만 했다.
“쿨럭, 쿨럭.”
나는 옆으로 누운 채 구역질하듯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검붉은 것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쏟아진 피 위에 덩어리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보통 각혈할 때 이런 것까지 섞여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흔치 않은 경우는 대개 심각한 쪽이기 마련.
콰앙!
먹먹한 총성이, 또 한 번 공기를 뒤흔들었다.
두 사람이,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두 사람이 픽 고꾸라졌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두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이 손이 진정 가치 있는 것에 닿았던 적이 있던가.
…언제나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침대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걸었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죽음을 부르는 건지, 죽음이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모르겠지만, 현상은 같았다.
내 주위에는 어느샌가 시체로 넘쳐나게 된다.
저번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목 안이 메스꺼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불덩이가 넘나드는 것 같았다.
도플갱어가 볼일이 끝난 산탄총을 내던지고는, 흡족한 투로 말했다.
“실로 성대한 대단원이었군. Magnum Opus!”
다만, 그걸 바랐다.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을지언정, 그에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며 저항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이제껏 쌓아온 업에 적합하지 않은 결말을 꿈꿨다.
하지만 틀랄록의 아가리에서도, 그림 리퍼의 낫에서도, 제스터의 단검에서도, 뱀파이어의 송곳니에서도 살아나온 내가, 그 사람 탈을 쓴 괴물들의 손아귀에서 끝내 빠져나온 내가, 한낱 정신에 병난 인간의 총알에 맞아 죽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하는 죽음은, 언제나 무의식 한쪽에 새겨진 죽음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는 죽음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는 오래전에 그린 죽음이 뚜렷하게, 지척에 다가와 있음을 알았다.
저벅, 머리맡에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직 살아 있나? 갑자기 끼어들어서 놀랐어. 나름 급소를 피해 쐈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그림자가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칼을 움켜잡고 들어 올려, 귀에 입을 가져갔다.
“함께해서 즐거웠어. 지금부터 약속해 둘 테니까 잘 들어.”
소근대듯 속삭이며.
“나중에, 머지않은 시일 내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러니까 너도 그때까지 죽으면 안 돼. 나를 다시 한번 만나고 나면, 그때는 바로 죽여줄 거니까. 알았지?”
몸에 피어난 열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런데도 추웠다. 온몸에서 땀이 흐르는데도 춥다.
“난 슬슬 떠나볼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안부 전해주길 바라. 다음엔 더 재미있게 놀아보자. 그리고 그때는, 너의 비명을 들려줘.”
그럼 이만. 잘 있어.
세심한 동작으로 머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뒷모습. 그를 끝으로, 그림자는 홀연 사라졌다.
* * *
나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수진이와 ET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온몸이 피범벅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세 사람의 일부가 튀어 있었다. 피라든가, 살점이라든가. 바닥에 이것저것.
“우웨에엑―”
끔찍한 격통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팔이 진이 빠져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어느덧 이곳까지 확장된 점액질 영역. 그에 물든 대리석 바닥 무늬와 두 사람의 쓰러진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수진이의 손끝이 보일 듯 말 듯 떨렸다.
‘…움직이고 있나? 잘못 본 게 아닐까?’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 수진이의 주위에도 피안화 같은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수진이의 팔이 조금씩 들썩였다.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내게 향하는 손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강하구나. 나는 탄식했다.
돌이켜보면 수진이는 그저 강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 번 부서지고 얼기설기 기워 붙인 나였기에, 네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강한 너였기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때에도, 나는 네게 기대어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너를 구한 것처럼.
너는 나를 구원했다.
그렇기에 너는 나보다 나중에 죽어야 하는 인간이다.
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네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도 수진이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팔은 붉은 절망 속에 잠겨 떠오르지 않았다.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차 손을 꿈틀거렸다. 안간힘을 써 몸을 비틀었다. 모든 의식의 초점을 손끝에 집중해서 수진이에게 향했다.
영원과도 같은 거리― 영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데. 그러나 나와 수진이 사이에는 영원히 닿지 않을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다를 수 없는 거리가.
언젠가 배웠던 지혈법은 피와 함께 가장 먼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기억난다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으니 무용지물이지만.
“얘, 들아, 갠, 찬…….”
숨이, 나오려던 말도 막혔다.
시야 가득히 흐르는 핏빛 기류의 저편에, 갑자기 눈부신 빛살이 내리쬐었다.
신성함마저 감도는 순백의 서리가 은은히 흩날렸다. 성스러운 휘광에 젖은 깃털들이 첫눈처럼 내렸다. 천국의 문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리게 느껴질 만큼 새하얀 빛이 점차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 이 빛은 어린 왕자가 사랑했던 황혼의 정경이다. 생텍쥐페리의 동화를 읽은 후로, 나 또한 좋아하게 된 풍경.
그 빛에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들렸다.
피아노 소리.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무릎에 앉히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얼굴 없는 엄마의 환영이 보였다. 그 옆에서 동생을 안고 악보를 넘기는 얼굴 없는 아빠의 환영도 함께였다.
행복하기만 하고 그게 당연하기만 했던, 그리고 그런 나날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 같았던 시간.
이제는, 아주 드물게 꾸는 꿈에서만 저 광경을 그릴 수 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는 나날을.
그것을, 나는 원했던 것 같다.
망가져 버린 유년기부터 줄곧.
아마도, 지금까지도.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게 이런 기특한 감정은 오래전에 말라죽었을 텐데.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사람 차별하는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안 준다니까.
아침에 아빠가 말했듯, 태어나서 세 번 이상 눈물을 보이면 사내대장부가 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울어버리면, 정말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
“서희, 스키. 정신, 차려.”
그렇게 말하는 ET의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더듬더듬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 돌아왔어.”
“신, 호?”
“방해, 전파… 사라, 졌나, 봐…….”
작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ET.
깊이 들이마시고 깊이 내쉬고. 두세 차례 그렇게 하자 뒤늦게 몸에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묵직한 현기증도.
나는 숨쉬기가 답답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사이에서 다시 피가 흘러넘쳤다.
“병, 원. 전…화, 해.”
내 핸드폰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떨어져 있었다. 수진이도 신고를 넣을 상태가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ET였으나, ET는 침통하게 말했다.
“액, 정, 깨…졌어.”
아래에서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제껏 없었던 밝은 불빛이 창문을 점점이 물들였다.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구조 작업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라고, 희망 사항 같은 추측이 떠올랐다.
하지만 학교의 가장 위층인 이곳에, 언제 구조의 손길이 올지는 미지수였다. 골든아워라는 용어가 심심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 터.
바닥을 점령한 점액질이 신선한 죽음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얼굴이 젖었다. 뜨겁게 흐른 액체가 입술 끝에 닿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ET가 무언가 말을 꺼냈다. 대부분 두런두런 잡음처럼 들렸지만,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섞였다.
―기적을 바라느냐?
기적. 그딴 건 믿지 않는다.
믿어본 적이 없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 잘난 기적이 있다면 부모님이 난도질당했을 때, 내가 괴물을 찔러 죽였을 때, 마왕과 숱한 체인질링들이 미쳐 날뛰는 이 세상에, 진작에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딱 한 번뿐이라도 좋으니까.
평생 부정하며 살아온 그것을, 구차하게 바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닥을 뒤덮은 점액질의 흐름이,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ET가 있는 쪽으로 거세게, 파도치듯 흘러가는 물결.
방금까지 쓰러져 있던 ET가 불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가물거리고 뭉그러진 시야에서, 그 실루엣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 뭘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굳건한 손길이 나와 수진이를 들쳐 메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촉을 끝으로, 눈꺼풀 뒤의 어둠을 한층 깊은 어둠이 뒤덮었다. 밀어내려 해도, 도로 되밀리는 암흑.
의식이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